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보람의 가치론과 실재의 질서
지난 녹색문명공부모임에서 시인처럼님이 매우 흥미로운 발표를 해 주셨습니다.
"보람의 가치론"이라는 이름의,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논의에 대한 단초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더 심화된 논의를 만들어가기 위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페이스북에서 인용하신 글은 적절하지 않는 듯 합니다. 노벨상 상금으로 알베르 카뮈(1957년 노벨문학상)는 고급 스포츠카를 사서 즐기다가 사고로 죽었고 알베르트 슈바이처(1952년 노벨평화상)는 아프리카에 병원을 설립하여 많은 사람을 살렸다는 그 글은 악의적인 듯 합니다. 카뮈는 나치 치하에서의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유명하며, 그의 문학이 나름의 가치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카 운운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그 두 명을 대조하려다 보니 프랑스 사람인 알베르 카뮈와 독일 사람인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이름을 같은 Albert로 적고, 노벨상 수상연도도 일부러 틀리게 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 행복'이라든가 '진정한 행복' 등을 말할 때 언어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발표를 들으면서, 정말 그와 관련된 언어가 부족할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보람'과 '행복'을 각각 온생명(보생명)을 향한 것과 낱생명을 향한 것으로 대비하면서, 조금 더 과장하면 슈바이처는 '보람'을 향하고 카뮈는 '행복'을 향한 것처럼 서술한 것은 말 그대로 논리 전개상의 대조를 위한 단순화라 생각합니다.
저는 알베르 카뮈가 레지스탕스 활동이든 그의 문학이든 많은 활동 속에서 슈바이처 못지 않게 사회 속의 보편적 가치를 높이고 다듬는 일에 매진했다고 믿기 때문에, 슈바이처와의 대비가 아무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뒤에 말씀하신 다원주의 가치와 연결될 것입니다. 온생명 개념을 중심으로 무리하게 행복/보람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화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현실적인 문제 등 그 층위와 범위가 다른 여러 질서들을 한꺼번에 '3차 질서'라는 식으로 풀어내신 게 아닌가 염려됩니다. 제 질문의 핵심은 '보람'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온생명론의 틀이 부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가치와 관련된 수많은 논의가 있는데 굳이 온생명론의 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제가 이전에 공부했던 괴테의 자연철학과 이를 계승하여 논의를 펼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실재의 질서]를 소개하면 좋을 듯 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1년 4월부터 1942년 말까지 다섯 번의 강연을 하고 그 강연 원고를 단행본 정도의 분량으로 남겼습니다. 그 단행본의 제목이 [실재의 질서 Ordnung der Wirklichkeit]입니다. 한국어판은 <현실의 질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1941년 4월 28일, 하이젠베르크는 부다페스트에서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의 색채론과 뉴턴의 색채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습니다. 11월 26일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통일성”이란 강연을 했는데, 그 기본 원고는 부다페스트 강연을 확장한 것입니다. 이 강연은 이듬해 8월에 라디오를 통해 “에너지 법칙 100년”이란 제목으로 또 변화를 거쳤습니다. 11월 27일에 취리히에서 한 강연 “자연과학의 세계상에 관하여”도 이 주제를 확장한 것입니다.
[실재의 질서]에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뉴턴의 저서 [색채론]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면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뉴턴은 프리즘으로 분리되는 무지개 색들을 주체와 무관하게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괴테는 색이란 주체와 대상이 만나 어우러지는 것이며 빛과 어둠의 상호작용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두 색채이론 중 어느 하나만 맞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바라보는 상보적인 두 접근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뉴턴의 색채론이 물리적 질서를 보여준다면 괴테의 색채론은 정신적인 질서를 보여줍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더 나아가 실재의 근본질서를 우연적 질서, 기계적 질서, 물리적 질서, 화학적 질서, 생체적 질서, 정신적 질서, 윤리적 질서, 종교적 질서, 천부적 질서(Zufällig, Mechanisch, Physisch, Chemisch, Organisch, Psychisch, Ethisch, Religiös, Genial Ordnung)로 나눕니다. 괴테를 따른 것입니다. 아홉 가지 질서가 있는 셈입니다.
우연은 아니겠지만, "보람의 가치론"에서도 일차 질서, 이차 질서에 이어 삼차 질서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 질서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와 연결된 것이라서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실재의 질서'와는 거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논의도 더 상세히 살펴보면 그 기본적인 관점이 상당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하이젠베르크의 기본 주장은 가령 물리적 질서와 생체적 질서와 정신적 질서를 뒤섞으면 안 되며, 각 단계에서 독자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을 정초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이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은 주목할만합니다. 흔히 말하는 환원주의적 접근에 정면으로 반대한 셈입니다. 윤리적 질서를 생체적 질서나 물리적 질서로부터 '도출'한다거나 그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저는 조지 무어의 논의에는 반대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전에 "사실과 가치의 얽힘"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힐러리 퍼트남과 사실/가치 이분법(Fact/Value dichotomy)의 붕괴를 다루고 있습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과학사학자 로레인 데스턴의 책 Against Nature (2019)이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뒷면에서는 책의 내용을 조금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의 또다른 질문은 진화심리학/사회생물학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논의와의 연관입니다. 도킨스가 대중화시킨 포괄적합성 이론 특히 해밀턴 공식과 프라이스 방정식 등으로 연결되는 진화생물학에서의 논의가 있습니다. 굳이 그쪽까지 연관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보람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이라는 개념 내지 용어는 조지 윌리엄스의 진화적 변화에 대한 유전자중심 관점(gene’s eye view)과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적합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을 설명하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가 도입한 것입니다. 흔히 “유기체는 유전자가 만들어낸 생존기계에 불과하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으로 연결되지만, 실상 유전자중심 관점과 포괄적합도 이론은 단지 동물행동에서 나타나는 이타성을 설명하기 위해 집단선택과 혈연선택을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해밀턴 공식 $C< B\cdot r$이 동물행동에서 보이는 이타성을 설명해 줍니다. 여기에서 C : 개체의 희생, B : 친족의 생존 및 번식 유익, r : 동일 유전자의 확률입니다. 만일 개체의 희생이 친족의 생존 및 번식 유익과 그 유전자의 확률을 곱한 값보다 작다면, 유전자 관점에서 볼 때 개체의 희생이 '보람 있는 희생'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유전자 관점은 자연선택의 핵심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개미나 일벌은 유전자를 남기지도 못하는데 왜 여왕개미나 여왕벌을 위해 헌신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최적자 생존과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협력의 진화를 설명해 줍니다.
