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란 말, 그리고 철학과 과학의 분리
자연철학 세미나 단체문자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이 나와서 제 생각을 몇 자 적어봅니다. 그냥 제가 공부해 온 분야에서 하는 표준적인 이야기를 제가 이해한 대로 또 제가 기억하는 대로 적은 것이어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그래도 참고 내지 비판을 위한 출발점 역할을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여기에 글을 올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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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사이언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과학(科學)이란 용어를 처음 쓴 것은 1870년대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로 공인되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Nishi_Amane) 니시는 Philosophie를 希哲(키테츠) 또는 哲学(테츠가쿠)로 번역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科学(가가쿠)는 영어 science 또는 네덜란드어 Wetenschap의 번역어로 니시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과학자를 의미하는 scientist는 1833년에 처음 등장했고,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1834년이 가장 빠릅니다. 그 전까지는 science를 전문으로 하는 집단이 따로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scientist#etymology
영어의 science는 14세기에 처음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식’ 또는 ‘앎’ 일반에 대해 사용된 용어라서, 지금처럼 자연에 속한 것을 탐구하고 논쟁하는 지식체계라는 의미로는 natural philosophy (자연철학)라는 용어가 훨씬 더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독일어로 Naturphilosophie가 자연철학인데, 영어에서 Naturphilosohie는 이탤릭체로 쓰고 18세기 독일 낭만주의 관념론을 주로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반면, 독일어권에서는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부터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과 이슬람 자연철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2. 과학이 철학에서 독립하기 시작한 것을 언제로 보는게 좋은가요? 아니면 이런 질문이 부적절할까요?
과학과 철학의 분리는 그 자체로 상당한 분량의 논문 또는 단행본 이상의 대답이 필요한 매우 복잡하고 어렵고 또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철학사의 맥락에서는 20세기 이전까지는 과학에 속한 주제들과 겹치는 문제를 많이 다루었고, 예를 들어 칸트가 철학을 엄밀한 과학(Wissenschaft)의 기반 위에 놓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흔히 이 때의 Wissenschaft가 ‘과학’과는 다르다고 여겨서 그냥 ‘엄밀한 학’ 또는 ‘엄밀한 학문’으로 번역하는 것을 아실 겁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2년에 낸 책 Die fröhliche Wissenschaft도 영어로 The Gay Science로 번역됩니다. (처음에는 Joyful Wisdom이라 번역되었지만 말이죠.)
빌헬름 딜타이가 1880년대에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n)과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을 구별하면서 ‘과학’은 자연과학을 대체로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신과학’이란 독일어 용어는 가령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철학’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논리실증주의와 영미 분석철학이 힘을 갖게 되면서, 철학에서 다루는 세부 주제들은 사실상 모두 각각의 개별과학으로 모두 분산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철학에서 형이상학(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이 가장 핵심적인 영역으로 되어 있고, 이 가장 추상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주제는 개별과학에서는 도무지 다룰 수 없는 거대한 영역이 되어 있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개별과학과 연결되어 있어서, 철학과 과학의 대화가 절실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회익 선생님도 함께 참여하신 <현대과학과 철학의 대화>라는 제목의 논문집이 지난 6월에 간행되었고, neomay3님이 장회익 선생님의 원고를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에 정리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철학과 과학의 분리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글과 책이 있고, 제가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적은 위의 글은 너무 간략한 스케치이고 또 세부에서 틀린 점도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니체의 <즐거운 과학>에서 Wissenschaft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상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3. 과학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분야마다 이야기가 좀 다르겠습니다만, 과학사에서는 ‘과학 science’이 생겨난 시기를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합니다.
