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나온 양자역학 교과서와 입자-파동 이중성
21세기에 나온 주요 양자역학 교과서에는 입자-파동 이중성이라는 용어가 전혀 없거나 아주 짧게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 Weinberg, S. (2013). Lectures on Quantum Mechan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 Norsen, T. (2017).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 Springer.
- Ballentine, L. (2000). Quantum Mechanics: A Modern Development. World Scientific.
- Townsend, J.S. (2010). Quantum Physics: A Fundamental Approach to Modern Physics. University Science Books.
- Auletta, G., Fortunato, M., Parisi, G. (2009). Quantum Mechan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 Rae, A.I.M., Napoultano, J. (2016). Quantum Mechanics. 6th ed. CRC Press.
가령 Weinberg (2013), Norsen (2017), Ballentine (2000), Townsend (2010)에는 '입자-파동 이중성'이란 용어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Auletta et al. (2009)와 Rae & Napoultano (2016)에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들어 있긴 하지만 역사적인 서술을 할 때 두세 페이지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직 대학의 양자역학 강의에서도 입자-파동 이중성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고, 물리학자들의 일상 대화에서도 입자-파동 이중성 얘기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과서를 쓰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양자물리학에서 소위 '입자-파동 이중성'이란 개념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1920년대 중엽에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 20여년 동안 현대물리학은 아주 빠르게 새로운 현상들에 맞닥뜨렸습니다. 플랑크의 흑체복사이론, 아인슈타인의 빛양자 가설과 광전효과, 컴프턴의 전자산란실험, 보어의 원자모형, 프랑크-헤르츠의 실험, 데이비슨-거머-톰슨의 전자회절실험 등 온통 복잡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 무렵 이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자인가 파동인가 논쟁하다가 입자와 파동이 이중성(二重性 duality)을 지닌다는 식의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럽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다 지나가는 마당에 아직까지도 100년 전의 그 개념상의 혼란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입니다.
특히 양자역학 교과서가 아니라 양자역학을 다루는 대중과학서에는 정말 놀라울 만큼 천편일률적으로 입자-파동 이중성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양자역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둥, 물리학자도 잘 알지 못한다는 둥 신화화된 신비주의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반지성주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항상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대상의 존재가 여기에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확률적인 성향으로만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편안한 선택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파동이라는 특이한 현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대상의 존재를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심리적 부담이 더 적을 수도 있습니다.
입자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파동이라 부르는 물리적 대상은 같은 곳에 겹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곳에 어느 정도 더 많이 있거나 더 적게 있을 수도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파동도 양자역학적 상태와 달리 명확하게 특정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고 에너지도 갖고 있는 실체입니다.
결국 입자-파동 이중성과 같은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양자역학적 상태를 고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입자 아니면 파동으로 바꿔서 이해해 보려는 노력입니다. 기존의 익숙한 입자로 안 되면, 조금 덜 익숙하지만 그래도 잘 알고 있는 파동으로 시도해보는 것이죠. 이러한 노력의 의미를 굳이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과거의 낡은 존재론을 그렇게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포도주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새로운 가죽부대로서 새로운 존재론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도 가능합니다. 이것은 양자역학 이전에 익숙했던 입자 존재론이나 파동 존재론을 놓아주고 사건야기성향 또는 존재표출성향이라는 새로운 존재론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회익 선생님의 주장 또는 접근입니다.
결국 이야기는 $\Psi$함수라고도 불리는 양자역학적 상태의 실재성 문제로 이어집니다. 물리철학자 마우로 도라토는 2015년에 상태함수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분파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Dorato, M. Laws of nature and the reality of the wave function. Synthese 192, 3179–3201 (2015). https://doi.org/10.1007/s11229-015-0696-2
(1) 법칙적 실재론(nomic realism): 상태함수는 양자역학이라는 법칙이 그 실재성을 보장하는 어떤 것이다.
(2) 성향주의(dispositionalism): 상태함수는 온전히 세계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현행화할 수 있는 잠재성이다.
(3) 배위공간 실재론(configuration space realism): 상태함수는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파동이 아니라 함수로서 그 정의역에 해당하는 배위공간에 존재하는 파동이다.
더 상세한 내용은 나중에 더 소개하겠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이 제안하시는 '성향(propensity)'은 더 넓은 맥락에서 분석형이상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논쟁되어 온 성향(disposition)과는 거리가 있지만, 여하간 성향주의의 맥락에서 깊이 탐구해 볼 중요한 연구프로그램임에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상태함수 또는 양자역학적 상태가 단지 대상에 대한 정보와 관찰자의 지식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거나 여러 가지 형태의 도구주의적 접근과 달리 양자역학적 상태의 실재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양자역학과 그에 따른 존재론을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선택일 것입니다.
여하간 세미나에서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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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책+세미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 패자부활전 (8) 제4장-2 (pp.14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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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3.06.23 | 0 | 1422 |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 입자-파동 이중성이 틀렸단 말을 듣고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대중적인 과학교양서에서 하나 같이 그렇게 설명하니까요. 하지만 이제야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조금 알아 듣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