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러의 뒤늦은 선택 실험
존 아치볼드 윌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2008)는 매우 탁월한 물리학자였습니다.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장본인이고,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과 관련된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오랫 동안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윌러가 만들었다고 했는데, 1963년에 어느 과학기자가 이 이름을 기사에 처음 썼고, 1967년에 윌러가 강의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고 나중에 중력이론을 다룬 유명한 교과서를 통해 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존 아치볼드 윌러와 알버트 아인슈타인, 유카와 히데키. 프린스터 1956년)
윌러는 여러 면에서 유명하지만, 특히 뛰어난 제자를 키워낸 탁월한 선생이었습니다. 유명한 제자 중에는 리처드 파인만, 킵 쏜, 찰스 미즈너, 벤자민 슈마허, 로버트 월드, 빌 언루, 제이콥 베켄스타인, 로버트 제로치, 휴 에버렛 등이 있습니다. 휴 에버렛은 소위 '여러 세계 해석'을 만든 사람이고, 파인만과 쏜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슈마허는 '큐비트'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고, 베켄슈타인은 블랙홀 엔트로피를 처음 밝힌 사람입니다.
뒤늦은 선택 실험 또는 지연선택실험(Wheeler's delayed-choice experiment)이라는 것은 1978년 윌러가 제시한 사고실험입니다.
- J. A. Wheeler (1978). "The 'Past' and the 'Delayed-Choice' Double-Slit Experiment", in A. R. Marlow, ed. Mathematical Foundations of Quantum Theory, pp. 9–48. (첨부파일 참조)
꽤 긴 논문이니만큼 뒤늦은 선택 실험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 있지만, 그중 아래 그림이 알기 쉽습니다.
[출처: Wheeler (1978)]
금방 알아차릴 수 있듯이, 이 도식은 마흐-첸더 간섭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A와 F는 빛살가르개 즉 반투명거울입니다. A와 B는 반사거울입니다. 광원 S에서 레이저를 쏘되 에너지를 아주 낮게 해서 빛알(광자) 하나가 간신히 방출될 정도로 조정합니다.
이미 논의한 것처럼, 두 번째 빛살가르개(반투명거울) F가 없으면 빛알 검출기 C1에서만 빛알이 검출됩니다. 두 번째 빛살가르개 F를 놓으면 두 빛알 검출기 C1과 C2 모두에서 빛알이 검출됩니다. 이 실험세팅을 다소 왜곡하면, 두 번째 빛살가르개 F가 없으면 두 경로 중 하나만 빛이 지나가므로 검출기를 통해 '어느 길' 정보를 알 수 있어서 입자처럼 거동하지만, 두 번째 빛살가르개 F가 있으면 간섭이 일어나서 파동처럼 거동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살가르개를 놓거나 빼는 대신 빛알 검출기의 위치를 C1, C2 대신 C1', C2'으로 재빨리 바꿀 수 있다고 해 보죠. 그러면 빛이 첫 번째 빛살가르개 A를 지난 뒤에 빛알 검출기를 C1, C2으로 할지 아니면 C1', C2'으로 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에 따라 빛알이 입자처럼 거동할지 아니면 파동처럼 거동할지 달라져 버립니다. 직관적으로는 첫 번째 빛살가르개를 지난 뒤에 이미 그 경로는 확정된 것 같은데, 뒤늦게 빛알 검출기의 위치를 선택함에 따라 과거를 바꿔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소위 '뒤늦은 선택(delayed choice)'과 시간의 방향을 거슬러 작용하는 '역향인과(backward causation, retrocausality)'입니다. 스케일을 좀 키우면 아래와 같은 황당한 일도 가능한 듯 보입니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가령 초신성이 폭발한다거나 어떤 빛이 출발합니다. 두 개의 빛이면 이야기가 번거로워지므로 이 빛이 거대한 은하의 양 옆으로 와서 중력렌즈효과에 따라 두 개의 빛이 지구에 도달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림 출처: https://earthsky.org ]
천문학에서는 이런 관측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양자역학을 갖다 붙입니다.
[그림 출처: wikimedia.org ]
위 그림의 왼쪽처럼 두 개의 망원경 방향을 다르게 하면, 두 경로 중 어느 길로 왔는지 알 수 있어서 빛이 '입자처럼' 거동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부분에서 망원경 대신 두 개의 반투명 거울(빛살가르개)을 놓아두면, 두 빛의 광로차에 따라 간섭무늬가 나온고 두 빛은 '파동처럼' 거동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별빛은 아주 오래 전에 출발한 것인데, 이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뒤늦은 선택"에 따라 빛이 입자처럼 거동할지 아니면 파동처럼 거동할지 달라져 버립니다. 이것은 결국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향해 인과가 작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윌러의 뒤늦은 선택 실험에 대한 항간의 신비주의적이고 납득하기 힘든 서술입니다. 이와 관련된 상세한 설명이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232쪽에 있습니다.
뒤늦은 선택 실험은 지난 20여년 동안 단지 사고실험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실험이 되었습니다. 이 실험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존재론과 어떻게 연결될지 더 깊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 Jacques, V. et al. (2007). Experimental realization of Wheeler's delayed-choice gedanken experiment. Science 315, 966968. DOI: 10.1126/science.1136303
- Manning, A., Khakimov, R., Dall, R. et al. (2015). Wheeler's delayed-choice gedanken experiment with a single atom. Nature Phys 11, 539–542. https://doi.org/10.1038/nphys3343
- Xiao-song Ma, Johannes Kofler, and Anton Zeilinger (2016). Delayed-choice gedanken experiments and their realizations. Rev. Mod. Phys. 88, 015005. https://doi.org/10.1103/RevModPhys.88.01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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