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작성자
박 용국
작성일
2024-11-15 10:34
조회
152
먼저 좋은 책을 번역하고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슈뢰딩거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있었습니다. ‘슈뢰딩거는 왜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동의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을까?’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양자역학과 불교/베단타 사상과의 연결성에 주목하는 논의들 역시 (그 논의들이 설득력이 있든 없든)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슈뢰딩거는 힌두교의 베단타 사상에 심취했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슈뢰딩거는, 베단타적 세계관을 지지했으면서도 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는 반대했을까요?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이하 『자연철학』)를 읽으면서 이와 같은 의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슈뢰딩거와 관련된 다른 저작들도 같이 읽어보면서 이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단타에서는 전체로서의 ‘하나’를 이야기하며, 이와 분리된 ‘개체’라는 관념을 환(幻)으로 간주합니다. 슈뢰딩거는, 물리적 세계는 연속적인 ‘파동’으로 표상되며, 개체적이고 단절적 성격을 가진 ‘입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슈뢰딩거는 입자를 파동의 특수한 한 형태로 간주하였습니다. 분리된 개체성(입자)은 겉모습일 뿐이며, 세계는 단절이 불가능한 연속체라는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1926년 입자를 파동으로서 기술하는 방정식을 발표합니다. 슈뢰딩거는 이 방정식이, 모든 불연속성(단절성)을 없애버리고 세계를 연속체로서 기술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슈뢰딩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파동함수는 단절적인 입자의 상태를 확률적으로 기술하며, 관측에 의해 연속적인 파동함수는 불연속적인 입자의 특정한 값으로 붕괴(collapse)된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주요한 해석들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단절성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았습니다. 슈뢰딩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연속적인’ 파동함수가 입자의 ‘단절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파동함수는 다른 의미로 붕괴(collapse)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고전적 세계관과는 다른,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양자역학에서 돌아선 그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중력장(일반상대성 이론의 장 방정식)과 전자기장(맥스웰의 방정식)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통합시키려는 고전적 통일장 이론에 매달렸습니다. 슈뢰딩거는 불연속적이고 확률론적인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기초과학의 위기로 간주했습니다. 『자연철학』에서 슈뢰딩거는 이 위기 해결의 단서를 찾기 위해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둘째 주장, 즉 기초과학이 현재 당면한 위기라는 문제를 꺼내봅시다. 우리 대부분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상적으로 완성된 과학이 있고, 그런 일들을 원리적으로는 (이상적으로 완성된) 물리학으로 완전히 접근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사건들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금세기 초 몇 년 동안 최초의 충격 -양자이론과 상대성 이론- 이 과학의 근본을 흔들기 시작한 것은 물리학으로부터 비롯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는 17세기에 주로 갈릴레오와 하위헌스, 뉴턴이 놓았던 기초 위에 쌓아 올린 것을 전복시켰습니다. 기초 자체가 흔들렸습니다... 양자이론은 원자론을 거의 무한히 확장했지만, 동시에 더 심각한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근대 기초과학의 현재 위기는 가장 이른 시기의 지층으로 내려가 기초과학의 토대를 고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 사상으로 돌아가 끈기 있게 탐구하도록 독려합니다.” <『자연철학』, 34-38P>
슈뢰딩거의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베단타 철학에 기초해 있었고, 양자역학에 기반한 ‘과학적 세계관’과는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고 슈뢰딩거는 보았습니다.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과의 불화는 비단 슈뢰딩거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과거 서양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적 세계관이 과학의 발전과 함께 서로 반목, 대립하기 시작하고, 이 둘 사이에 커다란 벽이 놓이기 시작했다고 슈뢰딩거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은 모두 동일한 대상, 즉 인간과 세계에 관한 것이며, 결국 두 세계관은 통합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멸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쪽에는 과학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형이상학자들이 있습니다. 양측 모두 공식적인 직분을 가진 학식 있는 사람들로, 자신들이 지키려 애쓰는 관점이 결국 동일한 대상(인간과 세계)에 관련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넓게 벌어진 의견 차이를 해소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이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적어도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목도하는 상대적인 휴전은 두 가지 세계관, 즉 엄밀한 과학적 세계관과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거의 멸시나 다름없는 무시를 결의함으로써 달성되었습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저술에서, 설사 대중적인 것이라 해도 주제가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벗어나는 것은 주제넘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류가 서로 다른 구부러진 두 길을 어렵사리 돌아 같은 목표를 향해 분투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눈가리개를 하고 벽으로 분리된 채 모든 힘을 합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우리의 탐구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약화된 인식을 얻으려는 노력조차 별로 하지 않습니다.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고, 어떻게 해도 슬픈 광경이 될 것입니다. 우리 수중에 보유한 생각하는 힘을 편견 없이 모두 다 모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분명히 축소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질의 포괄적인 과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종교적 혹은 철학적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본성적 열망을 완벽히 만족시키는 경우는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훈련되고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 철학적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한 -덜 발달된 혹은 퇴화된- 관점을 소유하는, 기괴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여기에는 벽이 있습니다. 이 벽은 ‘두 개의 길’, 즉 가슴의 길과 순수한 논리의 길을 분리합니다. 벽을 따라 돌아가보죠. 벽을 끌어내릴 수는 없을까, 벽은 항상 거기에 있었을까? 역사 뒤편의 언덕과 계곡 너머 구불구불한 길을 꼼꼼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너머의 공간에 놓인 멀고 먼 대지를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는 벽은 낮아져 사라지고, 길은 아직 갈라지지 않은 채 딱 하나만 있습니다. 우리 중 몇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 그 매혹적인 고대의 통일성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철학』, 29-32P>
결국 『자연철학』의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서 슈뢰딩거는, 두 가지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초과학의 위기를 해결하는 단초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결합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연철학』의 <과학과 인문주의>에서 슈뢰딩거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통해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과학의 진정한 과업이라고 선언합니다. 슈뢰딩거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 생명, 정신을 물리학부터 생물학을 거쳐 베단타 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통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베단타 철학에 기반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에서, 당시의 양자역학은 통합된 세계관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고 불협화음을 낸다고 슈뢰딩거는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생각에 자연과학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자연과학의 능력, 목적 그리고 가치는 인류의 여타 지식 분야의 능력, 목적, 가치와 동일합니다. 단 하나의 학문 분과만으로는 안 되고, 오로지 분과들 전체를 통합한 것만이 어떤 능력 혹은 가치를 가지며, 그것은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전에 적힌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혹은 이것을 간결하고 인상적인 플로티노스의 수사로 설명해봅시다. “그리고 우리,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자연철학』, 148P>
“내가 이 강연의 제목으로 표현했고 서두에서도 설명했듯이, 나는 과학을,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중대한 철학적 질문, 플로티노스의 경구 –우리는 누구인가?- 에 답하려는 우리 노력이 집대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것 이상입니다. 나는 이 질문이 과학의 여러 과업들 중 하나가 아니라, 과학의 진정한 과업, 즉 정말 중요한 유일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철학』, 203P>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철학』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슈뢰딩거의 대답을, 최소한 부분적이더라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슈뢰딩거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기초과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였는가?
2) 그리고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결합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제시하였는가?
3)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제시하였는가?
이에 대한 슈뢰딩거의 대답을 논의하기 전에, 슈뢰딩거가 사상적 기초로 삼았던 베단타의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슈뢰딩거의 모든 철학적 논의는 베단타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단타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요? 제가 이해하는 바, 베단타의 가르침이 향하는 곳은 이렇습니다.
