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님(neomay3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
neomay3님(눈사람님)의 질문에 대해 저의 의견을 적어 봅니다.
"장회익선생님의 심학 1~10도는 ‘처음 상태’에서 ‘나중 상태’로 변화하는 원리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대상의 상태가 변화하는 원리를 알고 예측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물을 이해했다, 그 사물의 본질을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라고 물어보셨는데, 제가 이해하기로 적어도 세 가지 접근에서 정확히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흥하여 이슬람으로 건너가 더 크게 확장되고 다시 12세기 유럽으로 유입되어 16세기까지 유럽의 대학에서 활발하게 토론되고 논의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 가장 큰 관심은 '운동 motus'였습니다. 실상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뉴턴에 이르러 '운동'을 '위치의 운동 motus localis'에 국한시키기 시작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는 늘 '변화'를 해명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둘째는 동아시아 성리학입니다. 주역이나 역경(이경)이 변화무쌍한 상황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점술과도 깊이 연관됩니다. 다만 주역은 개인이나 국가의 길흉화복의 예언하는 것뿐 아니라 자연의 온갖 변화무쌍한 것을 온전히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변화에 대한 예측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은 단지 주역이 아니라 공맹의 유학과 노장의 도교와 불교의 세계관을 통합하여 사실상 모든 것(인간의 성정, 사회의 운영원리, 음악과 예술, 해달별의 운행, 우주의 운명)을 포괄하는 종합적 사유입니다. 흔히 유학이라고 폄하하지만, 실상은 11세기에 주돈이(周敦頤 Zhou Dunyi)에서 시작하여 주희(朱熹 Zhu Xi)와 정이(程頤 Cheng Yi)가 도교적 형이상학과 불교 사상을 유학의 도덕철학과 결합하여 만든 유불선 통합의 체계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리(li)와 기(qi)의 개념과 음(yin)과 양(yang)의 조화를 통해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주역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주희의 자연철학은 사실상 모든 대상과 영역을 다루는 엄청난 사유였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Zhu_Xi )
세 번째가 바로 17세기 이후 근대물리학입니다. 특히 동역학(dynamics)이라 부르는 세부 분야인데, 힘의 평형이나 물질의 구성을 다루는 다른 분야들과 달리, 구체적으로 운동과 변화를 해명하고 상태와 현상을 예측하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아이작 뉴턴이 당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은 것은 빛의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반사망원경을 만든 것뿐 아니라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고 심지어 에드먼드 핼리의 혜성이 곧 다시 나타나리라는 놀라운 예측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미적분학을 만든 이유도 변화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학적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적분학이라는 언어를 섭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도 가장 큰 관심을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있습니다.
neomay3님(눈사람님)이 수학보다 물리학이 더 어렵다고 얘기하시는 게 아주 흥미롭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구체적인 것을 최대로 제거하여 추상화시켜 버린 뒤, 그 추상화된 하늘 위에서 고준담론을 펼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거친 사람이 아니라면 따라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를 보면, 항상 추상적 기호가 감추고 있는 구체적 상황과 예를 먼저 생각합니다. "3+4"라는 낯선 기호는 여러 약속과 규칙을 잘 알아야 하지만, 인절미 세 조각 먹고 나중에 네 조각 더 먹으면 모두 몇 조각 먹은 거냐 하는 질문에는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가령 dx/dt 와 같은 낯선 기호를 이해하려면 극한이라든가 곡선의 기울기라든가 아주 작은 양(무한소) 같은 개념에 익숙해야 하고, 여하간 미분이라는 개념을 학습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특정 두 지점 사이에서 평균 속도가 얼마인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고, 더더욱 순간적으로 속도가 얼마인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구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가 쉽습니다.
