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 반지름과 수소원자의 전자 분포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213쪽에는 수소원자의 상태함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독특한 물리량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a_0$이라 표기된 것은 보어 반지름(Bohr radius)입니다. $$a_0 =\frac{\hbar^2}{me^2} \simeq 0.529 \times 10^{−10} \rm{m}$$
이 표현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신기한 면이 있습니다. 플랑크 상수와 전자의 질량과 전자의 전하량이 만나서 어떻게 길이가 될 수 있을까요?
플랑크 상수라는 것은 1900년 흑체복사의 공식에서 처음 등장했고,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에서 장회익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푸리에 변환과 같은 수학적인 변환을 통해 위치공간에 상응하는 $k$-공간을 정의하면 고전역학에서 말하는 운동량과 $p = \hbar k$의 관계를 맺게 해 주는 물리상수입니다.
$m$은 전자의 질량입니다. 전자라는 것은 1897년에 처음 드러난 기본입자입니다. 그 전까지 전기와 관련하여 여러 이론들이 있었는데, 음극선관에서 보이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사실은 이 기본입자들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영국의 물리학자 J. J. 톰슨이 처음 꺼낸 것이었습니다. 과연 전자라는 게 정말 물질 속에 존재하는가 하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여하간 전자는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이 전자라는 것에는 '전기와 관련된 짐'이란 의미로 '電荷(electric charge)'가 있습니다. 그것이 $e$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값을 연산으로 묶어서 표현한 $$\frac{\hbar^2}{m e^2}$$라는 것이 놀랍게도 길이의 단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세구조상수라 부르는 $$\alpha = \frac{e^2}{\hbar c}\simeq \frac{1}{137}$$는 단위가 없는 숫자입니다. 이를 이용하면 $$a_0 =\frac{\hbar^2}{m e^2} = \frac{\hbar}{m c} \cdot \frac{\hbar c}{e^2} = \frac{\hbar}{m c}\frac{1}{\alpha}$$로 쓸 수 있습니다. 플랑크 상수의 차원은 $M L^2 T^{-1}$이므로 단위는 $\rm{kg} \ \rm{m}^2 / \rm{s}$이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드브로이 관계식 $p=\hbar k$과 빛의 운동량이 $p=mc$로 주어진다는 것으로부터 $\hbar/m c$가 $1/k$ 즉 길이의 단위가 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세구조상수는 단위가 없는 숫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hbar /m c ) (1/\alpha)$라는 조합이 길이의 단위가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려져 있는 플랑크 상수, 전자의 질량, 전자의 전하량을 넣어 $a_0$의 값을 계산해 보면 1억분의 1 센티미터의 절반 정도가 됩니다.
이 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3년 닐스 보어가 원자의 모형으로 제안한 이론에서였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ohr_model 참조)
[그림 출처: Encylopaedia Britannica]
원자를 태양계처럼 생각하는 모형은 보어가 처음 생각해 낸 것은 아니고 조제프 라머 (1897), 장 페랭 (1901), 나가오카 한타로 (1904), 어니스트 러더퍼드 (1911), 존 윌리엄 니콜슨 (1912) 등 기나긴 전사가 있습니다. 보어가 기존의 태양계 모형과 달랐던 점은 1900년 플랑크가 제안하고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전시킨 빛양자 개념을 곧이곧대로 차용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빛의 에너지가 진동수의 정수배만 허용된다는 가정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정이 바로 전자의 각운동량이 플랑스 상수의 정수배만 허용된다는 또 다른 가정입니다. 즉 $$m v r = n \hbar \quad (n=1, 2, \cdots)$$인데 이렇게 하면, 전자의 원궤도 중에서 $$r= \frac{\hbar^2}{me^2} n^2 \equiv a_0 n^2 \quad (n=1, 2, \cdots )$$와 같이 띄엄띄엄 떨어진 것만 허용된다는 것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입한 $a_0$가 다름 아니라 보어 반지름입니다.