저에게는 호주에 살고 있는 사촌형이 있습니다. 잠깐 한국에 들어온 사촌형과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사촌형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기억이 있습니다.
“형한테 행복이란 무엇이야?”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 때 집으로 가는 중에 근처에 있는 산에 들렀어. 마침 해가 지면서 멋진 노을이 보이더라고. 석양을 바라보며 풀숲에 앉아 있었는데, 이상한 행복감이 들었어. 아무 이유도 없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함이 일어나더라고.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지. 고요함 속에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아무런 이유 없는 감사. 삶 그 자체에,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감사함. 나한테는 이 때가 가장 행복했었던 순간이었어.”
이유 없는 깊은 감사. 깊은 충만감. 왠지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
눈 덮인 산. 아직은 좀 어두운 고요한 새벽. 설산 위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장엄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들.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은 눈길을 홀로 걸으면서, 마치 인간 문명이 시작되기 아득히 전인 태고의 공간, 태고의 소리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 태고의 것, 존재의 근원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뛰어가던 어떤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 창문 틈으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창문 앞에 멈춰 섭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창문 밖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비 맞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선율.
마지막 음을 짚은 후에도 남아있는 깊은 여운. 그 고요의 순간.
2021년 그래미상을 수상한 한국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말로 할 수 없는 숭고함과 우리를 이어주는 이름 없는 끈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이고, 그 죽음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는 존재다. 음악가로서 나는 내가 살아갈 모든 인생을 음악과 바꾸는 것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위대한 작품에 바친 내 삶을 통해 누군가는 세상 사물들이 가졌을 이전의 모습을, 그리고 거기에 담긴 영원성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보다 훨씬 위대하고 장엄한 그 무엇인가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말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노승림, 『나와 당신의 베토벤』, 오픈하우스, 2016, 167P>
리처드 용재 오닐이 언급한, “세상 사물들이 가졌을 이전의 모습, 그리고 거기에 담긴 영원성”. 현대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말입니다. 사물의 시원은 빅뱅인데, 음악에서 그것을 찾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계는 감각인상과 정신현상의 총체'라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나의 의식 위에 펼쳐진 감각/정신 현상들이라고 보면,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이전의 의식이, 이러한 인상들이 펼쳐지고 사라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의식이, 바로 사물의 시원이 됩니다. 그 곳이 모든 것의 근원이자 내 존재의 진정한 고향이 됩니다. 제가 이해하는 베단타의 가르침은 바로 이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성 니콜라우스 축일미사 중 신을 체험한 후 절필합니다. 이후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머무르는 그를 보며 한 동료는 신학대전을 마무리할 것을 권합니다. 그는 더 이상을 글을 쓸 수 없다고, 지금까지 자신이 썼던 글은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대답합니다. 결국 신학대전은 미완으로 남게 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베단타는 모든 언어가 사라지는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곳은 깊은 침묵입니다. 베단타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 어떤 새로운 거대 서사, 어떤 새로운 철학체계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이야기가 사라진 곳, 모든 희론(戱論)이 적멸한 곳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단타의 언어화된 가르침은, 그 지점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따라서 베단타 ‘철학’이란 말은 사실 적합한 표현이 아닙니다. 베단타에는 어떤 철학도 없으며, 철학 체계의 소멸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힌두교와 불교에는 여러 학파가 있지만, 이들은 모두 그 지점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게 되면, 철학 체계 자체만을 따지면서 자칫 사변적으로 흐르게 되고 진의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넘쳐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단타의 언어는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베단타에 의하면, 그 지점에서는 자신이 한 개체라는 개체성의 느낌이 소멸됩니다. 자신에 대한 자아상이 완전히 변하는 것입니다. 오직 신만을 생각하다가 신 안에서 자신이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그리하여 오직 신만이 남는 것으로 베단타에서는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일체가 하나로 자각되는 비이원적 의식만이 남는 것입니다. 물론, 그 위에서 세계의 다수성이 지각되지만, 마치 바다 위에 파도처럼 지각됩니다. 즉 파도의 다양한 모습들(다수성)이 나타나지만 모두 바다일 뿐이라는 일체감 위에 자각되는 것입니다. 비이원적 의식 안에서는 어떤 것들이 나타나도 별개의 것으로 자각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 즉 공 가운데 묘하게 다수성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전체와 분리된 개별적인 개체성에 대한 관념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슈뢰딩거는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무렵부터 베단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914년 빈 대학 물리학과 강사 시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슈뢰딩거는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복귀한 후, 쇼펜하우어의 저작들을 탐독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를 통해 베단타 철학을 접한 슈뢰딩거는 곧 베단타 철학에 심취하게 됩니다. 사망 2개월 전(1960년) 작성된 <삶의 스케치>에서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918년에 우리는 일종의 혁명을 겪었다. 황제 카를이 물러나고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삶은 제국 붕괴의 영향을 받았다. 나는 체르노비츠 대학 이론물리학 강사직을 수락했고, 그곳에서 모든 자유 시간을 바쳐 철학을 깊이 공부하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당시는 내가 쇼펜하우어를 발견하고, 그가 소개하는 『우파니샤드』의 통일 철학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 전대호 옮김, 궁리, 2017, 273P>
그의 철학적 에세이들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단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체험적 관심이라기보다는 주로 학문적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슈뢰딩거에게 베단타는 통합적인 거대한 철학 체계의 구축을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25년 가을, 슈뢰딩거는 <길을 찾아서>라는 철학 에세이를 작성하고 베단타 철학에 대해 논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달 후인 1926년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포함한 일련의 물리학 논문들을 발표합니다. 입자를 파동으로 기술하면서, 슈뢰딩거는 입자라는 개체성(개별성)을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파동들이 잘 포개지면서 한 지점에서 보강간섭이 극대화되고 나머지는 상쇄간섭으로 소멸되면 입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파동만이 존재하며, 입자는 파동들이 포개지면서 만들어지는 특수한 형태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전체와 분리된 개별적 개체성의 관념을 환(幻)으로 간주하는 베단타 철학과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슈뢰딩거가 보기에 전자는 정말로 음파나 물결파와 다를 바 없는 파동(물질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입자(예컨대 전자)는 잘 정의된 위치에 있다. 입자는 공간 전체에 퍼져 있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파동들을 포갠 결과는 공간상의 한 위치에만 확실하게 있고 나머지 모든 위치에는 사실상 없는 파동일 수 있다. 이처럼 교묘하게 포개진 파동들은 공간상에서 아주 잘 국소화된 어떤 것을 나타낼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입자라고 부르고 싶을 만하다... 슈뢰딩거는 자신이 원자에 대한 이해와 신생 양자이론을 건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양자이론은 고전물리학을 닮게 되었다. 입자는 없어지고 파동만 남았으며, 파동들이 포개지면 국소화된 입자처럼 보일 수 있었다.” <리언 M. 레더먼, 크리스토퍼 T. 힐, 『시인을 위한 양자물리학』, 승산, 2011, 84-188P>
