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의 여러 성분들 중 하나
아이작 뉴턴이란 인물을 가령 R.S. Westfall의 평전 Never At Rest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참 기이합니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와 비교해 보면, 그 사람의 출신과 계급과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이 워낙 다릅니다. '아이작 뉴턴'이란 사람을 '성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자연철학자 아이작 뉴턴, 수학자 아이작 뉴턴,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연금술 연구자 아이작 뉴턴 못지 않게 중요한 '성분'이 바로 조폐국장 아이작 뉴턴입니다.
뉴턴이 태어날 무렵부터 영국은 극심한 내전에 휘말렸습니다. 흔히 영국 내전 또는 청교도 혁명이라 부르는 English Civil War는 1642년부터 1651년까지의 기간입니다. 찰스 1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당파(Royalists "Cavaliers")와 의회파(Parliamentarians "Roundheads") 사이에서 불거진 갈등이 1642년 일차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소위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이란 이름으로 공화정이 처음 수립됩니다. 하지만 결국 의회파 군대의 수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1653년부터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왕정보다 혹독한 독재 정치를 하게 됩니다. 크롬웰이 말라리아로 죽은 뒤 공화정은 붕괴되어 버리고, 1660년 망명해 있던 찰스 2세가 돌아와 결국 왕정복고(The Restoration)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Oliver Cromwell)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1661년은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있습니다. 1209년에 설립된 케임브리지 대학의 오랜 역사에서 수학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가 이 무렵이기도 합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컬리지의 제1대 루크시안 석좌교수 아이작 배로우가 뉴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배로우는 유율법이나 구적법에 관련된 자신의 연구 내용을 뉴턴에게 전해주었을 뿐 아니라, 뉴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뉴턴이 대학을 졸업할 때 의무사항이었던 졸업논문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배로우가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 안에서는 이 학생의 졸업논문을 지도할 수 있는 교수가 없다."라는 황당한 기록과 함께, 뉴턴이 졸업논문을 쓰지 않고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1669년 자신의 후임, 즉 제2대 루카스 석좌교수로 뉴턴을 추천했는데, 루카스 석좌교수로 취임하기 위해서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서품과 비슷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대학의 이름은 '트리니티' 즉 '삼위일체'였지만, 뉴턴은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해석을 통해 아리우스주의라는 '일신론'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뉴턴의 성격상 공개적 신앙고백의 자리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할 것이 명약관화였는데, 배로우는 이 신앙고백의 절차가 교수 임용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왕실에 설득했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강의 실력이 형편없었던 뉴턴의 광학 강의(제목과 달리 기하학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에 들어오는 학생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설 중 하나는 뉴턴이 강의하던 강의실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깜짝 놀랐는데, 왜냐하면 학생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소수였던 학생들이 학기가 진행되면서 하나둘씩 빠져나가서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강의를 했다는 전설이죠.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낱 어설픈 교수에 지나지 않던 뉴턴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 것은 1684년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1)의 방문이었습니다. 행성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뉴턴의 '광팬'이 되었습니다.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집필할 수 있도록 재촉하고 응원했을 뿐 아니라, 런던 왕립협회가 이 책의 출판 비용을 대지 않겠다고 결정하니까 아예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그 책의 출판비용을 감당했습니다. 핼리가 없었다면 뉴턴은 그냥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광학을 가르치는 (그러나 형편없이 가르치는) 보잘것없는 교수로 끝났을 겁니다.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판되면서, 뉴턴의 명성을 한없이 올라갔고, 1689년에는 국회의원이 됩니다. 의원으로서 유일하게 발언한 것은 날씨가 추우니까 창문을 닫아달라고 한 게 전부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뉴턴의 사회적 지위는 1696년 조폐국장에 임명되면서 상승세에 오릅니다. 요즘식으로 말해서 조폐국이지, 절대왕정의 시기에 왕립조폐국(Royal Mint)의 Warden of the Mint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권력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 주조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발행 기관이 호조였으니까, 약간 과장하면 호조참판 정도 되는 지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위조화폐가 극심했는데, 새로 조폐국장에 임명된 아이작 뉴턴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내립니다. 화폐위조범은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고 "hanged, drawn and quartered"의 형에 처했다는 겁니다. 이 형은 "The convicted traitor was fastened to a hurdle, or wooden panel, and drawn by horse to the place of execution, where he was then hanged (almost to the point of death), emasculated, disembowelled, beheaded, and quartered (chopped into four pieces). His remains would then often be displayed in prominent places across the country, such as London Bridge, to serve as a warning of the fate of traitors."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정말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여하튼 뉴턴의 엄청나게 강력한 명령 때문에 화폐위조범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업적 덕분에 1699년에 Master of the Mint로 직급이 올라갑니다. 영국 왕립조폐국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Craig, John (1946). Newton at the Mi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White, Michael (1997). Isaac Newton: The Last Sorcerer. Fourth Estate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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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보니까 1687년 <프린키피아>가 출판되고 대중적 인기가 올라갔다는 말도 일종의 신화 내지 과장인 것 같습니다. 뉴턴의 그 책을 이해하는 사람도 극소수였고 1710년대 이후에야 <프린키피아>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겼다고 말하는 게 옳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뉴턴이 Master of the Mint까지 된 것이 <프린키피아> 덕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