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메타과학]의 용어해설
이 내용은 <과학과 메타과학>의 개정판이 나올 무렵 제가 작성했던 용어해설입니다. 출판사에서 몇 가지 용어에 대해 해설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 때 편집자가 제시한 용어에 대해 나름 공을 많이 들여 설명을 달았는데, 결국 책에는 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몇몇 서술은 장회익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다르기도 하고 또 굳이 그런 용어해설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는지 회의적인 면도 있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저도 당시에 본문이 충분히 상세하기 때문에 굳이 용어해설을 달 필요가 없다고 편집자에게 의견을 냈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고 제 파일함 안에 묻혀 있는 것도 아깝고 해서 여기에 올려 봅니다.
과학학
넓은 의미의 과학학(science of science)은 과학 내부의 주제가 아니라 과학 자체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의 과학학(science studies)은 기존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HPS)을 비판하면서 과학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요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대개 과학뿐 아니라 기술까지 함께 다루기 때문에 과학기술학(science & technology studies, STS)으로 불린다.
메타과학
메타과학은 과학 자체에 대한 논의와 연구를 통칭한다. 영어로 metascience, 독일어로 Wissenschaftslehre에 대응할 수 있지만, metascience는 단순히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기술학, 과학정책학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 드물게 사용되며, Wissenschaftslehre가 과학에 대한 거시적 담론으로서의 ‘과학론’에 더 가깝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메타과학’은 외국어로 된 어떤 개념의 번역어가 아니라 고유한 한국어 용어이다. 그리스어에서 ‘메타’(μετα)는 전치사로서 소유격과 쓰일 때 “~중에서”, 여격과 쓰일 때 “~사이에서”, 대격과 쓰일 때 “~다음에”라는 의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자연론(Physis) 다음에 오는 논의를 Metaphysis로 지칭했는데, 이것이 한국어에서 ‘형이상학’으로 번역되었다. 1933년 폴란드의 논리학자 알프레드 타르스키는 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점 중 하나였던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형식언어의 진리개념”(Der Wahrheitsbegriff in den formalisierten Sprachen)이란 제목의 방대한 논문에서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별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가 형식화된 연역적 과학의 언어를 탐구할 때 그것에 관해 말하는 언어와 그것 안에서 말하는 언어를 항상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과학과 탐구가 그 안에서 수행되는 과학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의 언어의 표현들과 그 사이의 관계들은 후자의 언어에 속하며 메타언어라 부른다. 이러한 표현들의 서술, 복잡한 개념들의 정의, 특히 연역적 이론을 구성하는 것에 연관된 개념들의 정의, 이 개념들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 등은 우리가 메타이론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이론의 과제이다.” 메타언어는 대상언어로 이루어진 언명들을 서술하는 한 단계 위의 언어이다. 가령 ““눈은 하얗다.”는 프랑스어이다.”라는 말에서 “눈은 하얗다.”라는 말이 대상언어라면, 그러한 말이 프랑스어라는 한 단계 위의 말이 메타언어이다. 과학이론의 여러 담론들이 대상언어로 기술된다면, 메타과학은 그 과학 자체에 대한 메타언어로 기술된 담론이다.
사상(寫像)
사상은 일종의 함수로서, 두 집합 사이의 대응을 가리킨다. 지도를 만드는 것과 비교해 보면, 대상이 되는 지형이 있고 이를 종이 위에 옮기는 과정이 지형의 집합과 종이 위 도형의 집합 사이의 대응으로 주어지므로, 이를 매핑(mapping)이라고 한다. 4장 “과학이론의 구조”에서는 사상을 함수에 국한하지 않고 관계와 상수를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의미기반을 정의역으로 하는 상황진술을 가리킨다.
의미기반과 상황진술
이 개념의 뿌리는 프레데릭 수피, 조제프 스니드, 볼프강 슈테그뮐러가 물리학 이론들을 집합이론을 사용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론을 ‘이론의 핵심’과 ‘활용범위’로 나누어 논의한 데에 있다. 스니드와 슈테그뮐러는 수리물리학에 속하는 특수한 이론들을 세부적으로 평가하고 공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주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과학이론의 성격과 얼개를 이해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4장의 논의는 이러한 접근과 토머스 쿤의 과학에 대한 논의를 접목시켜 과학이론의 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미국의 과학사학자/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들의 구조>에서 과학이론의 변화에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점진적인 변화가 중심이 되는 정상과학의 단계와 매우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과학혁명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패러다임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상과학 단계에서 점진적인 변화만이 일어나는 것은 패러다임 안에서 과학이 발전하기 때문이며,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이 달라지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 자체의 의미는 다소 모호한 면이 있다. 쿤은 <과학혁명들의 구조> 2판 후기에서 패러다임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좁은 의미로는 범례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전문분야의 기준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과학이론을 평가할 수 있는 가치를 언급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정밀성, 일관성, 적용범위, 단순성, 유용성을 들고 있다.
