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독후감 올립니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와 소감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장회익, 2022, 한울아카데미) 4장 양자역학의 출현과 존재론적 기초를 읽고
김진우(2023.8.19.)
■ 내용 이해
1. 고전역학의 상태 서술과 양자역학의 상태 서술의 차이
고전역학에서의 상태함수의 모양과 양자역학에서의 상태함수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고전역학에서의 상태함수>
<양자역학에서의 상태함수>
고전역학에서의 상태함수는 크로네커 델타함수로 표현된다. 이 말은 어떤 대상이 특정 지점에 있거나 없거나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의 상태함수는 프사이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고전역학에서의 크로네커 델타함수 앞에 시그마cj가 붙는 형태다. 이게 좀 아리송한데 나름 이해하자면 cj의 절대값 제곱이 1로 정의되는데 이것은 어떤 대상이 모든 곳에 있을 확률을 의미한다. 그 제곱근인 cj의 의미는 그러한 확률을 만들어내는 성질을 간직한 원천이라는 의미 같다. 말하자면 cj의 제곱이 1/2라면 그것은 우리가 확인하는 확률이고, 그러한 확률을 만들어내는 cj는 루트1/2인데, 그 루트1/2의 속성은 우리가 직접 측정할 수 없는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시그마가 붙는 것은 특정 지점이 아니라 공간 전체 지점에 존재할 가능성을 다 합한 형태로 양자역학적 대상은 존재한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모양은 고전역학의 상태인식함수의 모양과 비슷하다.
<고전역학에서의 상태인식함수>
차이점은 cj가 아니라 aj라는 것이다. 그 차이는 aj는 입자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하고 cj는 그것과는 다른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차이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상태인식함수라는 것은 우리가 측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데 고전역학적 대상이든 양자역학적 대상이든 측정을 통해 알게 될 때는 확률적 형태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 표현은 제곱으로 표현되는 확률로 나타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러한 확률을 만들어내는 원천적 성질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든 측정을 하게 되면 cj가 고전역학의 대상인 aj처럼 확률적으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확인이 된다. 한마디로 양자역학에서 측정을 한다는 것은 ci를 ai처럼 입자적 성격으로 확인해간다는 의미라고 이해된다.
2. 사건야기성향과 존재표출성향
이상의 수식으로 표현한 것을 일상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성향이라는 개념을 쓸 수 있다. 즉 양자역학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cj)이 변별체를 만나 측정이 되는데 그 무엇은 입자가 되기 전의 형태이므로 물체라고 볼 수 없고, 다만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성향’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래서 ‘사건야기성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측정하는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고 그 무엇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하나의 입자와 같은 물질적 존재로 표출된다는 의미에서 ‘존재표출성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곧 동전의 양면 같은 표현이다.
3. 양자역학의 상태함수와 푸리에 변환과 4차원 이중공간
양자역학의 상태함수에서 크시i로 표현된 위치변수의 영역을 연속적 공간으로 생각해서 표현을 바꾸면 적분형태의 함수로 된다.
<4-5>
여기서 프사이x의 의미는 파동함수다. 이 의미는 어떤 위치의 변수가 입자적 성격이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즉 입자적으로 특정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간에 퍼져 있는 어떤 속성 같은 것인데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파동 함수의 형태다.
일단 이렇게 함수로 표현하고 나면 수학적 방법에 의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적분 함수는 푸리에 변환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거쳐 새로운 함수 피(k) 함수를 하나 만들어낸다.
<4-7>
그것은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다. k는 파장을 나타내는 값인데 플랑크 상수를 곱하면 운동량이 된다. 이 관계에 의해 위치 변수로 표현된 파동함수를 푸리에 변환하여 얻는 값인 k값을 통해 이것이 곧 운동량의 값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치 변수 x와 운동량 변수 k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된 다른 공간의 값이라는 것이다. 이는 고전역학에서 위치와 운동량을 각각 독립적인 변수로 보았던 관점을 뒤집고 자연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같은 이치로 에너지가 시간진동수(오메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드러난다. 결국 위치와 시각이라는 공간과 운동량과 에너지라는 공간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면 훨씬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고로 좋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 소감
1. 입자로 분해될 수 없는 세계
내가 양자역학 설명을 들으며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부분은 아래 내용이다.