물리학에서 수학과 달리 이러저러한 가정들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말하면, 추상적인 기호를 납득하고 다루기 위해서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으로 구체화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호로 1/2 k x^2 어쩌구 쓰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렵지만, 용수철 끝에 달린 쇠공이 떨리는 모습으로 상상하면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자연철학이라는 것이 갖는 특별한 지위가 있습니다. 자연철학은 수학이나 물리학보다도 훨씬 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고준담론입니다. 자연철학에 비하면 수학이 오히려 더 구체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공부하고 고민하고 세미나하고 강의한 '자연철학'에 속하는 지식과 개념들이 물리학보다 더 어렵습니다. 제가 어릴 때 물리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인문학이나 다른 자연과학보다 더 단순하고 쉬웠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은 풀리는 문제만 풀기 때문에 암기할 것도 없고 생각도 단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neomay3님(눈사람님)이 수학보다 물리학이 더 어렵다고 얘기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neomay3님(눈사람님)이 언급하신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hinese-change/는 "변화에 관한 중국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역의 철학"입니다. '주역 周易'을 '역경 易經'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 읽으면 Yìjīng(이칭)이라서 영어로 I Ching 독일어로 I Ging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뉴턴보다 더 빨리 미적분학을 만들어낸 라이프니츠는 꽤 일찍부터 주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주역이 나온 것이 기원전 10세기 서주 시대쯤이고 전국시대에 더 널리 퍼졌다고 하니까, 3천년 전에 처음 등장한 것인데, 그 뒤로 온갖 방식으로 확장되고 재해석되고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포장되었습니다.
실상 주역은 변화와 조화의 모든 것을 다루는 사유이자 철학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연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대 중국에서 발원하여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진전을 이루었다기보다는 답습과 무비판적인 신성화와 신비주의화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사변에 머물고 말았다고 봅니다.
아래 링크는 중국 남경(난칭)대학 철학과에 올라와 있는 "주역의 자연철학"이란 논문입니다.
https://philo.nju.edu.cn/f4/54/c4692a128084/page.htm
장회익 선생님께서 <자연철학 강의>의 심우10도의 첫 그림을 여헌 장현광 선생에게서 가져오신 것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실상 주역의 자연철학이라는 면면한 계보를 활용하시는 셈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자연철학 강의>는 바로 근대물리학으로 이어갑니다. 문제의식은 수용하되, 주역의 자연철학을 답습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다르게 보면 근대물리학조차 답습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임에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물리학계에서는 온갖 잡다한 문제를 풀어내고 분석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자연철학적 사유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물리학 강의 시간에 자연철학적 성격의 질문을 하면 교수들도 난감해 할 뿐 아니라 오래 전이기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난해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심오한 의미는 묻지 말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과 수업은 늘상 어렵고 복잡한 계산과 개념이 난무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그 복잡한 개념과 계산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즐거워 하거나 괴로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헌학연구회가 2015년에 낸 <여헌학의 이해 : 여헌 장현광의 학문과 사상>에 장현광의 학문에 대해 상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https://bit.ly/2PigCTp) 특히 "자연학, 인간학, 형이상학을 포괄하는 우주설"이란 제목의 장이 직접 관련되겠습니다.
지난 2018년에 장현광의 <우주설>의 한국어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https://bit.ly/2ONMuQC) 지금은 전북대에 있는 이기복 교수께서 번역했는데, 저도 이기복 교수와 이런저런 친분도 있고 동아시아 과학사 한문원전 강독 모임에도 끼어서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장현광의 저작은 가령 <여헌집>을 보면 실로 방대함을 알 수 있는데, 거기에 <우주설>도 없고 <답동문>도 없습니다. <宇宙要括帖>은 목차만 있습니다. (https://bit.ly/2rfdIXu )
2016년에 나온 <원전으로 읽는 여헌학 : 여헌선역집>(여헌학총서 2)에 <태극설> <우주설> <답동문>의 원문과 번역이 실려 있습니다. (https://bit.ly/2rfjYy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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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
2019-12-11 00:54새로 정리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두번이나 답을 하시게 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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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
2019-12-11 19:04자연철학 그림노트 3장을 기대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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