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서평 감사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우선 두 가지만 명확하게 하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의 선입견은 무척 무서운 것이어서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도 그 사람이 그렇게 믿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곤 합니다.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주류적 해석에는 반대했고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고전적 세계관과는 다른,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서술은 슈뢰딩거에 대한 끈질긴 오해입니다.
인용하신 책 중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레더먼의 책은 과학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자신만의 주장과 추측을 여기저기 늘어놓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 책입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게다가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멋진 제목까지 달아서 써 놓은 책이다 보니 많이 읽혔고 그만큼 과학사적으로 옳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퍼뜨렸습니다. 과학사학자들의 기피대상 1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도 말년에 쓴 [부분과 전체]에서 슈뢰딩거에 대한 부정적인 장면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책처럼 저명한 과학자가 말년에 회고를 바탕으로 쓴 저서는 과학사 연구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하는 사료로 평가됩니다. 분명 나름대로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을 전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동시에 그 저자의 과감한 재단과 판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소위 기적의 해 이야기를 만들어낸 뉴턴의 말년 회고도 비슷하죠. 그래서 과학사 연구에서는 저명한 과학자가 쓴 회고록을 어떻게 다른 사료들과 비교하고 비판적으로 살피는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관문 중 하나입니다.
1920년대 중반에 슈뢰딩거가 해밀턴-야코비 이론을 원용하여 파동역학을 만들어 냈을 무렵에는 편미분방정식의 고유값 문제를 이용하여 에너지의 양자화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풀이는 연속함수이지만, 그 편미분방정식의 계수(고유값)는 정수 단위로 주어집니다.
구체적인 예로 "슈뢰딩거의 조화진동 문제 풀이"를 보면,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낸다는 말의 의미는 파동함수 $\psi (x, t)$를 구하는 것보다 그 방정식 안에 들어 있는 $E$라는 계수가 $E_n = \frac{2n+1}{2}h\nu_0$ ($n=0, 1, 2, \cdots$)으로 주어지는 것을 구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실제 양자역학의 응용에서 파동함수를 이용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파동함수는 연속함수로 주어지지만, 그 고유값은 띄엄띄엄 떨어진 이산적인 값으로 계산된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슈뢰딩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연속적인’ 파동함수가 입자의 ‘단절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라는 서술은 옳지 않습니다. 슈뢰딩거는 입자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물리량의 이산성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슈뢰딩거가 [과학과 인문주의: 오늘날의 물리학]에서 여러번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떨쳐버려야 할 사고 습관입니다. 우리는 연속적인 관측의 가능성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관측들은 별개의 분리된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관측들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연속적인 관측 가능성을 인정할 경우 모든 것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입자를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 순간적인 사건으로 간주하는 편이 낫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175-6쪽)
"슈뢰딩거는 『자연철학』에서 연속체의 개념적 난점을 부각시키면서 불연속적 원자론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지만, 정작 자신은 연속체로서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론을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입자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조건에 따라 경계가 흐려질 뿐 입자의 정체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고대의 원자론보다는 모호한 형식이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입자는 살아남았습니다. 굉장히 어정쩡한 형태로, 그리고 임시변통적인 형태로 원자론이 존속하고 있다고 슈뢰딩거는 여겼을 것입니다."라는 서술은 슈뢰딩거가 읽으면 무척 억울해할 겁니다. 이 문장은 대체로 다 틀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들은 어떠한 ‘동일성’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어떤 유형의 입자, 예를 들어 전자 하나를 관찰한다면 이것은 원칙적으로 하나의 ‘고립 사건’으로 간주되겠지요. 만약 여러분이 아주 짧은 시간 후에 처음 본 입자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비슷한 입자를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첫 번째 관찰과 두 번째 관찰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를 가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관찰한 첫 번째 입자와 두 번째 입자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참되고 모호함 없는 의미가 없습니다. 상황을 보면 두 입자가 동일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고 바람직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간단히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입자 사이에 분명한 경계도 명확한 구분도 없습니다. 중간 단계들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전환해갈 뿐입니다."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163-4쪽)
이 텍스트에서 슈뢰딩거는 분명하게 연속체 개념이 부적절하며, 입자라는 관념, 특히 입자의 연속적 궤적이라는 낡은 믿음을 버려야 함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슈뢰딩거가 '임시변통'이라 부른 것은 원자론이 아니라 연속함수를 다루는 자신의 파동역학입니다.
