5회 차 세미나 소감 및 의문들
선생님의 책을 읽고, 선생님과 대화하다 보면 선생님의 학구열, 방대한 관심사 같은 게 느껴지는데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특히, 초반부터 메인 텍스트에서 선생님이 하고자 했던 작업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그 전체적인 그림은 어떤지에 대해 고민했던 저로서는, 진도가 조금씩 나가면 나갈수록 선생님이 이 책에서 정말 엄청난 작업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물론 아직 혼란스럽고 의문이 드는 게 한두개가 아니긴 하지만요… ㅎㅎ 이미 그 혼란함과 의문점을 느껴버린 이상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풀어써보곤 싶은데, 디테일을 살리고자 하는 욕망은 능력도 안 되거니와 직장인으로서 시간의 한계가 있는 만큼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혼란함과 의문점을, 새로운 텍스트를 읽고 소화한 다음 저의 언어로 풀어 설명하기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텍스트를 막연하게 남은 문제의식이나 전체적인 구조를 떠올리며 그것을 부분적으로 발췌 및 인용하는 방식으로 풀어보려고합니다. 투박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언어에 기대어 말할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족한 능력과 다른 일에도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일개 직장인으로서의 한계라는 핑계를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2021년을 사는 한국인은 15세기의 동양(성리학) 텍스트보다, 어떤 점에서 15세기 서구(유럽)의 텍스트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구화되어 있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옛 동양의 텍스트가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사유하고자 했다면, 우리가 독해하고자 하는 동양의 사유가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이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의문입니다. 약 20년 전에 동서양의 두 철학자가 나눈 인터뷰에서 언급되듯(http://legacy.h21.hani.co.kr/h21/data/L000124/1paq1o01.html)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우리 것이니 관심을 갖자’는 차원을 넘어”서야, 동양사상을 그 맥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동양의 사상을 공부해야 한다기보다, 현재의 어떤 문제 때문에 동양의 사상을 공부해야 그 공부가 막연해지지 않고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표현을 빌자면, ‘독서-문제제기’의 방식으로 동양사상을 읽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독서-문제제기’의 방식은 내적으로 독서행위에 참여하면서(해당 문구의 맥락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상태로 읽으면서), 문제제기(비교의 준거점)를 통해 두 텍스트의 내재적 논리를 부각시켜 상호 비교해 구체적이고 유의미한 결론에 다다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질문이 사전부터 매우 중요해집니다. “유가의 의식이 그 고유한 논리 속에서 인본주의의 표본일 수 있었던 조건과 그 근본적 특성은 무엇인가?”(운행과 창조, 16)
선생님이 동양사상에 관심을 뒀던 이유 중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와 닿았던 건, ‘통합적인 사고를 지향했던 실례로서 동양사상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 대한 질문을 드리면서 느꼈던 의문점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 대한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많은 맥락이 있긴 하지만, 오독의 여지를 막고 구체적이고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를 내적으로 충실히 읽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매우요. (옛 텍스트를 읽고 일상적 관념에서의 깨달음이나 지혜를 얻을 게 아니라면요) 그리고 이는 선생님이 궁극적으로 동양사상을 통해 하려는 작업과 연관된다고도 생각하기에 제게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만옥 교수의 저서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의 출판사 소개글이 밝히듯 “근대과학의 관점에 따라 전통과학 분야를 분류하고 그 가운데서 근대과학의 요소만을 추출해 재배열하는 근대주의적 관점에 의거할 경우, 전통과학이 출현하고 작동했던 사회적・지적 맥락이 사상되어버릴 위험성이 크고, 그 역사적 위상에 대한 평가도 자의적 해석이 되어 형평성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근대학문, 근대라는 단어에 ‘이전의 것을 마냥 따르지 않고, 나의 머리로 생각하고 내가 직접 찾겠다는 정신’ 만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근대학문을 그렇게 정의하는 게 타당한가? 그 기준이 근대학문과 고전학문을 가르는 기준으로 충분한 건가? 설령 그게 타당하다고 해도, 장현광의 성리학적 맥락을 제외하고 특정한 구절을 뽑아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건 적절한가? 그렇게 따지면, 여신(女神)이 말한 것일지라도 “논변으로 판가름하라”라고 말하는 파르메니데스 단편(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279)도 근대적인 건가? 어떤 권위에 의거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적 생각을 통해 직접 판단하라고 하고 있으니까. 이런 논리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보고 시대를 앞선 사고, 선구적이었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5회 차 세미나를 위한 소감글에서도 인용했듯, ‘장현광이 수용한 주요 이론은 소옹의 역학적 관점에 상당히 가깝고 독창적인 부분이 있긴 했어도 여헌의 역학은 철저하게 성리학의 범주 내에서만 자유로웠던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세종대의 과학기술의 눈부신 성과를 두고(‘농사직설’, ‘향약집성방’, ‘훈민정음’, ‘고제 연구와 아악의 정비’, ‘천문 역법 사업’ 등) 이 시기 과학기술의 자주성을 치켜세우는 시각이 많았는데(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의 자주적인 게 중요하다라는 의식의 발로로 세종대에 과학기술은 뛰어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같은 생각들) 사실 이 자주성이란 것은 중화세계라는 세계관 안에서의 자주성, 즉 중국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철저히 익혀 자기화한 결과였습니다.