‘의미기반’과 ‘상황진술’은 ‘언어’와 ‘문장’ 또는 수리적인 ‘영역’과 ‘사상’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에 해당한다. 특히 의미기반 개념은 패러다임 개념의 다의성과 달리, 어떤 과학 이론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부분과 그 밑에 감추어진 기반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의기기반은 구성하는 모든 가능한 의미요소들의 집합이며, 이는 다시 이론의 취급 대상이 되는 모든 대상물들의 집합인 대상영역과 대상물들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나타내는 상황영역으로 구별된다. 의미기반의 구체적인 모습은 ‘서술공간’(시공간의 구조), ‘서술모형’(대상의 표상모형), ‘서술양식’(상태규정 및 그 해석방식) 등으로 나타난다. 과학혁명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형식이론이라기보다는 그 밑에 깔려 있는 의미기반들이다. 이 의미기반에 대한 이론이 지지이론이며, 겉으로 드러나 있는 형식이론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암묵적으로 내재해 있는 지지이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논의의 우주
영국의 수학자 및 논리학자 조지 불은 1854년에 출판된 “논리와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기초에 있는 사고법칙의 탐구”에서 ‘논의의 우주’(universe of discourse)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모든 논의에는, 그것이 자신의 사유와 대화하는 마음의 논의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개인의 논의이든, 그 작동의 주체가 국한되는 (가정되거나 표현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논의의 모든 대상이 있는 영역의 정도가 무엇이든지, 그 영역을 논의의 우주라 부를 수 있다.” 형식논리학에서 모든 논증과 문장은 논의의 우주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논의의 우주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논증이나 문장이 성립하지 않거나 부적절하다. 가령 일상 언어에서도 명사와 형용사의 모든 결합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달이 행복하다.”거나 “사각형이 둥글다.”와 같은 문장은 논의의 우주를 벗어난 명사에 대한 것이므로 부적절하다.
경험표상 영역과 대상서술 영역
과학이 그려내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 이것이 ‘경험표상 영역’과 ‘대상서술 영역’이다. ‘경험표상 영역’은 “직접적인 경험 또는 이 경험에 바탕을 둔 신뢰할만한 정보를 통해 확인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공간”을 가리키며, ‘대상서술 영역’은 “외부 세계의 어떤 대상에 대한 예상을 서술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어떤 점에서 이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감성’(Sinnlichkeit)과 ‘지성’(Verstand)을 구분하고, 여기에 각각 직관과 개념을 대응시킨 것과 상통한다.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일련의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소위 활성화 에너지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매개물질이 촉매이다. 반응에서 생겨난 생성물이 다시 그 반응에 사용되는 것을 자체촉매반응이라 하며, 특히 생체 내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반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틸케톤과 할로겐이 트리할로메탄을 생성하는 할로포름 반응이나,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하는 과정이나, 포도당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해당 작용 등이 모두 자체촉매반응의 예이다. 국소질서는 공기 중의 수증기가 국소적으로 뭉쳐서 구름이 만들어진다거나 바닷물 속에서 거품이 무작위로 생겨나서 커지는 것처럼,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국한된 영역에 일종의 질서가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생명이라는 현상을 자체촉매반응에 기반을 둔 국소질서의 발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7장에서의 주된 논의이다.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
온생명은 “우주 내에 형성되는 지속적 자유에너지의 흐름을 바탕으로, 기존질서의 일부 국소질서가 이와 흡사한 새로운 국소질서 형성의 계기를 이루어, 그 복제 생성률이 1을 넘어서면서 일련의 연계적 국소질서가 형성 지속되어 나가게 되는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 정의된다. 복제 생성률이 1을 넘어선다는 것은 저절로 생겨난 국소질서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다른 국소질서가 생겨나서 전체적으로 국소질서들이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국소질서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과정에서 국소질서 자체를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변과 외부에서의 실질적인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국소질서들을 ‘낱생명’이라 하고, 이를 유지하게 만드는 주변의 존재들을 ‘보생명’이라 하며, 이를 모두 합하여 ‘온생명’이라 한다. 낱생명은 ‘개체생명’이라고도 한다. 낱생명과 보생명의 관계는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작용체와 보작용자의 관계와 같다.