슈뢰딩거는 이를 통해 양자역학에서 등장하는 불연속성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파동함수가 파동들의 집합을 나타내고, 그 파동들을 전부 합한 결과는 덩어리, 정확히 말해서 작은 공간 안에 국소화되어 특정 속도로 운동하는 전자라고 해 보자. 이 파동함수(파동들의 푸리에 합)가 장벽에 부딪히면,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통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수학은 명확하다. 원래 단일한 덩어리였던 파동함수가 두 덩어리로 나뉘어 한 덩어리는 장벽에서 반사되고 나머지 한 덩어리는 장벽을 통과한다. 그러나 전자는 두 부분으로 쪼개지지 않는다! 전자는 온전히 반사되거나 아니면 온전히 통과한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실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 전자 하나의 10퍼센트가 통과하고 90퍼센트가 반사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슈뢰딩거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물리학자 막스 보른은 1920년대에 볼프강 파울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괴팅겐 대학에서 연구했다. 그는 ‘물질파’가 입자의 모양을 흉내 낼 수 있다는 어설픈 생각은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에 대한 해석으로 부적합함을 깨달았다. 입자는 ‘디지털’이다. 즉, 온전한 입자가 탐지되든지, 아니면 입자가 전혀 탐지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반면에 파동은 윤곽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일부 물리학자들은 파동처럼 공간 속에 퍼져 있는 입자의 부분들을 측정하려는 어수룩한 생각을 품었지만, 그것은 실제와 동떨어진 생각이었다.” <리언 M. 레더먼, 크리스토퍼 T. 힐, 『시인을 위한 양자물리학』, 승산, 2011, 189-190P>
막스 보른은 파동함수를 특정 시점, 특정 지점에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을 나타낸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동함수는 관측에 의해 ‘갑자기’ 한 지점으로 붕괴되어 입자적 특성을 드러내며, 특정 지점의 파동함수값이 클수록 그 지점으로 붕괴될 확률은 큽니다. 결국 파동함수는 입자의 확률적 특성을 기술하며, 입자라는 불연속성은 그대로 잔존합니다. 이에 기반한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의 주요한 해석들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슈뢰딩거는 이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경우, 특정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에너지 준위로의 이동시 그 이동과정을 갑작스런 양자 도약이 아닌, 시공간상에서 ‘연속적으로’ 기술할 수 있기를 슈뢰딩거는 희망했습니다. 이동과정에 대한 기술은 배제된 채, 이동확률에 대한 기술만을 제공하며 실제적인 전자의 이동경로는 말할 수 없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주장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보어의 초청으로 코펜하겐을 방문한 슈뢰딩거와 보어의 대화는 『부분과 전체』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슈뢰딩거: 나는 그저 원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어요. 어떤 언어로 이야기하든, 상관없어요. 원자 안에 전자들이 있고 그것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듯이 입자들이라면, 그 입자들은 아무튼 움직이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 당장 이런 움직임을 정확히 묘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전자들이 정상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하지만 파동역학이나 양자역학의 정식화로는 이런 질문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도출할 수 없어요. 그러나 시각을 전환하기만 하면, 따라서 입자로서의 전자는 존재하지 않고, 전자파, 또는 물질파가 존재한다고 시각을 바꾸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보이게 돼요. 그러면 우리는 진동 주파수가 선명한 것을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빛의 복사 방출을 송신자의 안테나에서 라디오파를 보내는 것처럼 이해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그동안 해결할 수 없었던 모순들이 사라지는 거죠.
보어: 아니,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아요. 모순은 사라지지 않아요. 다만 다른 자리로 밀려날 뿐이죠. 당신은 가령 원자가 빛을 방출하는 것이나 더 일반적으로 원자와 그 주변의 복사장과의 상호 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리고 물질파는 있지만 양자 도약은 없다는 가정을 통해 어려움들이 제거될 거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원자와 복사장 사이의 열역학적 균형을 한번 생각해 봐요. 가령 아인슈타인이 플랑크의 복사법칙을 유도해 냈던 연구도 그렇고요. 이런 법칙의 유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원자의 에너지가 불연속적인 값을 가지며, 때때로 불연속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에요. 고유진동 주파수의 불연속적인 값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당신은 양자론의 토대 전체를 문제로 삼을 수는 없어요...
슈뢰딩거: 그런 망할 양자 도약에 머물러야 한다면, 지금껏 제가 양자론에 관여했던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에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유영미 역, 서커스, 2021, 145-147P>
결국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에서 손을 떼고, 고전적인 통일장 이론으로 관심의 방향을 틉니다. 중력장을 기술하는 일반상대성 이론의 장 방정식과 전자기장을 기술하는 맥스웰 방정식을 통합하는데 노력을 쏟았으나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질량을 가진 물체의 중력에 의한 이동은 휘어진 시공간에서의 이동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중력장은 곧 시공간의 곡률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마치 전하를 가진 물체 사이의 전자기력을 기술하는 쿨롱의 법칙이 맥스웰의 방정식으로 대체된 것과 비슷합니다. 고전적 통일장 이론을 추구했던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은 시공간의 곡률이 중력장 뿐만 아니라 전자기장 역시 기술할 수 있도록 개량하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방식으로 기술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시공간 자체의 구조에 대한 연구였고, 시공간 구조를 통해 중력장과 전자기장이 표현될 수 있기를 그들은 희망하였습니다. 시공간 내에서의 입자 자체에 대한 기술은 우선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슈뢰딩거는 젊은 시절 파동방정식을 만들어냈지만, 이후의 연구에서는 그것을 제쳐둔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입자를 장(파동)의 특수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우선은 시공간의 곡률로 중력장과 전자기장을 통합하고, 입자 역시 장의 특수한 형태로 통합하여 진정한 고전적 통일(unified) 이론을 꿈꾸었습니다. 이를 통해 개별적이고 단절적인 입자의 개념을 없애버리고 세계 전체를 연속체로서 기술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자연철학』에서 슈뢰딩거가 지적하듯, 세계가 단절적인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은 결코 당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세계는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교육받은 지금 세대들에게는 이러한 관념이 당연하게 다가오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관념이 굉장히 이상한 가정일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내가 만약 고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고 상상해봅시다.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은 매우 작은 기본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의 이합집산으로 삼라만상이 펼쳐진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아마 황당하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고 물으면서 말입니다. 왜 굳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알갱이들을 가정하고 이들이 이합집산한다고 상상해야 하는지 되물을 것입니다.