(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저는 이게 장현광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격물의 대상으로 하늘과 땅을 비롯해 일월성신에서 비주초목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연 세계에서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조목조목 거론하고 있으며, 이들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거나 귀로 들어서 그 실상을 직접 파악해야 함을 강조”(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55) 했던 사실들도 성리학의 틀 안에서 모두 이해가 가능한 행동범위 안에서의 텍스트(주희희 격물치지에 대한 해석)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격물이라 말하고 도리어 궁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궁리’라고 말하면 마치 허공에 매달려서 잡을 것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격물이라 말하면, 저 형이하의 기에 나아가서 바로 저 형이상의 도를 찾으니, 여기에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보게 된다. 때문에 다만 격물이라 말한 것이다.” - 주자어류 62권 - 안유경,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250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보다 더 와닿았던 의문은, 근대를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크게 없는 것 같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근대를 그렇게 이해해도 저 짧막한 한 구절에는 내포되어 있는 명제, 판단, 사실들이 꽤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 문장은 내재적인 것뿐만아니라 관계적인 맥락안에서도 의미를 부여받으니까요) 굳이 거창한 담론을 끌어들지이 않아도,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근대라는 단어에는 대단한 성과를 내놓은 근대과학의 발판으로서의 ‘자주적 정신’이라는 아우라가 있으며 이미 그 순간 근대와 관련된 여러 담론과 무관하지 않아집니다. 그 잣대로 보는 순간 장현광의 사상은 서구적 근대(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절로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와 유사한 정도만큼 독창적이고 선구적이지만, 서구의 근대라는 정상성과 비교해 불완전하고 미흡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메인 텍스트에서 동양 사상의 그런 불완전함, 미흡함에 대해 지적을 많이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장현광의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게 불가능했는지(프랑수아 줄리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왕부지에게 창조사상이 불가능함을 이론적으로 가늠하여 그에 따른 근본적 차이를 헤아려 보기 위함이다.”(운행과 창조,22))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자리잡기 힘들다고 생각(고민을 한다고 해도 피상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현광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제 다시 ‘동양인의 통합적 사고, 그런 사고가 지금 필요하기 때문에’라는 문제의식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면,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5회 차 세미나를 위한 질문 첫 번째에 그와 관련된 글을 끼적이긴 했는데, 시간상 아쉽게도 직접 질문을 드리진 못했습니다. 제가 5회 차 세미나를 위한 소감에서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책 초반에 <<성학십도>>와 <<심우십도>>가 “형식적 보조적 기능 이상의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 아니지만”이라고 나와있으나 사실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닌가?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렇게 실질적 의미를 담는 게 타당한 건가? 설령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만했다고 하더라도 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은 적절했는가?’ 저는 저 두 텍스트가 선생님이 초반에 말씀하신 대로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으로 사용되었다고 했을 때도 의문점이 있었고,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책에서 그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을 때도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전자는,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만했다고 하더라도 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했냐는 질문입니다. <<성학십도>>와 <<심우십도>>가, 메인 텍스트(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안에서 인용되고 사용되는 방식이 텍스트의 본 뜻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게 이렇게 사용되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본래 심우도에서 牛를 통해 표상하고자 했던 앎의 대상은 我, 子我, 心 등과 같은 대상이고, 이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空을 깨달아 금강경 식으로 말하자면 중생을 제도 하는 과정을 담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 인용하는 방식은, ‘앎’이라는 추상적인 키워드만 유사하다는 점에서, <<심우십도>> 본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이 모두 무너진 채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자의 질문은, 메인 텍스트에서 <<성학십도>>나 <<심우십도>>가 - 특히 <<성학십도>>가 - 보조적, 형식적 기능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는 것 아닌지, 그런 위치에 놓는 것은 타당한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제가 특히 <<성학십도>>가 단순한 보조적, 형식적 기능 이상의 위치에 놓여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이게 통합적 앎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체계이자 일관된 스토리 또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걸 통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줄거리와 뿌리를 찾는 일은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글의 구조를 보면, 칸트를 독해하셨던 텍스트에서 사용하시던 ‘앎의 바탕 틀’을 ‘앎의 바탕 구도’로 개념화하시고 각각 물리학 체계들 등을 앎의 바탕 구도라는 체계에 맞게 요약해 이를 <<성학십도>>와 같이 열 가지의 그림으로 나열하시고 있습니다.