지난 목요일 녹색문명공부모임에서 소개한 미셸 비트볼(Michel Bitbol)의 논문을 참조할만합니다.
- Bitbol, M. (2007). Schrödinger Against Particles and Quantum Jumps. In: James Evans, Alan S. Thorndike eds. Quantum Mechanics at the Crossroads. Springer. https://doi.org/10.1007/978-3-540-32665-6_5
미셸 비트볼은 1996년에 나온
- Michel Bitbol (1996) Schrödinger’s Philosophy of Quantum Mechanics (https://doi.org/10.1007/978-94-009-1772-9)
에서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철학적 측면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상세하게 분석했습니다. 또 슈뢰딩거의 여러 논문과 저작을 사료로 정리해서 출판했습니다.
- Erwin Schrodinger, Michel Bitbol (1995) The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 Dublin Seminars and Other Unpublished Essays. (https://a.co/d/hmfUXJM)
비트볼의 책 [슈뢰딩거의 양자역학 철학]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장은 보른-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슈뢰딩거의 주장과 생각을 오해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입자 개념, 파동 개념, 인과성 개념 등을 놓고 전개된 논쟁의 상당 부분이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2장에서는 1920년대부터 등장한 슈뢰딩거의 양자역학 해석인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슈뢰딩거의 주장이 더 세련되어 갔음을 보여줍니다. 4장의 제목이 "새 존재론을 향하여"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의 부제가 바로 "양자역학이 불러온 존재론적 혁명"임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양자역학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장의 '것'에 대한 분석과 6장에서 다루는 상보성, 일원론/이원론 등의 문제를 꼼꼼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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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에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 바로 "양자역학의 주류적 해석"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양자역학의 해석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의 온갖 어렵고 복잡한 노력의 의미가 크게 퇴색할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해석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주류 해석'이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 Olival Freire Jr. ed. (2022) The Oxford Handbook of the History of Quantum Interpretations. Oxford University Press. (https://a.co/d/hgpSnhT)
2022년에 나온 양자이론의 해석의 역사를 모아놓은 핸드북은 13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프랑크 랄로에가 쓴 첫 번째 글의 제목이 "Quantum Mechanics is Routinely Used in Laboratories with Great Success, but No Consensus on its Interpretation has Emerged"입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는 잘 작동하는 이론이지만, 이제까지 한번도 주류해석은 정립된 적이 없습니다.
흔히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실상은 1950년대 후반에 하이젠베르크가 처음 이야기를 꺼내고 핸슨, 포퍼, 파이어아벤트 같은 과학철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리되었음을 미국 노터데임 대학의 과학철학자 돈 하워드는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 Don Howard (2004) Who Invented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A Study in Mythology. Philosophy of Science, 71: 669–682.
게다가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견해를 추려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이런저런 신비주의를 갖다 붙인 것을 곧잘 코펜하겐 해석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개소리도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보어의 양자역학 해석과 소위 '코펜하겐 해석'이라 부르는 것은 상충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만들었다 할 수 있는 '코펜하겐 해석'도 실상 하이젠베르크의 생각이 계속 변해갔기 때문에 일관된 해석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961년에 세상을 떠난 슈뢰딩거가 1950년대 후반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논의되기 시작한 '양자역학의 주류적 해석'에 반대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연히 '주류적인' 것도 아니었구요.
두 번째 지적할 점은 슈뢰딩거가 쇼펜하우어를 통해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일원론을 신봉한 것은 사실이지만, 슈뢰딩거는 대부분의 경우에 우파니샤드의 구절을 가져온다거나 베단타 철학의 주요개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물리학과 관련된 저술에서는 설령 대중적인 성격의 글에서도 이와 연결되는 것을 신중하게 경계합니다. 단지 생명이나 의식의 문제를 다룰 때에만 자신의 언어로 소화된 방식으로 인도 철학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슈뢰딩거나 고대 인도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후대의 슈뢰딩거 연구자들의 담론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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