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를 다 읽고 드는 생각들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를 다 읽고 드는 생각들
녹색아카데미 최우석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를 두 번 읽었습니다. 강독모임을 앞두고 이 책에 대한 대담 영상을 찍겠다고 (찍기만 하고 편집을 못해서 아직 공개를 못했습니다) 한 일주일 붙들고 겨우겨우 한 차례 읽었고, 이번 강독모임을 하며 다시 한 차례 읽었습니다. 두 번을 읽었다고 해봐야 여전히 모르는 부분은 모르고 대강 알겠다 싶은 내용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입니다만 그럼에도 뭔가 더 나아진 부분이 있을지 소감글을 쓰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문명 안에서 문명인으로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박한 수준에서나마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자신이 터잡고 있는 세계가 대체 어떠한 곳인지 나름의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하겠고, 그러한 자신 밖의 세계를 자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나름의 해명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자기 설명이 있어 삶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기반이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인지는 인류학적으로 답을 구해야 할 문제이겠습니다만 적어도 자의식을 갖고 있고 세계와 ‘나’를 구분하는 존재라면 공통적으로 이러한 이해의 문제를 직면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한 근본 문제이니까요.
전통적으로 이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사회적 영역은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의 추구 끝에 수학으로 무장한 새로운 종류의 자연철학이 대성공을 거두던 즈음, 새로운 자연철학 운동의 원인이자 귀결로서 존재론과 인식론이 큰 도전에 직면하지 않았겠나 짐작해봅니다. 몇몇 탁월한 철학자들, 가령 갈릴레이나 뉴턴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자연철학자들이 자연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에 관측도구와 수학을 동원해 이론을 세우고, 이 이론을 통해서 그 이전까지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만큼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하는 결과를 보여준 바, 존재론과 인식론은 이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자연 세계의 보편성과 합법칙성이 존재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했고, 도구를 이용한 관측의 신뢰성 문제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인식론이 합리화해야 했을 겁니다. 자연과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자연철학이 등장하며 세계에 대한 측정가능하고 계산가능한 지식이 폭증하면서 다분히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으로 꾸려졌던 존재론과 인식론은 수학적인 서술과 정량적인 측정의 기반이 되는 바로 재구성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장회익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3차원 공간 안에 물리량을 ‘가진’ 물질로 세계가 이루어져 있고, 시간에 따른 운동량의 변화율이 대상이 받는 힘과 같다는 보편 변화 법칙을 따른다는 새로운 존재론일 겁니다. 가설로서 제안된 이론을 반증의 시험대를 통과시키며 세계 이해의 틀로 삼은 뒤, 대상이 ‘가진’ 물리량을 도구를 이용해 확인함으로써 우리 안의 이론을 ‘실재’와 맞추어 본다는 인식론도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등장에 즈음한 관측 결과와 이를 해명하는 새 이론체계는 기존의 물리학, 내지 자연과학이 기반을 두고 있던 가정과 맞지 않아 혼란을 일으켰으며 이 혼란의 근원은 바로 새 이론이나 관측 사실이 아니라 세계 이해를 위한 개념과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이라는 것이 양자역학의 장회익 해석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 이후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양자역학 연구자가 아닌 오늘의 문명을 살아가는 교양인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양자역학과 배치되지 않도록 혁신된 존재론의 한 귀결은 모든 존재물이 ‘사건야기성향’으로 존재하며 이 성향은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보편 변화 법칙에 따라 변화하므로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존재물은 위치건 운동량이건 특정한 물리량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물과 만나서 사건을 유발할 수 있는 특수 지위의 존재물, 변별체에게 사건을 야기할 성향으로서 존재하므로 우리는 존재물을 직접 만날 수 없고 변별체에 남는 흔적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확률을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매우 정교하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물에 대한 매우 신뢰성 높은 앎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선 인류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구성한 이해의 틀로 이해한 바 자연은 있는 듯 없는 듯 불확실하지도, 알쏭달쏭 불가지하지도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들어 양차 대전을 겪으며 일었던 이성에 대한 회의는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의 혁명적인 변화를 이성의 한계와 불확실성으로 해석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이 때문에 양자역학의 응용은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는 한편 양자역학을 앞에 내세우면서 신비주의 운동, 반과학주의 운동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상보성 원리’, ‘불확정성 원리’, ‘일반 중첩 원리’ 등 철학적 느낌을 풍기는 여러 가지 ‘원리’들은 과학만으로는, 이성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자연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의 방패막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존재론에 입각하여 양자역학을 이해하면 이러한 신비스런 ‘원리’들이 대전제가 아니라 자연스런 따름정리나 관계로 자리매김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해소됩니다. 자연은 고전역학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상태 변화 법칙에 따라 변화하고, 고전역학의 시대 이상으로 정교하게 예측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앎과 세계 이해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점을 알려줍니다. 