작용체와 보작용자
가령 DNA의 유전정보는 그 자체로는 단백질의 생산으로 이어질 수 없고, 반드시 적절한 화학적 물리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특히 이를 위해 주변에서의 다양한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작용체(body of function)가 제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이를 보조하는 보작용자(co-functionator)가 필수적이다.
전체론적 철학과 전체론적 접근전체론적 철학은 환원론적 철학에 대한 반향으로서, 부분에 대한 고찰만으로는 전체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직관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특히 버탈란피의 일반시스템이론이나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과정철학 등이 이 부류에 포함된다. 전체론적 접근은 전체론적 철학이 지니는 존재론적 부담을 피해서 방법론적으로 전체의 양상에 주목함으로써 오히려 환원론적 접근에 대한 보완적인 접근과 대안이 된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2)
neomay33
|
2023.04.20
|
추천 2
|
조회 8612
|
neomay33 | 2023.04.20 | 2 | 8612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강독모임 계획 안내 (1)
시인처럼
|
2023.01.30
|
추천 0
|
조회 8323
|
시인처럼 | 2023.01.30 | 0 | 8323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0797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0797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9665
|
시인처럼 | 2022.03.07 | 0 | 9665 |
공지사항 |
새 자연철학 세미나 보완 계획 (3)
시인처럼
|
2022.01.20
|
추천 0
|
조회 10565
|
시인처럼 | 2022.01.20 | 0 | 10565 |
공지사항 |
새 자연철학 세미나 - 안내
neomay33
|
2021.10.24
|
추천 0
|
조회 10228
|
neomay33 | 2021.10.24 | 0 | 10228 |
326 |
[질문 묶음] 세 번째 세미나 질문들 묶음
시인처럼
|
2021.10.14
|
추천 1
|
조회 3885
|
시인처럼 | 2021.10.14 | 1 | 3885 |
325 |
[과학과 메타과학]의 용어해설 (1)
자연사랑
|
2021.10.14
|
추천 4
|
조회 3555
|
자연사랑 | 2021.10.14 | 4 | 3555 |
324 |
[세미나 질문] 앎이란, 사고란 필연적으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걸까? (1)
시인처럼
|
2021.10.14
|
추천 1
|
조회 2931
|
시인처럼 | 2021.10.14 | 1 | 2931 |
323 |
[세미나 질문] 새 자연철학의 사회적 요소 - 통합학문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
자연사랑
|
2021.10.14
|
추천 2
|
조회 3083
|
자연사랑 | 2021.10.14 | 2 | 3083 |
322 |
[질문-세미나 질문 3회(10/14) 메타과학의 개념 진화
Youngchun Kim
|
2021.10.14
|
추천 2
|
조회 2727
|
Youngchun Kim | 2021.10.14 | 2 | 2727 |
321 |
세 번째 세미나 질문 (1)
겨울나무
|
2021.10.13
|
추천 2
|
조회 2556
|
겨울나무 | 2021.10.13 | 2 | 2556 |
320 |
[세미나 질문] 과학적 방법론과 형이상학의 방법론의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kimjinwoo
|
2021.10.13
|
추천 2
|
조회 2394
|
kimjinwoo | 2021.10.13 | 2 | 2394 |
319 |
[질문-세미나3회(2021/10/14)] 갈릴레오의 <근대과학>은 성공을 이어갔으나, 장현광의 <근대학문>은 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까?
jilee
|
2021.10.11
|
추천 3
|
조회 2385
|
jilee | 2021.10.11 | 3 | 2385 |
318 |
<이분법을 넘어서> 장회익, 최종덕 2007. (2)
neomay33
|
2021.10.05
|
추천 1
|
조회 3034
|
neomay33 | 2021.10.05 | 1 | 3034 |
317 |
[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2회 - 채팅창에서 나눈 토론 주제 모음
neomay33
|
2021.10.01
|
추천 0
|
조회 2703
|
neomay33 | 2021.10.01 | 0 | 2703 |
개정판 낼 때 용어 정리를 하셨군요! 처음 알았어요. 잘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