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적 앎과 우연의 여지
시인처럼님의 매우 흥미로운 <자연철학 강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의 끝자락에서 세 가지 문제거리 또는 질문을 시인처럼님이 던지셨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제 의견을 짧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이 이론은 존재 세계의 결정론적 구조를 강하게 함축하는데 상태 변화의 원리에 따라 나중 상태가 결정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선택이 가능하게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측을 한다는 것은 변화의 원리에 따라 ‘필연’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선택’을 하려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우연’의 여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 둘 모두가 어떻게 다 가능한지 ‘우연과 필연’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프랑스의 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s Monod 1910-1976)는 1970년에 <우연과 필연>이라는 유명한 책을 냈습니다.
Jacques Monod. (1970) Le hasard et la nécessité. Essai sur la philosophie naturelle de la biologie moderne. Éditions du Seuil.
영어로는 Chance and Necessity: Essay on the Natural Philosophy of Modern Biology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현대 생물학의 자연철학에 관한 에세이"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 동안 물리학자로 사시면서 물리학에 기반을 두고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계시는 장회익 선생님과 상보적인 면이 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노는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 무장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던, 살아 있는 지식인이면서도 생명과학의 깊은 곳을 이해하던 생물학자로서 자신의 지적 성취를 자연철학으로 발전시키려 애쓴 분이기도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cques_Monod
모노의 사유를 장회익 선생님의 사유와 비교하고 연결하는 작업이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라 믿습니다만, 우선 여기에서는 시인처럼님의 질문과 달리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에는 곳곳에 우연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는 의견을 적어보려 합니다.
무엇보다도 양자역학의 새로운 공리에서 [공리 4]가 바로 이 '우연'이라는 요소의 출발점입니다. 다르게 보면 이미 [공리 1]에서 대상의 상태가 상태함수라는 것으로 주어지며 위치가 그 상태함수를 이용하여 계산한 기대값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이미 '우연'의 요소가 본질적으로 들어옵니다. '기대값' 개념은 곧 확률 개념을 의미합니다. 확률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필연은 확률 1 즉 100퍼센트를 의미합니다. 뉴턴의 자연철학, 심학제2도에 표현된 세계관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상대성이론의 자연철학, 즉 심학제3도로 가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이와 달리 심학제4도에서는 핵심적으로 '우연'이 개입합니다. 양자역학의 [공리 4]는 대상과 변별체의 만남을 말합니다. 이 만남에서는 흔적을 남길 수도 있고 남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흔적을 '사건'이라 부릅니다. 대상의 상태는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성향이고, 변별체라는 것은 사건을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또 다른 대상입니다. 이 둘이 만날 때 흔적이 남는가 남지 않는가를 놓고 새로운 상태함수를 할당하자는 것이 [공리 4]입니다.
이는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필연에 따라 굴러가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강조한 것과 통합니다. 이것은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를 루크레티우스가 <사물본성론>에서 말한 클리나멘(엇나감, 빈위)과 깊이 연관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은 결코 필연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필연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래서 장회익 선생님의 다음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바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입니다. '자체촉매적'이란 표현은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국소질서'에 주목하는 게 좋겠습니다. 질서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질서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이지 않고 자연발생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어땠는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여하간 우연히 그런 "무질서 아님" 즉 "질서"가 만들어집니다. 심학제5도에서 열현상과 통계역학과 엔트로피를 말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무작위로' 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함입니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정연함 또는 질서는 생겼다가 다시 사라지고 다시 또 생기고 또 사라지는 확률적이고 통계적인 무작위의 일입니다. 그래서 이를 '국소'라 부릅니다. 영어로는 local이죠. 군데군데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다시 생기는 그런 질서입니다. 그것이 '국소 질서'입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국소 질서가 다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적극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런 뒤에 자기는 쏙 빠집니다. 그렇게 반응의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이 '촉매'입니다. 그런데 이 반응은 자기자신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에 "자체촉매적"입니다.
생영의 본질은 바로 이 "자체촉매적 국소실서"입니다. 이것이 1970년, 즉 지금으로 51년 전에 자크 모노가 말하던 생명체 안의 '우연'과 사실상 일맥상통합니다. 모노가 프랑스와 자콥 그리고 앙드레 르보프와 함께 196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을 때의 업적이 "효소와 바이러스 합성의 유전적 조절에 관한 발견"입니다. 여기에서 '효소'는 다름아니라 생명체 안의 '촉매'이죠.
여하간 이렇게 해서 심학제7도가 만들어집니다. 그 중간 단계에서는 바로 우주에서 그렇게 은하가 만들어지고 항성이 만들어지고 행성이 만들어지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우연한 발생과 생성과 유지가 있어야 합니다.그것이 심학제6도입니다.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메커니즘이 궁금하다는 질문이 종종 나옵니다. 여기에서 '메커니즘'이란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메커니즘'을 안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완전하게 다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또는 더 넓게 '국소 질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사실상 모두 확률의 문제이고 우연의 문제입니다. 메커니즘이란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온통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의 테두리와 범위가 있지만, 왜 하필 그 때 그 곳에서 이러저러한지 설명할 수 있는 재간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연'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체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인지하게 됩니다. 앎에 대해 알기 시작합니다. 심학제8도가 주체와 대상(객체)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자유의지'의 문제가 불거집니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곧 우연이 어떻게 개입하고 성장하고 주도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 의견을 요약하면, 시인처럼님의 질문과 달리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우연과 필연의 문제가 매우 폭넓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견은 어쩌면 장회익 선생님의 의견과 또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인처럼님의 질문이 혹여 심학제2도와 심학제3도에 국한된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의심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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