원자에 대한 실험적 증거가 나오기 이전의 시대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계는 단절적인(불연속적인) 알갱이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흐르는 물을 보면서, 그것이 단위 알갱이들의 집합적 흐름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연속적인 무엇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에 열을 가해 수증기로 변한다고 해도, 기체들 역시 연속적인 것으로 충분히 간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체의 개념은 큰 난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국 ‘무한’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실수 0과 2 사이에는 무한한 수의 실수가 존재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길이가 2인 선분에는 무한한 수의 점이 존재합니다. ‘루트2’의 경우 1.4142135623...의 무한소수인데, 이는 한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합니다. 0과 2 사이의 선분에서 ‘루트2’의 길이에 해당하는 지점을 지정해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루트2’는 무한소수이기에, ‘이것인가 하면 그 뒤에 또 숫자가 나오는’ 상황이 ‘무한히’ 계속됩니다. 여기에 점을 찍어야 하나 하면 그 뒤에 또 다른 지점을 지정하는 숫자가 나오는 상황이 무한히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루트2’를 가리키는 지점이 존재하고, ‘루트2’는 ‘유한한’ 그리고 ‘특정한’ 길이를 가집니다. 무한과 유한이 겹쳐지는 역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한소수가 유한한 특정 길이를 갖는다는 생각을 (슈뢰딩거의 표현대로) 꿀꺽 삼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꿀꺽 삼키는 대신, 이러한 연속체의 개념적 난점에 대한 탈출구로 불연속적인 원자론을 주장했다고 슈뢰딩거는 말합니다. 원자 혹은 양자는 연속체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오래된 주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속체 개념에 너무 익숙합니다. 혹은 우리 자신이 연속체라고 믿습니다. 최근의 현대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개념이 우리의 정신에 엄청난 어려움을 부과한다는 사실에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개념을 만나 어려움에 부딪혔고 심각하게 흔들렸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우리는, (소수점 아래 수가) 무한으로 달려가는 소수를 생각해볼 수도 있고, 이런 수는 단순히 반복되는 숫자로 표시할 수 없을 때조차 그저 하나의 수를 나타낼 뿐이라는 생각을 그냥 꿀꺽 삼켜야 했습니다... 어쨌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꿀꺽 삼키고 나면, 0과 1 사이의 직선 위 어느 점이든 특정한 수를 지정하는 위치에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는 0과 1 사이만이 아니라 0과 무한대 사이도 가능하고, 영점을 표시한다면 마이너스 무한대와 플러스 무한대 사이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연속체를 소유하고 있고 제어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자연철학』, 91-93P>
“양자이론은 약 2400년 전인,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은 최초의 불연속성 -텅 빈 공간 안의 독립된 원자들- 을 발명했습니다. 기본 입자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원자에 대한 그들의 개념에서 유래했고, 개념적으로 그들의 원자 개념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연속성 개념은 아주 오래전에 탄생했습니다. 어떻게 그 개념이 생겨났을까요? 나는 불연속성 개념이 정확히 연속체의 복잡성에서 기원했음을, 말하자면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명백히 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연속체의 특성에 도사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원자론자들이 취한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물질이 고립된 ‘점들’, 더 정확히 말해서 작은 입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박해지면 멀어지고 조밀해지면 더 가까워지지만, 그것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형태의 물리과학은 고대 과학의 직계후손으로 중단없이 이어졌으며, 처음부터 연속체 개념에 내재된 모호함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모호함은 최근까지, 오늘날보다 고대에 더 많이 느꼈을 연속체 개념의 위태로운 측면입니다. 우리는 연속체에 속수무책입니다. 이는 현재 양자이론의 어려움들에 반영되어 있는데, 늦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이 무력함은 과학이 탄생할 때 대모로 서 있었습니다. 이 표현을 양해해주신다면, ‘잠자는 미녀’ 이야기에 나오는 13세기 마녀 같은 사악한 대모였습니다. 그의 사악한 주문은 원자론이 천재적으로 발명되면서 오랫동안 저지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원자론이 왜 그토록 성공적이고 지속적이고 반드시 필요했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자연철학』, 207-210P>
물론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에서 제시하는 원자에 대한 표상이 고대 그리스 철학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입자이지만 파동의 특성을 갖기에 입자의 개별성에 대한 관념이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에 비해 흐려지게 됩니다.
“양자이론은 이전에 입자의 명백하고 근본적인 성질로 여겨져서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던 성질, 즉 입자가 구별 가능한 개체라는 사실에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하나의 입자가 동일한 종류의 다른 입자들로 너무 붐비지 않는 영역에서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때만 해당 입자의 정체성이 (거의) 모호하지 않게 유지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계가 흐려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입자의 운동을 따라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파장이 짧고 세기가 약한 파동 형태로 상호작용할 경우에는 아주 잘 확인되는 입자의 형태를 띱니다... 얘기를 마무리 지으면, 어떤 종류이든 입자들은 파동의 특성을 나타내며, 느리게 움직일수록 그리고 더 밀집되어 있을수록 개별성을 잃고 파동의 성격이 더 뚜렷해집니다.” <『자연철학』, 35-36P>
“데모크리토스와 19세기 말까지 그의 길을 따랐던 모든 이들은, 개별 원자의 효과를 추적하지는 않았지만(그리고 그럴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겠지만), 여전히 원자가 개별자이고 식별 가능하며, 우리와 같은 환경 안에 있어 만질 수 있는 거친 대상과 같은 작은 물체라고 확신했습니다. 단일한 개별 원자와 입자를 추적하는 데 다양한 방식을 성공했던 몇 년 아니 수십 년 동안 그런 입자가 원칙적으로 영원히 ‘동일성’을 유지하는 개별적 실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는 사실이 정말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이제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들은 어떠한 ‘동일성’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어떤 유형의 입자, 예를 들어 전자 하나를 관찰한다면 이것은 원칙적으로 하나의 ‘고립 사건’으로 간주되겠지요. 만약 여러분이 아주 짧은 시간 후에 처음 본 입자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비슷한 입자를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첫 번째 관찰과 두 번째 관찰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를 가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관찰한 첫 번째 입자와 두 번째 입자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참되고 모호함 없는 의미가 없습니다. 상황을 보면 두 입자가 동일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고 바람직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간단히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입자 사이에 분명한 경계도 명확한 구분도 없습니다. 중간 단계들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전이해 갈 뿐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꼭 강조하고 싶고 믿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같음’, 즉 동일성 문제는 진정코 단언컨대 무의미합니다.” <『자연철학』, 163-164P>
슈뢰딩거는 『자연철학』에서 연속체의 개념적 난점을 부각시키면서 불연속적 원자론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지만, 정작 자신은 연속체로서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론을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입자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조건에 따라 경계가 흐려질 뿐 입자의 정체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고대의 원자론보다는 모호한 형식이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입자는 살아남았습니다. 굉장히 어정쩡한 형태로, 그리고 임시변통적인 형태로 원자론이 존속하고 있다고 슈뢰딩거는 여겼을 것입니다.
불연속적 원자론의 도입으로 연속체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불연속적 원자를 기술하는 배경이 되는 시공간 좌표계 자체는 여전히 연속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양자중력이론들(끈 이론, 루프 양자중력이론 등)에서는 시공간 좌표계 자체도 불연속적 속성을 갖는다고, 즉 양자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연속체로서의 세계를 꿈꿨던 슈뢰딩거로서는, 후세대에서는 시공간마저도 양자화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큰 실망을 하였을 것입니다.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는 연속체의 성격을 가집니다. 시공간 연속체 모든 지점에서의 값을 지정해 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측은 불연속적입니다. 이 둘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파동함수를 입자의 상태를 확률적으로 알려주는 확률함수로 간주하는 한, 불연속적인 관측 사이의 틈새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중슬릿을 통과한 전자가 스크린에 도달하여 입자의 흔적이 스크린에서 관측될 때, ‘이중슬릿을 거쳐 스크린에 도달하는 전자의 경로’라는 ‘관측 사이의 틈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는 특정 에너지 준위들에서만 불연속적으로 관측될 뿐, ‘한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에너지 준위로 이동하는 구체적 경로’라는 ‘관측 사이의 틈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슈뢰딩거의 바람대로 입자가 완전히 파동으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그리하여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기술이 가능하게 되지 않는 이상, 이를 통해 완전한 인과성이 복원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관측의 틈은 메꿔질 수 없습니다. 슈뢰딩거에 의하면 양자역학은 자신이 만든 방정식으로 이러한 관측의 틈을 임시변통으로 메꾸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이 제공하는 그림은 어찌되었든 관측가능한 정보(불연속적인 정보)를 모두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낙관적이지만, 관측 사이의 틈새에 관한 정보는 불완전하게 제공되기에(즉, 확정된 입자적 특성이 아닌 불확정한 발견확률로 제공되기에) 비관적입니다. 슈뢰딩거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의 양자역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우리는 연속적인 관측의 가능성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관측들은 별개의 분리된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관측들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틈이 있습니다... <『자연철학』, 175P>
파동역학의 이런 그림에는 틈이 전혀 없습니다. 인과관계에도 틈이 전혀 없습니다. 파동의 상은 완전한 결정론에 대한 고전적인 요구에 부합합니다. 사용된 수학적인 방법은 장방정식입니다. 곧잘 매우 일반화된 유형의 장방정식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관측 가능한 사실들이나 자연이 정말 어떤 모습인지 알려준다고 믿을 수 없는 그런 서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관측가능한 사실들은 파동 그림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모호한 것이 많이 남아 있고, 앞에서 말했듯이 몇몇 낙관적인 비관론자들 혹은 비관적인 낙관론자들은 이러한 모호함이 필수적이며 피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물질의 파동 이론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인상을 주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하는군요.” <『자연철학』, 191-192P>
슈뢰딩거는 끝까지 세계의 연속적 표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망하기 2년 전(1959년) 한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예외(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나 라우에 같은)를 제외하면 모든 물리학자들은 진짜 멍청이들이었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은 나 뿐이었다... 밤낮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딜레마는 파동-입자 딜레마이다. 최근에 나는 그 딜레마에 관해 많은 논문을 썼고 이젠 거의 지쳤다. 내 논문의 효과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친절하고 (정말 친절하다) 친근한 동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 능력을 백분 발휘하던 시절에 (1926년 내 나이 39세일 때) 수확한 나의 위대한 업적을 내가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젠 모든 것은 파동이다라고 주장하려 한다. 동료들은 말한다. 내가 노망 때문에 상보성이라는 위대한 발견을(닐스 보어의 발견)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평범하고 우수한 이론 물리학자들은 제정신인 사람이 코펜하겐의 성스러운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월터 무어, 『슈뢰딩거의 삶』, 전대호 옮김, 사이언스북스, 1997, 416P>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바탕으로, 글의 첫머리에서 제시했던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해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1) 슈뢰딩거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기초과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였는가?
