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시간'에 대한 글 발췌
자료
상대성이론
작성자
neomay33
작성일
2022-02-11 07:38
조회
3419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고유시간'에 대한 설명을 일부 발췌했습니다.이중원선생님께서 번역하셨다는 이유로 책을 샀는데,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 읽어보니 설명도 잘 돼있고 문학적이기도 있고 상당히 재밌습니다. 추천드립니다. ^^
첫 부분에(1장 1절. 유일함의 상실) 어제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이 바로 있어서 일부 가져와보았습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2019. 쌤앤파커스. pp.22-26.
나는 26세기 전에 지구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우주 공간을 떠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리스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상은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인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의 기록이 한 편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다.
"사물은 필요에 따라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화하고,
그것들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당화된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자연과학이 등장하는 초기의 중대한 순간에 '시간의 순서'에 호소하는 신비로움에 휩싸인 애매한 표현만이 남아 있다.
천문학과 물리학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지침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
고대의 규칙에 따라 이 시간을 문자 t(프랑스어와 영어, 스페인어로는 시간이 't'로 시작되지만, 독일어나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로는 아니다)로 표시한다. t는 무엇을 가리킬까? 우리가 시계를 가지고 측정하는 숫자를 가리킨다. 방정식들은 시계로 측정된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해준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여러 다른 시계가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면 t는 그중 무엇을 가리킬까?
산과 평지에서 각각 몇 년 동안 살았던 두 친구가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이 손목에 찬 시계는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이때 둘 중 어떤 시간이 t일까?
물리학 실험실의 시계들도 하나는 탁자 위에, 또 하나는 바닥에 두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 이 두 시계의 위상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탁자에서 측정한 시간이 진짜 시간이고, 그에 비해 바닥에 있는 시계의 시간은 느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탁자 위의 시계가 바닥에서 측정한 진짜 시간보다 더 빠르다고 해야할까?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마치 영국 화폐 스털링(Pound Sterling)의 가치가 달러보다 더 정확한지, 아니면 달러의 가치가 스털링보다 더 정확한지 묻는 것과 같다. 정확한 가치는 없다. 두 화폐는 서로 상대에게 비교되는 가치를 지닐 뿐이다. 마찬가지로 더 진짜에 가까운 시간도 없다.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시간들일 뿐이다. 둘 중 다른 시간에 비해 더 진짜에 가까운 시간은 없다.
... 공간 속의 모든 지점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시계가 특별한 현상 속에서 측정한 시간을 물리학에서는 '고유시간'(proper time)이라고 부른다. 모든 시계에는 각자의 고유 시간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도 고유 시간, 고유의 리듬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서로 다른 고유 시간들이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정식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두 시간의 차를 구하는 방법도 가르쳐줬다.
유일하다고 생각한 '시간'이라는 양은 시간들의 거미줄 속에서 산산조각 난다. ...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그려진 시간의 모습이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시간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즉, 시간은 첫 번째 층인 유일함을 상실했다. 모든 장소의 시간은 다른 리듬과 속도를 갖는다. 다양한 리듬의 춤 속에서 세계의 사건들이 얽힌다. 세상이 춤추는 생명의 여신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면 최소한 만 명의 여신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여신들의 춤은 마티스의 그림처럼 거대한 군무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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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물리학자이면서도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조예가 깊습니다. 어제 제가 소개해 드린 존 노턴이라는 물리철학자가 속해 있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물리학과와 과학사-과학철학과 둘 다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로벨리가 말하는 고유시간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아니라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더 확장된 개념입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고유시간은 움직이는 좌표계들(세계선)이 많이 있을 때 관찰자 또는 서술자가 동승한 좌표계(세계선)에서 측정하게 될 시간입니다. 따라서 동승한 모든 관찰자에게 공통된 고유시간은 시간좌표나 공간좌표에 따라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어제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로 하자면, 물리법칙이 똑같다는 특수상대성원리의 조건은 네 가지입니다.