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로부터 시작해 인간 세계의 가치 및 당위를 이야기하는 <<성학십도>>의 맥락을 그대로 차용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보면 <<성학십도>>가 단순히 보조적, 형식적 기능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많은 물리학적 지식을 통합할 줄거리로, 서사로, 스토리로, 체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의도하신 바를 아직 명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앞으로 읽어나가야 할 책 분량이 더 많이 남은 만큼…) 적어도 이런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거라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성학십도>>나 <<심우십도>>는 대상으로 삼았던 나름의 맥락을 지닌 앎이 있었고, 그 앎을 각자 성리학적, 불교적 세계관 안에서 해설한 텍스트입니다. 각각의 그림은 각 장마다 내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그림과 관계적으로도, 그리고 ‘십도’라고 하는 전체적으로도 담긴 의미가 있을 만큼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단순히, 통합적 앎을 추구했던 전형으로서 껍데기만을 이용하는 순간, ‘본 텍스트가 지닌 내적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학십도>>가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고 해서, 그게 <<성학십도>>의 틀을 차용한 <<심학십도>>가 통합적인 세계관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는 아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껍데기 보다 더 중요한 건 통합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구체적인 서사, 그리고 각 앎의 바탕 구도 사이의 관계, 앎의 바탕 구도와 서사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2회 차 세미나 질문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의 자연철학을 좇는다고 했을 때, 선생님의 자연철학은 그것과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 단순히 복고주의인가? 아니면 진보가 있었나?” 이 질문은 앞서 ‘장현광과 근대’와 관련된 질문과 유사한 맥락에서 던진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애초에 현재와 같이 분화되고, 복잡해진, 기능화된 사회에서 ‘통합적인 사고’를 하려고 하는 행위가 과거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고(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복고주의로 회귀할 경우에는 과거에는 이랬으니 이걸 따라서 현재에도 해보자, 그걸 본받자 등과 같은 피상적인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서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내재적인 독해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결과가 그 피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내재적인 독해가 중요한 이유, 동서문화비교 분야의 권위자였던 프랑수아줄리앙이 왕부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사유를 18세기와 ‘같이’ 표현할 수 있기를 욕망했던 이유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통합적 사고’와 관련해 내적으로 충분히 읽는다는 건, 이런 질문을 더 던져보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성리학적 세계나 스토아학파적 세계에서 제시한 통합적 세계관, 통합적 사고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에는 왜 그런 통합적 사고가 점차 없어진 걸까? 그럼에도 지금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 질문들을 깊이 파고들어봐야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그럼으로써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통합적 사고의 틀을 직조하는 게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저 질문들을 계속 염두에 두어야 더 구체적인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그에 따른 다른 의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인간의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언급하려면 ‘감정’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는 거 아닐까?’, '뫼비우스의 띠의 문제는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사고하고자 한다면 엄청나게 복잡해질 텐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셀라스Willfrid Sellars의 주요 문제의식으로 해결하고자 한참을 노력했던 게 과학적 이미지와The Scientific Image 현시적 이미지The Manifest Image 사이의 관계가 아니었던가?’, ‘십도十圖를 “말로 전하기 어려운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랬나? <<성학십도>>의 독자는 선조가 아니었던가? 이건 士들이 해석하고 소비하는 텍스트였는데, 그렇다면 이건 대중에게 전체 그림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특정 과목의 중간고사 범위의 내용을 교육받은 학생들에게 선생이 제공하는 요약본에 가까운 건 아닐까? <<성학십도>>에 담긴 글은 당시 士나 王이 어릴 적부터 계속해서 접했던, 삶과 밀접했던 것들이었으니까.’ 이런 다양한 질문도 떠올랐는데, 추후에 이야기 해볼 기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언급했던 통합적 사고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충분히 논리적으로, 구체화한 상태로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직 제 머릿속에서도 잘 정리가 된 것 같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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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철학 강의 공부모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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