2) 그리고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결합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제시하였는가?
3)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제시하였는가?
제 경우, 『자연철학』만을 읽어서는 위의 질문들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철학』은 그의 고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친 강연이라기 보다는, 현대의 과학이 놓인 위치와 철학적 상황을 그 뿌리가 되는 그리스 철학에 준거하여 ‘진단’하는데 초점을 둔 강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다른 저작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나름의 답을 해보겠습니다.
슈뢰딩거에 의하면 그리스 시대에는 형이상학적 논의와 과학적 논의가 서로 반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의 통합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자연에 대한 세계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주체(자기자신)를 배제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자연적 세계를 일종의 기계적인 시계장치로 간주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형성되었습니다. 슬픔에 젖어 흘린 눈물도 ‘뇌 신경세포의 전기적 발화에 의한 눈물샘의 물리적 반응’으로 환원됩니다. 정신(의식)은 물질로 구성된 세계상 안에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학적 세계상은 정신적 사유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과학적 세계상은 정신을 통해 구성된 것임에도, 정신은 그 세계상에서 쫓겨나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계는 물질 일원론(유물론)으로 기술됩니다. 정신에 의해 구성된 세계상 중 특정한 곳에(예를 들면 특정 몸들의 특정 뇌 부위에) 정신을 다시 집어넣으면 물질/정신 이원론이 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정신에 의해 구성된 세계상 안의 특정 위치들에서 정신이 만들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슈뢰딩거는 지적합니다. 정신이 세계상을 만들고 세계상 안에서 다시 정신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객체화’로 인한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분리에 대해, 슈뢰딩거는 정신 일원론을 주장합니다. 세계는 감각, 지각, 기억으로 구성되는 정신적 현상이며, 물질은 정신으로 통합됩니다. 각각의 정신들(주체들)은 자신만의 세계상을 구현하고, 이러한 세계상들은 겹쳐져 공통되는 부분이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공통된 세계상 때문에,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 그 자체(물질 그 자체)가 있고 각각의 주체는 그것을 인식한다는 소박한 실재론이 힘을 받지만, 슈뢰딩거는 이에 반대합니다. 각각의 정신은 일자(一者), 즉 ‘하나의 정신’의 표현들이기 때문에 공통성, 공동성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빛이 보석에 투영될 때 서로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비슷한 여러 이미지들이 만들어지듯이, 일자(一者)에 투영되어 만들어진 다수의 정신들은 공통의 부분 및 공동의 세계상을 갖습니다. 결국 다수의 정신은 하나의 정신의 겉모습들입니다. 슈뢰딩거에게 일자(一者)는 곧 신이고, 브라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성은 윤리학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는 이를 대체 윤리학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슈뢰딩거의 세계관 안에는 신과 윤리학이 들어서 있습니다.
정신 일원론을 주장한 슈뢰딩거 입장에서는, 정신이 구성한 물질적 세계상에서 정신이 배제되어버린 물질 일원론(유물론)이나, 배제된 정신을 정신이 구성한 세계상의 특정 위치에 다시 구겨넣은 역설이 내포된 물질/정신 이원론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자연에서 주체를 배제시킨 그리스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슈뢰딩거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뢰딩거가 물질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물질적 세계상을 형성하는 감각들은 정신적 현상이며, 정신은 곧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슈뢰딩거는, 다수의 정신, 즉 일자(一者)와 분리된 개체성들이 단지 겉모습들이듯이, 물질적 세계상에서의 분리된 개체성들, 즉 단절적 입자들 역시 연속적인 파동합들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즉, 불연속적인 입자는 겉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이 통합됩니다.
위의 2번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슈뢰딩거는 이와 같은 통합적 세계관을 제시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과학적 세계관(입자의 배제)은 미완으로 끝났고, 1960년에 발표된 철학 에세이 <무엇이 실재인가?>에서는 과학적 논의는 빠진 채 형이상학적 논의만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3번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우리는 일자(一者)의 한 표현들이며, 그곳으로부터 와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2번과 3번 질문에 대한 슈뢰딩거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과학적 세계상에서 주체를 배제하는 ‘자연의 객체화’에 대한 부분입니다.
“과학이 자연을 기술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함에 있어서 이 아주 어려운 문제를 단순화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는 거의 무심코, 구성되고 있는 그림에서 자기자신과 자신의 인격과 인식 주체를 무시하고 잘라냄으로써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문제를 단순화합니다. 거의 인지하지 못한 채로 생각하는 자는 뒤로 물러나 외부 관찰자 노릇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그러나 이로써 처음에 주체를 버린 것은 알지 못한 채, 그림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 자신과 자기 자신의 생각과 지각하는 마음을 그림에 다시 채워 넣으려고 애쓸 때마다 간극과 허점이 생기고, 모순과 이율배반으로 끌려갑니다...