칸트가 물자체를 우리가 직접 알 길은 없다고 했듯 존재물을 인식 주체가 직접 대면할 길은 없습니다. 변별체에 남은 흔적만 정보적 통로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자체를 거울에 비추어 보며 세계를 서술할 수 없고 흔적들을 가지고 우리 안에 세계상에 해당하는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다시 흔적들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세계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론으로 세계를 보고, 확인된 이론이 우리의 세계상이 됩니다. 이렇게 세운 세계상을 곧 실재라 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실재의 지위를 획득하는 이론은 무수한 반증의 터널을 통과해 살아남은 것이어야 하고, 그 결과 특정 개인을 넘어서 다수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과학혁명의 전례에서 보듯 실재상의 지위를 얻은 이론도 얼마든지 기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멋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론이 주는 앎을 포괄하면서도 더 새로운 앎을 주는 방향으로 이론 체계의 교체가 일어난다는 구조적인 방향을 갖습니다. 따라서 세계는 알 수 없다거나 세계는 저마다 제각기의 이론으로 보기 나름이므로 어느 이론이 특별히 더 낫고 더 못하다고 할 수 없다거나 하는 일종의 불가지론, 또는 진리의 무정부 상태론 등 역시 진지하게 대할 것이 못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편 양자역학 이후의 존재론과 인식론으로부터 직접 가치론을 얻어내려는 희망은 경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애초부터 그런지, 아니면 장회익의 자연철학에서 특히 그런지 모르겠지만 존재론과 인식론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장회익의 자연철학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하나가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이 세계에 대한 앎에 대한 이해는 곧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 일반과 구분되는 존재로서 ‘나’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하는 점, 그리고 그러한 구분되는 존재로서 자기 보존을 하고자 하는 일종의 ‘지향’이 어떻게 유래하는 하는 점 등에 대한 이해가 새로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上善若水와 같은 경구는 마음을 치는 깊은 감동과 깨우침을 주지만 이런 가치 도출의 구조를 ‘사건야기성향’이나 존재물과 변별체의 ‘조우’ 등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무리하고 무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저러하게 드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데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 밖으로 더 새롭게 정리가 안 되네요. 이런 제 생각이 “양자역학이 불러온 존재론적 혁명”에 잘 맞는 것인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양자역학 이후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양자역학 연구자가 아닌 오늘의 문명을 살아가는 교양인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연철학 강의 공부모임>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33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33 |
공지사항 |
3기 새 자연철학 세미나 상세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79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79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5)
neomay33
|
2023.04.20
|
추천 3
|
조회 13054
|
neomay33 | 2023.04.20 | 3 | 13054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5841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5841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12693
|
시인처럼 | 2022.03.07 | 0 | 12693 |
682 |
[질문]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것 (1)
자연사랑
|
2025.03.13
|
추천 0
|
조회 45
|
자연사랑 | 2025.03.13 | 0 | 45 |
681 |
[자료] 물리법칙과 '나'라는 문제
자연사랑
|
2025.03.12
|
추천 1
|
조회 64
|
자연사랑 | 2025.03.12 | 1 | 64 |
680 |
[자료] 자유에너지 경관과 준안정상태의 변화
자연사랑
|
2025.02.22
|
추천 1
|
조회 101
|
자연사랑 | 2025.02.22 | 1 | 101 |
679 |
[자료] 우주의 역사와 운명 (1)
자연사랑
|
2025.01.28
|
추천 1
|
조회 225
|
자연사랑 | 2025.01.28 | 1 | 225 |
678 |
[자료] 우주와 물질 - 개요 (4)
자연사랑
|
2025.01.27
|
추천 1
|
조회 238
|
자연사랑 | 2025.01.27 | 1 | 238 |
677 |
[자료] 고립계, 닫힌 계, 열린 계
자연사랑
|
2025.01.20
|
추천 1
|
조회 241
|
자연사랑 | 2025.01.20 | 1 | 241 |
676 |
[자료] 열역학 영째 법칙과 온도의 정의 (2)
자연사랑
|
2025.01.19
|
추천 0
|
조회 239
|
자연사랑 | 2025.01.19 | 0 | 239 |
675 |
상호작용 없는 측정(엘리추르-바이드만)과 겹실틈 실험
자연사랑
|
2024.12.25
|
추천 0
|
조회 216
|
자연사랑 | 2024.12.25 | 0 | 216 |
674 |
[자료] 푸리에 변환과 힐버트 공간
자연사랑
|
2024.12.10
|
추천 0
|
조회 293
|
자연사랑 | 2024.12.10 | 0 | 293 |
673 |
양자역학이 답하고 있는 문제: 상태를 어떻게 서술할까?
자연사랑
|
2024.12.09
|
추천 0
|
조회 254
|
자연사랑 | 2024.12.09 | 0 | 254 |
제가 올린 질문의 배경은 심지어 “양자역학 연구자”라 해도 양자역학의 존재론적 혁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라는 점이었습니다. 양자역학의 연구자는 그저 장인이나 테크니션처럼 양자역학을 익숙하게 다루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최근에 국제적인 화제거리가 되었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시피한 초전도체 해프닝도 그 바탕에는 양자역학의 테크니션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 문명을 살아가는 교양인이야말로 양자역학의 존재론적 혁명에 관심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살펴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양자이론의 미래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