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얽힘과 비국소성
2022년 노벨물리학상이 벨 논변과 관련된 실험, 나아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양자 얽힘을 양자정보과학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에 주어진 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도에는 여기저기에서 '비국소성(non-locality)'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노벨상위원회의 공식 문서(popular and advanced)의 어디에서도 그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advanced 문서에 여러 실험들을 상세하게 해설하기 전 벨 부등식 및 벨 논변과 관련하여 양자역학의 여러 해석들을 한 단락씩 짧게 언급하는 과정에서 단 한번 '비국소성'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데이비드 봄의 이론이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의 예측을 완전히 재현하면서도 결정론적이지만, '비국소성'이라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는 서술에 들어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데이비드 도이치와 패트릭 하이든의 2000년 논문에서 명백하게 벨 사고실험이나 양자전송 모두에서 정보의 흐름은 모두 철저하게 국소적임을 증명했습니다.
- Deutsch David and Hayden Patrick (2000) "Information flow in entangled quantum systems". Proc. R. Soc. Lond. A.4561759–1774 http://doi.org/10.1098/rspa.2000.0585 .
물론 이 증명에도 뭔가 빠진 것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하간 이 논문의 주장과 논리를 따라가면, 그 어떤 경우에도 '국소성'과 충돌하는 것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코펜하겐 해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비국소성 교리'를 퍼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아인슈타인의 믿음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도이치와 하이든의 증명은 1949년에 아인슈타인이 말한 국소성 개념이 양자 얽힘과 관련된 모든 현상에서 여전히 작동하며 유효함을 보여줍다. 즉 아인슈타인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 "계 S1에 대해 일어난 일은 이 계와 공간적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다른 계 S2의 실제 사실적 상황과 무관하다." ("the real factual situation of the system S2 is independent of what is done with the system S1, which is spatially separated from the former.")
상대성이론이 옳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국소성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물리학이 가능하며, 상대성이론도 국소성원리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국소성과 충돌하는 물리학 이론은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자 얽힘 이야기를 하면서 피해야 하는 주장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틀렸음이 밝혀졌다"거나 "비국소성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 포함됩니다.
양자얽힘에 대한 보수적 접근은 단지 '비분리성(non-separability)'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비분리성은 전체 운동량 보존 법칙에서도 이미 확연합니다. 두 물체가 충돌했다가 다시 멀어질 때, 한 쪽의 운동량이 $p$이면 다른 쪽의 운동량은 $P-p$입니다. 여기에서 $P$는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으로서 충돌 전후에 똑같은 값을 유지하는 바로 그 전체 운동량입니다.
두 물체가 아주 멀리 떨어진 뒤에 한 쪽의 운동량을 측정해서 $p$임을 알았다면, 그 순간 다른 쪽의 운동량은 명확하게 $(P-p)$이지만, 이것을 놓고 아무도 '비국소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은 첫 단주가 문제였는지 원래 과학이론 특히 물리학이론이 그런 식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신비주의적 해석이 판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유명한 사람들이 자꾸 이런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어서 양자역학의 이해에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벨 부등식 또는 더 세련된 CHSH 부등식을 유도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분리성(국소성)과 물리량의 실재성입니다. 이 벨 부등식이 양자역학과 충돌하므로, 양자역학은 국소성과 물리량의 실재성을 둘 다 전제로 삼는 숨은변수이론과 충돌합니다. 게다가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예측결과가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단지 국소실재 숨은 변수이론이 폐기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에 국소성과 실재성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물리학자들(더 정확히 말하면 이 분야에 전문성을 지니지 않은 듯한 물리학자들)이 비국소성이 자연에 존재한다거나 아인슈타인이 "허깨비 같은 원격작용 (Spukhafte Fernwirkung, 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 부르면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한 것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치곤 합니다.
그러나 비국소성이란 관념은 제대로 된 물리학자라면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황당한 믿음입니다.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비국소성'이라 부르는 것은 양자역학이 부분계를 분리된 것으로 서술하지 않는다는 '비분리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이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국소성을 처음부터 전제하지 않고, 비국소성(더 정확히는 비분리성)과 물리량의 실재성을 정의해서 양자역학과 충돌하는 숨은변수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 국소성 + 실재성 --> 양자역학과 충돌하는 숨은변수이론
- 비국소성 + 실재성 --> 양자역학과 충돌하는 숨은변수이론
이렇게 두 가지가 다 가능하다면, 국소성 여부가 아니라 물리량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논리적 귀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초유동(superfluidity)의 업적으로 20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한 앤써니 레깃(Anthony James Leggett)은 2003년 비국소성을 전제로 한 숨은변수이론이 양자역학과 충돌함을 증명했습니다.
- Leggett, A.J. Nonlocal Hidden-Variable Theories and Quantum Mechanics: An Incompatibility Theorem. Foundations of Physics 33, 1469–1493 (2003). https://doi.org/10.1023/A:1026096313729
2007년에 오스트리아 빈과 폴란드 그단스크의 물리학자들이 레깃 유형의 비국소 숨은변수이론으로부터 얻은 부등식을 실험으로 검토하여 그 부등식이 위배됨을 밝혔습니다.
- Gröblacher, S., Paterek, T., Kaltenbaek, R. et al. An experimental test of non-local realism. Nature 446, 871–875 (2007). https://doi.org/10.1038/nature05677
이런 이론적 및 실험적 접근의 함의는 분명합니다. 벨 논변의 핵심 주장 또는 주요 함의는 신비스러운 허깨비 원격작용이나 비국소성이 자연에 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까지 견지해 온 물리량의 실재성 개념이 부적절하고 진짜 필요한 것보다 더 과도했다는 것입니다.
벨 논변은 물리량의 실재성에 대한 반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의견을 심각하게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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