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낱생명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의견
'낱생명'이라는 용어는 제가 판단하기에는 그리 좋은 용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낱생명'이라는 게 따로 잘 정의된 용어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온생명론에서 '온생명'이란 개념을 새롭게 가지고 나온 것은 기존에 다양하게 모색된 생명의 개념과 정의가 모두 부적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에너지의 원천인 태양을 포함하는 전체 계, 특히 태양과 지구 생명권의 모음을 하나의 자족적 단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온생명론의 기본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낱생명'이라는 것이 여하간에 불완전하게라도 정의될 수 있고 의미를 갖는다면, 온생명론의 접근이 갖는 의미는 크게 퇴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낱생명이 무엇인지 대략이라도 말해 주어야 그것을 연구하는 과학, 즉 생물학의 범위가 정해질 것입니다. 많은 대학에서 초급생물학 교과서로 사용하는 Campbell Biology의 페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즘 사용되는 책은 2021년에 나온 12판입니다. 그 사이에 개정이 많이 되었는데, 생명의 정의를 다룬 생물학 교과서가 많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캠프벨 생물학을 떠올리게 됩니다.
[출처: L. A. Urry et al. (2021) Campbell Biology (12e). Pearson, p. 3]
위의 그림에는 생명의 속성 몇 가지가 보입니다. 질서, 진화적 적응, 조절, 에너지 과정, 상장과 발생, 환경에 대한 반응, 생식 등.
"생명의 연구는 통합적 주제들을 나타낸다"라는 제목 아래 그 뒤로 14쪽까지 생명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여러 지표와 특징과 요소를 개략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내세우는 생명의 통합적 주제는 다섯 가지입니다.
- 조직화
- 정보
- 에너지와 물질
- 상호작용
- 진화
조직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국소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조직화가 여러 층위(생명권, 생태계, 군집, 개체군, 개체(유기체), 세포기관, 조직, 세포, 세포내소기관, 분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유전정보입니다. 다른 종류의 국소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수만 년, 수백만 년을 지나도 원래의 것이 대략 유지되는 유전정보일 것입니다. 소설 <쥐라기 공원>에서 백악기 호박에 갇힌 모기의 위에 있는 공룡의 피에 담긴 DNA로 공룡을 복제해 낸다는 아이디어가 가능할 정도이죠. 대략 이 두 가지가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의 핵심으로 말한 '음의 엔트로피'와 '부호기록'에 해당할 것입니다. 나머지 세 가지 통합적 주제가 무엇인지는 대략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있는 생명의 정의를 다시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올해 초에 이와 관련된 글을 "브리태니커 생명(https://bit.ly/4gm0rQI)"이라는 제목으로 간단하게 올린 적이 있습니다.
https://www.britannica.com/science/life/Genetic
여기에서 생명의 정의는 (1) 물질대사에 따른 정의, (2) 생리학적 정의, (3) 생화학적 정의, (4) 유전학적 정의, (5) 열역학적 정의, (6) 자체생성적 정의로 구별되어 다루어집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씨앗과 영구동토층의 세균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특징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생명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직관적으로 '낱생명'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장 더 들어가 보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작년 12월쯤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에 "생명을 정의하기 - 자율성 vs. 진화"(https://bit.ly/3z8SOMJ)이라는 글에서 2008년에 프랑스에서 열린 학술회의와 그 발표논문 모음을 소개했습니다.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를 읽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2008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생명을 정의하기(Defining Life)"라는 제목의 학술회의는 장
가용, 크리스토프 말라테르, 미셸 모랑주, 플로랑스 롤렝-세르소, 스테파느 티라르 등이 학술회의 조직을 맡았고, 화학자, 생화학자, 생물학자, 외계생물학자, 우주생물학자, 컴퓨터과학자, 철학자, 과학사학자 등이 발표를 했습니다. 이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에 몇 가지를 덧붙여 2010년에 15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평생 이 문제를 씨름하며 연구에 매진해 온 각 분야의 전문학자들이 모였지만, 생명을 정의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문제임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핵산분자나 그보다 더 외포가 넓은 씨앗이나 영구동토층의 세균 같은 것을 낱생명으로 여기는 것은 낱생명의 여러 측면 중 정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나온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 김동광 (2023) 생명은 어떻게 정보가 되었는가: ‘정보로서의 생명’ 개념의 등장과 생명의 분자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궁리. http://aladin.kr/p/rzLc5
이 책에서 과학기술학자 김동광은 1950년대 이후 생명을 정보라고 보는 관념이 등장하여 지난 70여년 동안 생명에 대한 탐구에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된 과정을 역사적/사회학적으로 상세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더 넓은 맥락에서 볼 때 생명을 정보와 동일시하지 않는 패러다임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낱생명 개념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는 반면, 온생명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저는 공간에 대한 실체론-관계론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간 속에 물체가 있는 것인지(실체론), 아니면 공간이란 다름 아니라 물체들 사이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를 놓고 아이작 뉴턴과 빌헬름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논쟁을 벌였습니다. 단지 17세기 말의 상아탑 속 논쟁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론 논쟁입니다.
주류의 철학적 사유에서는 언제나 실체, 물자체, 실재, 궁극의 존재 등을 상정한 뒤 이것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러나 멀리는 헤라클레이토스나 노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가까이는 스피노자나 베르그손이나 화이트헤드에 이어지는 관계적 존재론에서는 이렇게 원래 있던 것이 있다고 하고 그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합니다.
종종 상징적으로 "relation withouth relata"(관계항 없는 관계)라는 말을 씁니다. 우선 관계들을 맺는 기본적 존재가 있고 난 뒤 나중에 그 기본적 존재들 사이에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먼저이고 그 관계들의 끝자락에서 나중에 기본적 존재를 말할 수 있다는 관념입니다.
작용체과 보작용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관계적 존재론을 위한 가장 중심적인 개념입니다. 이 용어와 개념이 상대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용체라 통칭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는 이러저러한 작용을 하는 단위라는 잠정적 의미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작용체인지, 어디부터 보작용자인지 따지고 들면 이야기는 매우 복잡해집니다. 세포를 하나의 작용체라고 하면 그 세포에 영양을 공급하고 (실상은 세포내의 미토콘드리아의 작용으로 ATP 분자를 만들어 에너지를 만들지만) 그 기본 구조를 유지하게 하고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안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여러 요소들이 보작용자가 될 것입니다. DNA 분자를 하나의 작용체라 하면, 그 분자에 담긴 염기서열로부터 주요 유전'정보'를 '전사'하고 이를 다시 '번역'하여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필요한 다양한 외부요소들이 보작용자가 될 것입니다. 그 경계는 매우 유연하고 유동적입니다.
온생명론에서 생명의 개념을 '온생명'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곧 작용체와 보작용자의 연합체만이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라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또 생명의 개념을 시간적(역사적) 흐름에 따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연(요동)에 의해 준안정상태의 국소질서가 만들어지고 그 국소질서들 중에서 우연히(확률적으로) 자체촉매성을 지닌 것이 생겨난다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 전체의 연쇄가 안정되 규모로 생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낱생명은 곧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개념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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