“우리가 대상의 상태를 공간의 전 영역에 걸쳐 정의되는 일반화된 성향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대상의 상태를 공간상의 하나의 점이 아닌 공간 변수의 함수 형태로 나타내어야 함을 의미한다.”(147쪽)
위 내용은 우주의 근본 물질적 형태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우주의 근본물질에 대한 나의 애초 이미지는 아주 작은 어떤 입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작아서 측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입자와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를 이런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나는 일단 아주 아득한 느낌이 든다. 적어도 입자라고 생각할 때는 측정도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지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는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입자가 아니면서 입자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그 무엇이라고 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렵고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세계를 이렇게 바라볼 때 뭐가 달라지나? 나로서는 세계 그리고 인간을 좀 더 신비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인간을 물질적으로 바라볼 때 원자적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좀 하찮게 여겨질 때가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탄소 몇 개, 질소 몇 개 등과 같은 식의 설명이 있다. 물론 이렇게 환원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고, 입자라고 생각해도 신비스럽긴 하다. 그러나 입자 이미지에 비해 양자역학이 밝혀낸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질의 본질이 한층 더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유물론이 인간을 ‘단순한 물질’로 표현한다고 할 수 없다. 물질의 근본적 본질이 우리의 일상적 이미지나 기존 관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형태라고 할 때 ‘단순한 물질’이라는 표현이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신비로운 물질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유물론과 인간 존엄성이 감정적으로 융합될 수 있다.
2. 자연의 통일적 질서와 경이감
양자역학은 예전에 몰랐던 자연의 숨은 관계를 드러냈다. 위치와 운동량, 시각과 에너지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의 다른 공간적 표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시간과 공간이 별개가 아니라 4차원 시공간 관계로 연결되어 있듯이 별개로 보였던 값들이 통일적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들이 배후의 오묘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마치 추리 소설에서 무관하게 보였던 퍼즐들이 마지막에 가서 딱 들어맞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높여준다.
세계에 대한 경이감, 이것이 내가 짧은 과학 공부를 통해 얻은 최대의 소득이다.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느낄 때 나는 내 존재가 고양되는 느낌을 받는다. 산꼭대기에서 첩첩이 겹쳐 있는 능선들과 구름의 어우러짐 같은 광경을 마주할 때 느끼는 해방감 비슷하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 내가 보는 광경은 해상도가 떨어진다. 만약 내가 수학적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한층 또렷한 시야가 펼쳐질 것 같다.
경이감은 자아를 초월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칸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마음을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채우는 것이 두 가지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이 그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자연에 대한 경이감과 도덕률에 대한 경외감이 관계를 갖고 있음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경이감이 자아초월성과 관련이 깊다면 도덕 교육에 있어 과학의 쓸모를 새롭게 발견하고 적용할 필요성이 있겠다.
■ 질문
1. 양자역학의 대상이 고전역학적 질서의 규정을 얼마나 받는가? 예컨대 성향으로 표현되는 양자역학적 물질(성향)이 빛의 속도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140쪽) 기존의 바탕질서를 새롭게 규정해야 하는가? 기존의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2. 위치와 운동량, 시각과 에너지가 상반공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양자역학적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인가?
3. 위치와 운동량이 상반공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어떤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이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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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신 질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달고자 합니다.
1. 빛의 속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원리나 법칙이나 규정은 실상 없습니다. 양자역학은 맨 처음부터 상대성이론을 전제하지 않고 그와 독립하여 만들어진 이론체계입니다. 또 상대성이론이라 해도 광속을 넘어서지 않는 것은 신호나 정보 정도입니다. 정보로 사용되지 않는 것은 광속을 쉽사리 넘어설 수도 있고, 가령 우주 팽창의 ‘속도’는 광속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양자역학에 대해 장회익 선생님이 새롭게 규정하신 ‘성향’이 광속의 제한을 받는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헨리 마제노, 칼 포퍼, 니콜라스 맥스웰, 심지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양자역학의 상태과 상태변화를 ‘성향’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했었기에 장회익 선생님이 외롭게 이러한 주장을 홀로 펼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2. 양자역학이 등장할 바로 그 무렵, 미국의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순전히 수학에서 푸리에 변환만 가지고 하이젠베르크 부등식과 같은 내용의 주장을 얻었습니다. 양자역학과 상관 없이 그런 결과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19세기에 조제프 라그랑주와 윌리엄 해밀턴이 역학의 체계를 각각 라그랑주 역학과 해밀턴 역학으로 재구성할 때, 상태를 나타내는 기본 개념으로 바로 위치와 속도/운동량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사후적이긴 하지만 기하학적으로 보면 접다발, 여접다발 이론이라는 수학적 형식체계를 통해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자역학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위치와 운동량 사이의 연결은 독립적으로 해명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3. 위치와 운동량이 독립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가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장 운동량이 속도에 비례하고, 속도는 위치의 변화율이므로, 미묘하게 속도가 위치의 함수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비효율적이고 딱히 새로운 이야기를 건질 수 없기 때문에 단순성의 원리에 따라 위치와 운동량이 독립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칸트의 묘비에 “하늘 위에 별이 반짝이고 내 마음에 도덕률이 있다”고 되어 있다는데,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로레인 대스턴의 책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로레인 대스턴 (2022)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사실과 당위에 관한 철학적 인간학. 김영사 (http://aladin.kr/p/MzUN6)
와. 이런 답변을 바로 얻을 수 있다니 놀랍고 감사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추천해주신 책은 꼭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