과학적 세계상은 우리로 하여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일종의 기계적인 시계 장치로 상상하게 만들죠. 이런 장치는 과학이 아는 모든 것에 대해 마찬가지 방식으로 계속 가동될 것이며, 이 장치와 연결되는 의식, 의지, 노력, 고통과 기쁨과, 책임 따위는 없습니다. 실제로는 이런 것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외부 세계에 대한 상을 구성하려고 우리가 자신의 인격을 도려내고 제거하여 매우 단순화하는 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인격)은 사라져버렸고, 증발해버렸고, 불필요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과학적 세계관이 윤리적 가치도, 미학적 가치도, 우리 자신의 궁극적인 능력이나 목적도, 그리고 미안하지만 신도 포함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즉 세계상에서 인성을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자연철학』, 131-137P>
“새 장난감을 받은 아이의 눈에서 당신을 향해 분출되던 기쁨에 찬 시선을 상기하라. 그리고 사실은 그 눈에서 아무것도 방출되지 않았다는 이 물리학자의 말을 들으라. 사실상 객관적으로 확인된 눈의 유일한 기능은 끊임없이 빛의 양자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사실상! 사실상이라니? 그건 아주 이상한 사실이 아닌가! 그 사실에는 뭔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 전대호 옮김, 궁리, 2017, 202-203P>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정신 일원론을 주장합니다. 사망 1년 전인 1960년에 쓴 <무엇이 실재인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의 영역만 인정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사유하므로 존재한다) 그리고 두 영역이 상호작용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어떤 마술적이고 유령과 같은 것이 들러붙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실재를 영혼의 체험으로 환원하려는 소망은 우리가 실천적 삶에서는 그것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관념(즉, 바로 실재하는 외부 세계라는 관념)을 제멋대로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소망은 그보다 훨씬 심오한 이유 때문에 나온다. 외부 세계라는 관념 자체는 마음이 만든 것이고 조금도 의문시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첫번째로 그러한 관념 바깥에 혹은 그러한 관념과 나란히 어떤 대상이, 즉 그 관념이 지시하는 어떤 대상 그리고/또는 그 관념을 야기하는 어떤 대상 역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뿐이다. 내가 볼 때 이런 주장은 전혀 불필요한 이중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컴의 면도날 원칙에 어긋난다.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 김태희 옮김, 필로소픽, 103-104P>
나는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오로지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만 그러한 지식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아니, 감각적 지각들은 외부 세계를 구성하는 건축자재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도 참이다. 그렇게 생겨난 세계들은, 관점들의 다양함 등을 도외시한다면 상당 정도 서로 같으며,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계’라는 표현을 단수로 사용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감각의 세계는 엄밀하게 사적이며 다른 사람의 감각의 세계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각각의 세계들 간의] 이러한 일치는 이상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상한 점을 없애거나 덮기 위해서, 그러한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 실재하는 물체들의 세계가 저기 있어서 감관의 감각들을 야기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략 동일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한다. <109-110P>
요컨대 나는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동일한 주변 환경 안에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 실재하는 물질적 세계를 가정하는 일이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고 선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가정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래도 된다. 이런 가정은 다소 순진하고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되지만 그래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와 다른 입장들을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자기 가정에는 그런 ‘약점’이 없다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147P>
우리 생명체들은 모두 실은 유일한 존재의 측면들이나 양상들이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의견이다. 이 존재는 서양에서는 신이라고 부르고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보석의 비유를 자주 들었다. 수많은 각면을 지닌 보석이 하나의 대상을, 가령 태양을 비출 때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나타나지만 이 이미지들은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이것이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 신비적 형이상학임을 이미 고백했다. (대개 외부 세계라고 말하지만, 자기 신체 역시 속하는) 실재하는 대상세계라는 가정과 마찬가지로. <149P>
이런 사유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결점은 동일성 교설이 지니는 비견할 수 없이 한결 높은 윤리적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그리고 이 교설이 우리의 허망한 삶에 제공하는 저 깊은 종교적 위안과 비교해 볼 때, 사소한 결점에 불과하다...
나아가 또 인정할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 공동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건 간에, 이 공동성만으로도 일종의 윤리학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대체 윤리학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164-165P>”
그럼 1번 질문인, 현대 기초과학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그리스 철학이 주는 시사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 철학이 던지는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통합이라는 숙제, 그러나 이 과정에서의 주체의 배제에 의해 발생된 문제점에 대한 슈뢰딩거의 견해에 대해서는 위에서 다루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추가할 것은, 통합적 세계관의 구축과 관련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구성함에 있어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분과에만 매몰되는 현상에 대해서 슈뢰딩거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슈뢰딩거는 ‘물질’에서 ‘생명’이 구성되는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잘 알려진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물질/생명’과 ‘정신’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정신과 물질』이 나왔습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관념을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탐색해 들어가지만 이와 관련한 슈뢰딩거 본인의 구체적 견해에 대해서는 『자연철학』에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그의 믿음과 달리, 그리스에서 불연속적 원자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슈뢰딩거는 연속체라는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난점을 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속체로부터 성공적으로 완전히 탈출하지는 못하고, 현대의 양자역학으로 인해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어정쩡하게 겹쳐 있는 모호한 세계 표상에 이르게 되었다고 슈뢰딩거는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그리스의 과학적 세계상의 주요 특성으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하나는 자연이 드러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자연에서의 주체의 배제입니다. 슈뢰딩거에 의하면, 자연의 이해 가능성은 양자역학에 의해 위협받고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입장에서 ‘이해’란 ‘인과관계의 완전한 확립’이며 이는 연속적 기술이 가능할 때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이 지적했듯이, 사실 ‘인과관계’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그래서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여겨지는 선후관계’입니다. 과학적 세계상에서의 인과관계는 귀납적 개념이고, 특정한 계(system)와 관련되어 엄밀한 인과관계가 성립되려면 극소 시간 및 극소 거리의 선행조건이 주어졌을 때 직후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법칙이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기술은 확률적이고 불확정적입니다. 관측 사이의 틈새에 대한 완전한 기술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인과관계의 확립은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기술’이 가능할 때 성립할 수 있으며, 슈뢰딩거는 그리스 철학에서 가정했던 ‘자연의 이해 가능성’이 손상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비록 『자연철학』에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 철학의 반성적 고찰을 통해 슈뢰딩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인들을 본받아 통합적 세계상을 구축하되, 주체를 배제시키지 말아야 한다. 현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유물론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지만, 세계를 인격이 사라진 차가운 시계장치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또한 연속체는 다루기 쉽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불연속적 원자론을 떠올렸지만 연속성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물리적 세계에 대한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기술이 가능해야, 그리스인들이 가정했던 자연의 이해 가능성이 보존된다.”