(1) 언제(즉 시간좌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2) 어디(즉 공간좌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3) 어느 방향인가(즉 공간축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4) 멈춰 있는지 아니면 일정한 속도로 반듯하게 나아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로렌츠 상대성)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네 가지 요건에 맞는 고유시간을 항상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고유시간은 좌표시간과 달리 4차원 벡터의 한 성분이 아니라 크기만을 갖는 스칼라이자 불변량입니다. 그러나 시간좌표나 공간좌표에 따라 고유시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4)에 관련된 고유시간만 달라집니다. 그래서 $t_0 = t \sqrt{1-\frac{v^2}{c^2}}$과 같이 좌표계(세계선) 사이의 상대속력 $v$에 따라서만 달라질 뿐입니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고유시간이 언제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모두 달라집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허용되는 세계선은 직선뿐이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광속보다 작다면 모든 곡선이 다 세계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고유시간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유아론적인 개념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의 세계선에 하나의 고유시간이 대응합니다. 물체를 어제 이곳에서 오늘 저곳으로 옮겼다고 할 때, 그 옮기는 궤적과 속도와 가속도에 따라 제각기 고유시간이 정의됩니다. 문자 그대로 ‘고유한’ 시간이 되어 버립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고유시간이 시간좌표, 공간좌표, 상대속력, 가속도, 궤적의 모양 등에 따라 제각기 달라집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시간과 산 밑의 시간이 달라지고, 지구 자전방향과 그 반대방향에서 시간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GPS에서 실용적으로 적용됩니다.
로벨리는 더 과격한 생각까지 제시합니다. 고리양자중력이론(Loop Quantum Gravity, LQG)이라는 것을 리 스몰린, 아바이 아슈테카 등과 함께 1980년대에 만들었는데, 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아예 시간이란 것이 근본적인 개념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도출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어로는 온건하게 L'ordine del tempo (시간의 질서)[영어 번역판도 The Order of Time]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책을 번역자인 이중원 선생님이 아예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해 버렸습니다.
본세미나에서 로벨리의 고유시간 개념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주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중원 선생님도 계시니 더 깊은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특수와 일반은 처음에는 잘 구분이 되는 것 같았는데, 갈수록 어려워지네요. ^^;
물리법칙이 똑같다는 특수상대성원리의 조건은 네 가지 :
(1) 언제(즉 시간좌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2) 어디(즉 공간좌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3) 어느 방향인가(즉 공간축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4) 멈춰 있는지 아니면 일정한 속도로 반듯하게 나아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로렌츠 상대성)
이 설명, 아주 잘 와닿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댓글입니다. 제가 설명을 잘 못하는 사람인지라... ㅠㅠ
이전에 쓴 글 "3-벡터와 4-벡터의 차이"에 이 네 가지에 대한 조금 더 테크니컬한 설명이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제가 물리학과에 가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고등학교 때 읽게 된 제레미 번스틴의 책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이 책을 장회익 선생님께서 번역하셨는데, 부록으로 장회익 선생님께서 쓰신 "4차원 공간-시간과 특수상대성이론"(161-191쪽)이란 글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우연찮게 이 글에 나오는 회전변환에 대한 것을 배울 무렵이어서 그 글이 너무나 쏙쏙 들어왔습니다. 제가 장회익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그 글을 이 게시판에 올릴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아쉽습니다.
저도 그 노란 책 읽은 1인! ^^ 2017년에 여행 가기 전에 장회익샘께서 옮기신 그 책과, 아주 두꺼운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를 읽었었지요~
앗, 그 책 갖고 계신가요? (참고로 제가 갖고 있는 책은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현대과학신서인데, 1976년 초판은 아니고 1980년대에 나온 7쇄입니다.)
저희는 1997년에 나온 책이네요. 이론이 더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아~주 재밌게 읽었다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ㅎㅎㅎ;
제가 세미나에서 언급한 노보트니의 고유시간에 대해 조금 더 읽어보시려면 제가 이전에 쓴 글 "헬가 노보트니의 '고유시간'"을 보시기 바랍니다. 장회익 선생님이 제안하시는 새 자연철학의 사회적 함의를 고민하는 저로서는 헬가 노보트니의 책과 강연이 무척 크게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