(1) 우선 내용상 실질적으로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탐구했던 자연철학의 시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학자들(탈레스 등)의 논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과학사 통사는 대체로 모든 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처럼 씁니다. 요즘은 분위기가 좀 바뀌어서 고대 바빌로니아 점성학/천문학이나 심지어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 맥주를 만들었던 기록도 생화학의 시작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은 8세기 무렵 이슬람 자연철학으로 계승되고 이것이 12세기에 소위 ‘12세기 르네상스’ 또는 ‘번역의 홍수’를 통해 라틴어/기독교권의 자연철학으로 연결됩니다. 이 무렵 중세 유럽에 대학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학에서 교육/연구되던 자연철학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입니다. 대학 바깥에서는 연금술/점성술과 연결되었는데, 가령 연금술은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얼마든지 화학 연구로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휘포크라테스-갈레노스-아비케나(이븐시나)의 고중세 의학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상해 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흙, 물, 숨, 불) 이론을 원용하여 4체액(피, 점액, 황담즙, 흑담즙) 이론을 만들고, 이를 다시 3원리(수은, 황, 염)와 결합시켜 질병과 치료를 설명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음양과 5행에 기반을 둔 의학이 발전한 것과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서양의학은 18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의 클로드 베르나르나 루돌프 피르호나 제멜바이스 쯤 되어서야 지금 우리가 익숙한 서양의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2) 그러나 우리가 흔히 ‘과학 science’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근대과학 modern science’입니다. 대략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에 확립된 것으로 봅니다. 1540년대에 굵직한 책 세 권이 나왔습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회전론>을, 베르살리우스가 <인체해부론>을, 1545년 카르다노가 <대수학의 방법>을 발표했습니다. 중세유럽의 자연철학과 상당히 다른 새로운 자연철학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과학사에서는 이것을 근대과학의 시작으로 봅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 강의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조선의 여헌 장현광이 이 시기와 연결됩니다. 조금 나중에야 비로소 뉴턴이 등장합니다.
넓게 보면 이 모두가 ‘자연철학’이지만, 과학사에는 16-17세기의 굵직한 변화를 ‘과학혁명’이라 부르면서 그 전과 다른 새로운 체계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물론 피터 디어 같은 과학사학자는 자기 책의 첫 문장을 “과학혁명이란 것은 없다.”로 시작하여 기존의 과학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3) 세 번째 의미의 ‘과학의 시작’은 18세기말 내지 19세기초입니다. 1830년대에 ‘과학자’라 부르는 집단을 부르는 용어가 새로 만들어질 만큼 전문영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생물학 Biologie’이란 용어가 1802년에 처음 등장했고, 그 전까지는 광물연구나 신비현상까지 포함하던 ‘물리학 physique’이 엄밀한 수학적 이론과 세밀한 실험과 만나 새로운 의미의 ‘물리학 physics’으로 정립되었습니다. 과학사 분야에서는 이를 “과학 전문분야의 정립”이란 용어로 부릅니다. 그 직전의 산업혁명과 맞물려 사회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1860년대에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서 거대한 과학-기술의 힘을 직접 목도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일본으로 가져오려 하면서 science를 ‘과학’이라고 번역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급격하게 ‘서구화’한 것은 실상 ‘과학기술화’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 형식이 “과학! 과학! 조선사람에게 과학을 주어야겠어요.”라고 부르짖었던 것도 과학(또는 과학기술)이 세상을 얼마나 심각하게 바꿀 수 있는가 이광수가 절감했기 때문일 겁니다. (https://bit.ly/3izPzTz)
(4) 세 번째 개념과 연결되는데, 프랑스의 철학자/과학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테노크사이언스 technoscience’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길게는 19세기 중반 이후, 짧게는 1950년대 이후의 과학은 기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를 ‘과학’이나 ‘기술’로 따로 부르지 말고 둘을 합해 ‘테크노사이언스’라 부르자고 한 겁니다. 대략 ‘기술기반 과학’ 내지 ‘기술지향 과학’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철학을 잊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지칭한 과학은 바로 이 테크노사이언스입니다. 실질적으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철학적 사유’ 더 좁게는 ‘자연철학’은 한가로운 사치로 여져집니다. 당장 몇달 단위로 무한 경쟁 속에서 새로운 것을 개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연구의 시작과 끝이 모두 이윤과 경제가치인 시대에서 철학적 사유는 세상물정 모르는 한가로운 신선놀음으로 폄훼됩니다. 테크노사이언스의 전문가들은 철학보다는 경제에 훨씬 더 가깝고 더익숙합니다. 요즘 대학에 있는 과학자들도 웬만하면 벤처 기업 같은 것을 함께 경영하고 연구의 산물은 맨먼저 특허권 검토로 연결됩니다. 10여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황우석도 전형적으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노라는 말이 들어가는 여러 기술이나 QLED나 OLED니 스마트 기기니 자율주행이니 스마트 도시 어쩌구 하는 거의 모든 담론이 실상 모두 이윤과 잉여가치를 그 밑에 깔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분야에서는 과학의 시작을 이런 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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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에 올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