슈뢰딩거의 시각에서 베단타 철학과 양자역학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연결성과 유사성에 대한 다른 논의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올렸던 <과학 그리고 종교>도 이에 관한 아주 작은 한 예에 해당할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슈뢰딩거는 베단타의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같은 위상에 놓고 조화시키려 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에 관련된 추가적인 논의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올리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단타를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종교관과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드문드문 그의 종교관에 대한 언급을 하였는데, 그 중 일부를 발췌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형태로 찾아보긴 어렵긴 해도 모든 형태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의 세 번째 단계가 있으니, 나는 이를 우주적 종교 감정이라고 지칭한다. 그런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 감정에 상응하는 의인법적 신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은 인간의 욕망과 목표의 덧없음을 느끼는 한편 장엄성과 놀라운 질서가 자연계와 사고의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낀다.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그에게 일종의 감옥 같은 인상을 주는 만큼 그는 우주를 하나의 의미 있는 완전체로 체험하고자 한다... 나는 그런 감정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을 일깨우고 또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술과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나는 우주적 종교 감정이 과학적 탐구의 가장 강렬하고도 고결한 동기라고 주장한다. 무한한 노력을 실현한 사람만이, 무엇보다도 이론과학 분야에 대한 개척적 연구에 헌신한 사람만이 당면한 현실적 삶과는 거리가 먼 이런 연구가 분출시킬 수 있는 감동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나의 세계관』, 홍수원·구자현 옮김, 중심, 2003, 53-55P>
“과학적 탐구심이 꽤 강한 인물 중에서 그 나름의 종교적 감정을 지니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감정은 순진한 사람의 신앙심과는 다른 것이다. 순진한 사람에게 신은 가호로 도움을 받고자 하고 그 징벌을 두려워하는 존재이자,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품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승화된 대상이며, 또 아무리 깊은 경외심에 젖어 있다 하더라도 말하자면 개인적인 관계에서 매달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보편적 인과관계란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에게 미래란 과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으로 비친다. 선악의 문제에서도 신성이란 있을 수 없다. 순진한 인간사일 뿐이다. 그의 종교적 감정은 자연 법칙의 조화에 대한 환상적 경탄의 형태를 띠는데, 이런 자연 법칙에서 드러나는 예지성이 너무나도 뛰어나 인간의 온갖 체계적 사고와 행위는 그와 비교할 때 정말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그가 이기적 욕구란 속박에서 계속 벗어날 수 있는 한 이런 감정이 그의 삶과 연구를 이끄는 지도 원리가 된다. 이는 분명 지난 모든 시대의 종교적 천재들을 사로잡았던 감정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같은 책, 56-57P>
“종교의 목표 중 하나가 자기 중심적 갈망과 욕구, 두려움의 속박으로부터 가능한 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면 과학적 추론은 또다른 측면에서 종교에 도움을 줄 수 있다...그러나 이 영역에서 성공적인 진전이라는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은 누구나 존재 속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합리성에 대한 깊은 경외감으로 감동을 받는다. 이런 인식을 통해 그는 개인적 소망과 욕구라는 속박으로부터 폭넓게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럼으로써 구체적으로 실존하지만 가장 심오한 형태는 인간이 접할 수 없는, 그런 이성의 장엄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가 나에겐 가장 고결한 의미의 종교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과학은 종교적 충동에서 의인화라는 불순물을 정화시켜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종교적으로 영화(靈化)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같은 책, 67P>
위의 발췌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인슈타인은 인격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신비감과 경외감이었으며, 이를 우주적 종교 감정(Cosmic religious feeling)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세계의 합리적 질서를 믿었고, 그 위대함에 경탄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경탄의 감정, 이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평생 과학에 헌신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종교적 감정은 과학의 탐구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흔히 발견됩니다. 평생을 예술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은, 예술에서 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경이감 때문일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도 『부분과 전체』에서 그의 종교관을 드러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 하였으며, 진정한 이해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단순한 예측 능력이 이해가 아니라는 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공중에서 날아가는 비행기를 관찰한다고 해봐. 우리는 일 초 뒤에 비행기가 어디에 있게 될지를 확실히 예측할 수 있어. 진행 방향으로 직선을 연장시키면 되니까. 비행기가 이미 커브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커브도 함께 계산하면 되지.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비행기의 궤도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 궤도를 이해한 건 아니야. 그 전에 조종사하고 이야기하고 조종사에게서 그가 의도하고 있는 비행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 궤도를 정말로 이해하게 되는 거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유영미 역, 서커스, 2021, 377-378P>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세계질서의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의식’(조종사)의 ‘의도’(비행계획)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게 되는 그러한 모습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계의 질서정연한 구조 뒤에서 자신의 ‘의도’로 세계를 만들어낸 ‘의식’을 보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까? 물론 그런 질문 또한 문제를 인간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라는 말도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같은 책, 389P>
물질과 생명, 인간, 정신, 사회현상 전반에 걸쳐 어떤 하나의 중심질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질서에서 벗어나면, 즉 중심 질서에 조화되지 않고 부분적 질서로서 떨어져 나오면 혼란이 야기되는, 일체를 관통하는 중심질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명칭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인간과 세계의 중심질서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야. 물론 알다시피 현실은 우리 의식 구조에 좌우돼. 객관화할 수 있는 부분은 현실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 하지만 주관적인 부분이 문제가 될 때에도 중심질서가 작용하기에, 이런 부분을 형상화하는 것을 우연이나 자의의 작용으로 볼 수는 없어. 물론 개인과 관련된 것이든, 민족과 관련된 것이든, 주관적인 영역에는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지. 악령이 지배하며, 행패를 일삼을 수도 있고, 좀 더 자연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심질서에서 떨어져 나온, 그래서 중심질서에 맞지 않는 부분질서가 작용할 수도 있어. 그러나 결국에는 언제나 중심질서가 관철돼. 고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라고 하는 것이 말이야. 우리는 종교의 언어로 이런 질서와 관계를 맺게 되지. 따라서 가치를 묻는다는 것은 분리된 부분질서들을 통해 생겨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중심질서의 뜻에 맞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요구라고 할 수 있어. ‘하나’의 활동은 우리가 질서정연한 것을 좋은 것으로, 혼란스러운 것을 나쁜 것으로 느낀다는 데서도 이미 드러나지. 원자폭탄이 떨어져 파괴된 도시는 정말로 끔찍해 보여. 그러나 황야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장면을 보면 우리는 기뻐하지. 자연과학에서 중심질서는 ‘자연이 이런 설계에 따라 만들어졌다’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는 데서 드러나. <같은 책, 391P>
인격적인 신을 믿느냐는 볼프강 파울리의 질문에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 질문을 약간 바꾸어도 돼? 그러면 이런 식으로 바꿀 수 있을 거야. 너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다가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사물이나 사건의 중심질서에 바로 다가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 라고 말이야. 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서 해석하기 어려운 ‘영혼’이라는 말을 썼어. 자네의 물음이 이런 뜻이라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 여기서 내 개인적인 체험을 언급하는 건 좀 그러니까, 파스칼이 늘 지니고 다녔다는, ‘불’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텍스트를 떠올려 보는 것이 좋을 거야. 파스칼의 경험이 나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책, 393P>
아인슈타인이 말한 ‘놀라운 질서’, 그리고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중심질서’는 모두, 세계를 관통하는 보편적 질서를 의미할 것입니다. 자연세계의 질서를 추구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그들에게는 곧 종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궁극적인 일자, 궁극적인 질서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으로 그들은 평생 과학의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절대’에의 열망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겉모습에서 그 기저에 있는 것으로, 피상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나아가려는 욕구는 ‘근원적인 절대’에의 끌림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심할 수 없는 그 무엇, 즉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철학적 탐구이든, ‘존재의 공허를 근본적으로 채워줄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영적 탐구이든, 이들은 동일한 근원에의 끌림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끌림에 의해, 각자마다 근원적인 질문을 품고 ‘본질적인 것’을 찾아나서는 철학적, 영적 여행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그 여행의 길은 다를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위대학 과학자들은 자연세계의 ‘궁극적 질서’의 인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경이를 느끼고 우주적 종교 감정을 느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베단타와 불교는 이와는 다릅니다. 종교 감정은 외부 질서의 인식에 의존하지 않으며, 종교 감정은 그 자체로 본래적인 의식상태이고 존재상태라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두 번째도 없는 비이원적 의식이며 그것이 곧 일자(一者)라고 말합니다. 다만, 자신을 한 개체로 여기는 관념이 그 자각을 가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식의 최초의 출발점인 ‘나’로부터 내적으로 탐구해 들어가는 지혜의 길이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엎드리는 헌신의 길이든, 사심없는 봉사에 전념하는 행위의 길이든, 이러한 길들은 바로 그 지점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가 이해하는 불교와 힌두교에 의하면, 이 질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나는 온 적도 없고 가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불교와 힌두교에 의하면, 근원적 질문을 품고 길을 걸으면 그 질문 자체가 근원 속에서 사라집니다. ‘나’는 근원 안에서 해소되어 버리고, 그렇게 여행자가 사라지면서 여행은 끝이 납니다. 여행은 여행자가 특정한 목적지에 도착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가 사라지면서 끝이 납니다. 근원적 질문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됩니다. 나의 자유의지라는 관념은 환(幻)이며, 나의 의지는 사라지고 신의 의지만 남습니다. 그것이 곧 절대적인 중심질서입니다. 어떠한 물리법칙이 중심질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불교와 힌두교입니다.