전자 원궤도 반지름의 공식을 유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위의 그림에서처럼 원자핵 주변에 전자가 원궤도를 그리고 있다고 가정하면, 전자의 질량과 구심가속도를 곱한 것이 쿨롱 전기력으로 주어지는 구심력과 같습니다. 즉 $$m \frac{v^2}{r}=\frac{e^2}{r^2}$$이 되는데, 이 식과 위의 식에서 $v$를 소거하고 $r$에 대해 풀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더 상세하게 적겠습니다. 바로 위의 식에서 $$m v^2=\frac{e^2}{r}$$가 되고, 앞의 식에서 $$v=\frac{n\hbar}{mr}$$이므로 이를 이용하면 $$m \left(\frac{n\hbar}{mr}\right)^2 = \frac{n^2 m \hbar^2}{m^2 r^2}= \frac{e^2}{r}$$입니다. 즉 $$\frac{n^2 \hbar^2}{m r} = e^2$$이므로 결국 $$r = \frac{\hbar^2}{m e^2} n^2$$이라는 결과를 얻습니다.]
하지만 보어의 모형은 첫 단추이긴 해도 올바른 원자모형이 아닙니다. 양자역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원자모형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원궤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태양계처럼 궤도가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어의 이론이 나올 무렵 원자이론에서 가장 관심을 끌던 문제는 제만 효과(Zeeman effect)와 슈타르크 효과(Stark effect)였습니다. 수소기체를 진공관에 넣고 에너지를 주었을 때 수소원자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는 것은 19세기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자기장 속에서 그 선이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1897년 네덜란드의 제만(Pieter Zeeman)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기장 속에서 스펙트럼 선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슈타르크 효과는 1913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초기양자이론인 보어-조머펠트(Bohr-Sommerfeld) 이론으로는 이 효과를 제대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 악명 높았던 것은 헬륨원자였습니다. 관측결과에 따르면, 헬륨원자의 에너지 수준은 두 종류로 나뉘어지며,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빛을 내며 옮겨가는 일이 있을 수 없음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보어-조머펠트 이론으로는 이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1925년부터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기존의 해결되지 않던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어 나갔습니다. 특히 양자역학을 이용하여 수소원자의 오비탈, 즉 사건야기성향 또는 존재표출성향을 계산하면 보어의 원자모형에서 얻은 결과가 포함된 새로운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보어의 모형과 비교하기 위해서는 $\ell=0$ 즉 s 오비탈을 보아야 합니다. 맨 안쪽부터 차례로 세 개의 오비탈을 보면 1s, 2s, 3s가 되는데, 이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아래 그림입니다.
[그림 출처: chem.libretexts.org]
1s 오비탈에서 존재표출성향이 최대가 되는 곳, 즉 보라색 곡선의 맨 꼭대기(피크)가 있는 위치를 보면 $r=a_0$일 때가 됩니다. 2s(초록색 곡선)의 경우는 $r=(3+\sqrt{5}) a_0 \approx 5.2 a_0$일 때, 3s(빨간색 곡선)의 경우는 $r\approx 13 a_0$일 때 피크가 됩니다. 이 계산을 하기 위해 사용한 상태함수는 $$\begin{align} \psi_{100}(\mathbf{r}) & = \frac{1}{\sqrt{\pi}}{a_0}^{-3/2} e^{-r/a_0} \\
\psi_{200}(\mathbf{r}) & = \frac{1}{4\sqrt{2\pi}}{a_0}^{-3/2}\left(2-\frac{r}{a_0} \right)e^{-r/2a_0} \\ \psi_{300}(\mathbf{r}) & = \frac{1}{81\sqrt{3\pi}}{a_0}^{-3/2}\left(27-18 \frac{r}{a_0} + 2\frac{r^2}{{a_0}^2} \right)e^{-r/3a_0} \end{align}$$입니다.
이렇게 해서 양자역학의 계산결과는 보어의 1913년 원자모형의 계산결과와 다릅니다.
그러면 양자역학의 계산결과가 실제 수소원자의 전자 분포와 같은지 궁금해집니다.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실험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2013년에야 비로소 성공했다고 합니다.
A.S. Stolodna et al. (2013). Hydrogen Atoms under Magnification: Direct Observation of the Nodal Structure of Stark States. https://doi.org/10.1103/PhysRevLett.110.213001
이에 대한 더 상세한 해설이 있습니다.