윌리엄스와 해밀턴의 이론을 일반화하고 확장한 것이 프라이스 방정식입니다. $$\bar{w} \Delta \bar{z} = \mathrm{Cov}(z, w) + E(w \Delta z)$$ 또는 $$ \Delta \bar{z} = \frac{1}{\bar{w}}\mathrm{Cov}(z, w) + \frac{1}{\bar{w}} E(w \Delta z)$$
이 방정식에서 $w$는 자손의 수(흔히 적합도라 부릅니다)이고, $z$는 한 개체의 유전형질 값을 나타냅니다. $\Delta z$는 유전을 통해 자손에 전달될 때 변형된 유전형질을 나타냅니다. $\bar{z}$는 적합도의 평균을, $\Delta \bar{z}$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유전형질의 평균값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Delta \bar{z}$가 양수인가 아니면 음수인가에 따라 특정 유전형질의 비율이 증가하는가 아니면 감소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프라이스 방정식은 통계학에서 엄밀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정식입니다. 동물행동의 이타성을 이렇게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짧게 소개한 하이젠베르크의 [실재의 질서]와 연결시켜 말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요즘 꽤 자주 거론되는 진화심리학/사회생물학의 접근을 위험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화적/인문적인 주제를 진화생물학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매우 부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만한 책이 [센스 앤 넌센스]입니다.
[센스 앤 넌센스]는 생물학적 자연선택과 문화적 영향이라는 두 힘의 경중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의 요약입니다. 흔히 "자연 대 양육"(Nature versus Nurtur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유치한 버전으로 말하자면, 교육에서 혈통과 유전자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환경과 배려가 더 중요한가 하는 논쟁이기도 합니다.
여덟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관점과 접근을 병렬적으로 다룹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1) 사회생물학 논쟁입니다. 1970년대에 요즘 한국에서 '통섭'이란 이름과 함께 거론되곤 하는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이 벌이나 개미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행동을 다루는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을 집대성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문제는 그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벌이나 개미에 대한 관찰과 비슷한 이야기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인간 사회생물학'(human sociobiology)입니다. 그 뒤로 아주 심각한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뒤에 발전된 네 가지 대안적 접근이 (2) 인간행동생태학 (3) 진화심리학 (4) 문화진화론 (5)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입니다. 이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3) 진화심리학은 현대 인간의 심리를 비롯하여 경제학, 종교, 문화, 사회과학적 측면들을 진화 또는 자연선택에 의거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반면, (4) 문화진화론은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되는 문화 고유의 진화를 강조합니다. 그 두 대립되는 접근을 절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5)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입니다. (2) 인간행동생태학은 (1) 사회생물학이나 (3) 진화심리학과 대립되는 관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논쟁이 됩니다. 흔히 통섭, 통섭 하는데, 윌슨이 말하는 Consilience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유들의 결합과 융합과 화해라기보다는 생물학을 통해 기존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여러 주제들을 재구성하겠다는 일종의 지식 제국주의로 해석됩니다. (1) 사회생물학이나 (3) 진화심리학이 이런 입장이죠. (2) 인간행동생태학은 나름대로 동물들의 행동 연구까지 고려하지만 그래도 인간 사회의 고유한 특성과 현상들을 생물학이 다 설명할 수 있다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4) 문화진화론은 더더욱 별도의 메커니즘과 설명을 제시합니다. (2)와 (4)에서는 사회과학이 생물학에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아래의 표가 대략의 요약을 보여줍니다.
이 논쟁 또는 논의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를 가령 '보람의 가치론' 같은 문제에 적용한다면, 진화생물학과 얼마나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이 됩니다. 단순화시키면 보람의 가치를 진화상의 포괄적합도나 유전적 이익으로 설명하려는 노력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입니다.
저는 온생명론의 접근은 문화적/인문적인 주제를 설명하기에 알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넓게 보면 온생명론에 기반을 두어 여하간 문화적/인문적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구체적인 문제로 가면 원론적인 것 이상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보람의 가치에 대한 논의가 여러 수준에서 매우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는데, 왜 그러한 접근을 다시 되새기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보람의 문제는 여하간 문학과 역사와 철학에서 인문학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발표의 후반부에 나오는 '다원적 세계'가 바로 이 질문과 직접 이어집니다. 앎의 세계, 정신의 세계, 정치의 세계, 경제의 세계, 사회의 세계, 학문의 세계, 교육의 세계, 예술의 세계, 도덕의 세계, 놀이의 세계 등등 세상은 다채롭고 독자적인 세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다원적 세계의 관념은 위의 <그림 1>에 있는 도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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