모든 추구가 사라지는 곳. 어떤 타자성(otherness)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의 다수성은 지극히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곳. 내가 한 개체라는 느낌이 아득히 사라지는 곳. 이에 의하면, 지금 글 쓰는 자도, 글 읽는 자도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각자 성향과 신념에 따라 학문, 예술, 종교 등등 자신의 길을 걷고 있고 또 걸을 것입니다. 제게 끌리는 것은 불교와 힌두교이며 제가 이해하는 바의 불교와 힌두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불교와 힌두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 신비주의에서도 이러한 곳을 가리켰습니다. 13세기 독일의 사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놀라움에 귀 기울여라! 바깥에 있는 것이 안에 있는 것이며, 파악하는 것이 파악되는 것이며, 바라보는 것이 바라보이는 것이며, 잡는 것이 잡히는 것이라는 것은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이 목적이다. 즐거운 영원과 하나 된 정신이 휴식에 머무는 곳이다. <요셉 퀸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1』, 이부현 옮김, 누멘, 2010, 235P>”
사실 이러한 종교적 이야기는, 때로는 너무도 쉽게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이야기로 치부되곤 합니다. 특히 수많은 위대한 지성들이 쌓아올린, 고도로 정교하고 합리적인 현대과학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슈뢰딩거의 바람대로, 종교와 과학 사이의 벽이 낮아져서 종교와 과학간의 대화들이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종교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출간이 더 반갑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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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자연철학이야기 대담 녹취록, 세미나 녹취록, 카툰 등 링크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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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6장. 기학의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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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5장. 표현주의의 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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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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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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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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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4장.환원에서 표현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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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모음] 책새벽-월-시즌5 :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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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3장.과학혁명의 전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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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피엔스』 비평글 모음 / 순서가 바뀐 그림('우리 사촌들의 얼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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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자료] 『사피엔스』 비평글 모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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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2장.근대적 합리성의 탄생 (p.75-11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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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1장 - 2절. ‘외물’에의 지향 (p.4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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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저작 읽기 - 소감과 앞으로 공부 계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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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10.13 | 0 | 149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슈뢰딩거의 다른 저작들과도 연결지어서 의미를 살펴주셔서, 앞으로도 계속 참고해야할 것 같습니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꼼꼼하게 서평을 써주시다니, 항상 놀라움을 느낍니다. 소중한 글을 공유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서평 감사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우선 두 가지만 명확하게 하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의 선입견을 무척 무서운 것이어서 어느 순간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도 그 사람이 그렇게 믿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곤 합니다.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주류적 해석에는 반대했"고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고전적 세계관과는 다른,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서술은 슈뢰딩거에 대한 오랜 오해입니다.
인용하신 책 중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레더먼의 책은 과학사적으로 거의 고증되지 않은 자신만의 상상에 가까운 주장을 여기저기 늘어놓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 책입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게다가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멋진 제목까지 달아서 써 놓은 책이다 보니 많이 읽혔고 그만큼 과학사적으로 옳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퍼뜨렸습니다. 과학사학자들의 기피대상 1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도 말년에 쓴 [부분과 전체]에서 슈뢰딩거에 대한 부정적인 장면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책처럼 저명한 과학자가 말면에 회고를 바탕으로 쓴 저서는 과학사 연구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하는 사료로 평가됩니다. 분명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을 전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동시에 그 저자의 과감하고 재단과 판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소위 기적의 해 이야기를 만들어낸 뉴턴의 말년의 회고도 비슷하죠. 그래서 과학사 연구에서는 저명한 과학자가 쓴 회고록을 어떻게 다른 사료들과 비교하고 비판적으로 살피는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관문 중 하나입니다.
1920년대 중반에 슈뢰딩거가 해밀턴-야코비 이론을 원용하여 파동역학을 만들어 냈을 무렵에는 편미분방정식의 고유값 문제를 이용하여 에너지의 양자화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풀이는 연속함수이지만, 그 편미분방정식의 계수(고유값)는 정수 단위로 주어집니다. 무엇보다 슈뢰딩거가 [과학과 인문주의: 오늘날의 물리학]에서 여러번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슈뢰딩거는 『자연철학』에서 연속체의 개념적 난점을 부각시키면서 불연속적 원자론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지만, 정작 자신은 연속체로서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론을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입자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조건에 따라 경계가 흐려질 뿐 입자의 정체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고대의 원자론보다는 모호한 형식이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입자는 살아남았습니다. 굉장히 어정쩡한 형태로, 그리고 임시변통적인 형태로 원자론이 존속하고 있다고 슈뢰딩거는 여겼을 것입니다."라는 서술은 슈뢰딩거가 읽으면 무척 억울해할 겁니다. 이 문장은 모두 틀렸습니다.
이 텍스트에서 슈뢰딩거는 분명하게 연속체 개념이 부적절하며, 입자라는 관념, 특히 입자의 연속적 궤적이라는 낡은 믿음을 버려야 함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슈뢰딩거가 '임시변통'이라 부른 것은 원자론이 아니라 연속함수를 다루는 자신의 파동역학입니다.
지난 목요일 녹색문명공부모임에서 소개한 미셸 비트볼(Michel Bitbol)의 논문을 참조할만합니다.
Bitbol, M. (2007). Schrödinger Against Particles and Quantum Jumps. In: James Evans, Alan S. Thorndike eds. Quantum Mechanics at the Crossroads. Springer. https://doi.org/10.1007/978-3-540-32665-6_5
미셸 비트볼은 1996년에 나온 Schrödinger’s Philosophy of Quantum Mechanics (https://doi.org/10.1007/978-94-009-1772-9)에서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철학적 측면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상세하게 분석했습니다. 또 The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 Dublin Seminars and Other Unpublished Essays. Erwin Schrodinger, Michel Bitbol. (https://a.co/d/hmfUXJM)에서 슈뢰딩거의 여러 논문과 저작을 사료로 정리해서 출판했습니다.
이 서평에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 바로 "양자역학의 주류적 해석"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양자역학의 해석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의 온갖 어렵고 복잡한 노력의 의미가 크게 퇴색할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해석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주류 해석'이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Olival Freire Jr. ed. (2022) The Oxford Handbook of the History of Quantum Interpretations. Oxford University Press.(https://a.co/d/hgpSnhT)
2022년에 나온 양자이론의 해석의 역사를 모아놓은 핸드북은 13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프랑크 랄로에가 쓴 첫 번째 글의 제목이 "Quantum Mechanics is Routinely Used in Laboratories with Great
Success, but No Consensus on its Interpretation has Emerged"입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는 잘 작동하는 이론이지만, 이제까지 한번도 주류해석은 정립된 적이 없습니다. 흔히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실상은 1950년대 후반에 하이젠베르크가 처음 이야기를 꺼내고 핸슨, 포퍼, 파이어아벤트 같은 과학철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리되었음을 미국 노터데임 대학의 과학철학자 돈 하워드는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Don Howard (2004) Who Invented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A Study in Mythology. Philosophy of Science, 71: 669–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