Viewpoint: A New Look at the Hydrogen Wave Function, C.T.L. Smeenk, Physics 6, 58 (2013)
참고로 보어가 어떻게 각운동량이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만 허용된다는 가정을 도입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토머스 쿤이 1962년에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1912년에 나온 존 윌리엄 니콜슨의 논문에 바로 그와 관련된 내용이 있고, 또 당시에는 굳이 언급하진 않더라도 모두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보어가 대답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구절에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출처: Interview of Niels Bohr by Thomas S. Kuhn, Leon Rosenfeld, Aage Petersen, and Erik Rudinger on 1962 November 7, Niels Bohr Library & Archives,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College Park, MD USA, www.aip.org/history-programs/niels-bohr-library/oral-histories/4517-3 )
Niels Bohr - Session III
Kuhn:
At the very end of the first paper you suddenly speak of the angular momentum quantization having approached it earlier through something like energy quantization. Was that the first time, so far as you know, that you had tried to deal really with angular momentum in that way?
Bohr:
No, because, you see, angular momentum is really not a hidden thing. Angular momentum is just the relation, for a circular orbit, between the kinetic energy and the frequency, and that was known all the time, you see. Everybody had that in some paper. You can find it in Nicholson. That was what we all had, you see. So that's not a point. It really would have been very much more beautiful if it had all been left out. In some ways also it's nice that it is there because then I tried to do something with it. But most of it is sheer nonsense.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연철학 강의 공부모임>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40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40 |
공지사항 |
3기 새 자연철학 세미나 상세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92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92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5)
neomay33
|
2023.04.20
|
추천 3
|
조회 13064
|
neomay33 | 2023.04.20 | 3 | 13064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5849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5849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12702
|
시인처럼 | 2022.03.07 | 0 | 12702 |
682 |
[질문]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가요? (1)
자연사랑
|
2025.03.13
|
추천 0
|
조회 64
|
자연사랑 | 2025.03.13 | 0 | 64 |
681 |
[자료] 물리법칙과 '나'라는 문제
자연사랑
|
2025.03.12
|
추천 1
|
조회 81
|
자연사랑 | 2025.03.12 | 1 | 81 |
680 |
[자료] 자유에너지 경관과 준안정상태의 변화
자연사랑
|
2025.02.22
|
추천 1
|
조회 106
|
자연사랑 | 2025.02.22 | 1 | 106 |
679 |
[자료] 우주의 역사와 운명 (1)
자연사랑
|
2025.01.28
|
추천 1
|
조회 228
|
자연사랑 | 2025.01.28 | 1 | 228 |
678 |
[자료] 우주와 물질 - 개요 (4)
자연사랑
|
2025.01.27
|
추천 1
|
조회 239
|
자연사랑 | 2025.01.27 | 1 | 239 |
677 |
[자료] 고립계, 닫힌 계, 열린 계
자연사랑
|
2025.01.20
|
추천 1
|
조회 245
|
자연사랑 | 2025.01.20 | 1 | 245 |
676 |
[자료] 열역학 영째 법칙과 온도의 정의 (2)
자연사랑
|
2025.01.19
|
추천 0
|
조회 241
|
자연사랑 | 2025.01.19 | 0 | 241 |
675 |
상호작용 없는 측정(엘리추르-바이드만)과 겹실틈 실험
자연사랑
|
2024.12.25
|
추천 0
|
조회 221
|
자연사랑 | 2024.12.25 | 0 | 221 |
674 |
[자료] 푸리에 변환과 힐버트 공간
자연사랑
|
2024.12.10
|
추천 0
|
조회 301
|
자연사랑 | 2024.12.10 | 0 | 301 |
673 |
양자역학이 답하고 있는 문제: 상태를 어떻게 서술할까?
자연사랑
|
2024.12.09
|
추천 0
|
조회 257
|
자연사랑 | 2024.12.09 | 0 | 257 |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수소원자의 바닥상태에서 존재표출성향이 가장 높은 곳은 $r=a_0$ 즉 보어 반지름에서이지만, 존재표출성향의 반지름 평균은 $r=\frac{3}{2}a_0$입니다. 전자가 원자핵 주위의 원궤도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 줍니다.
수소원자의 바닥상태와 보어 반지름 참조.
아래 사이트에 수소원자 관련한 흥미로운 정보가 많이 있습니다.
"Hydrogen atom" (Hyperphys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