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와 양자불연속 논쟁
(* 제4장 "소를 얻다: 양자역학"과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려둡니다. 제가 쓴 글이고 2018년 물리학과 첨단기술>이라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1918년에 막스 플랑크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는데, 그 100주년을 기념하여 몇 편의 글을 모은 것 중 하나입니다. *)
“Sieh zu, was du tust; sag an, warum du es tust; denn die Zeit fliesst dahin.” (네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네가 그것을 왜 하는지 말하라. 시간은 흘러가버릴 테니) - Gottfried Wilhelm Leibniz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 업적은 “에너지 양자의 발견을 통해 물리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런데 그 에너지 양자 또는 작용양자의 발견이 과학사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쟁점이 드러났다.
먼저 플랑크의 새로운 작용양자 개념이 양자혁명의 도화선이었다면, 그 혁명이 일어난 시점은 언제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1900년 12월 14일과 10월 19일에 대한 이야기를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랑크의 연구가 과연 혁명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둘러싼 논쟁도 유익하다. 양자혁명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도 그 동안 많이 주목받지 않은 주제이다. 플랑크가 있던 베를린 대학 이론물리학연구소 대신 그가 설명하려 했던 새로운 실험결과가 도출된 물리-기술 제국연구소에 주목함으로써, 과학의 역사에서 이론과 실험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1900년 12월 14일과 10월 19일
1900년 12월 14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물리학회에서 플랑크는 “빛띠(스펙트럼)의 에너지 분포 법칙의 이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역사적인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에서 처음으로 보편상수 $h$가 도입되었으며, 흑체복사의 에너지밀도에 관한 식$$u( \nu ,T)= \frac{ 8 \pi \nu ^{ 2 } } { c^3 } \frac{ h \nu }{\exp(h \nu /kT)-1 }$$이 제시되었다. 플랑크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는 진동수 $\nu$인 $N$개의 껴울림 떨개(공명진자)에 대한 에너지 $E$의 분포를 결정해야 한다. 만일 $E$가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양이라고 보면, 분포의 방식은 무수히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E$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유한한 수의 동일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이것이 전체 계산의 본질적인 핵심이다.) 이런 목적으로 자연상수 $h=6.55\times 10^{-27}$erg sec를 도입한다. 이 상수에 떨개들의 공통 진동수 $\nu$를 곱하면 에너지 요소(Energieelement) $\epsilon$을 erg 단위로 얻을 수 있으며, $E$를 $\epsilon$으로 나누면 개의 떨개에 분포되어 있는 에너지 요소의 수(Anzahl) $P$를 얻는다."
이 말은 곧 에너지가 연속된 값을 갖는 게 아니라 띄엄띄엄 떨어진 불연속적인 값을 갖는다는 양자화 가설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말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양자이론의 고고지성을 들려준다. 1947년 10월 7일 괴팅겐의 알바니 교회에서 거행된 플랑크의 장례식에서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가 읽은 추모사에서 언급된 이후 양자역학의 탄생일은 1900년 12월 14일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과학사학자 막스 야머(Max Jammer)는 굳이 양자역학의 탄생일을 정하고자 한다면, 1900년 12월 14일보다는 1900년 10월 19일이 더 적합하다고 제안했다. 10월 25일에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독일물리학회를 앞두고 당시 제국물리기술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 PTR)와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 있던 루벤스(Heinrich Rubens, 1865-1922)와 쿠를바움(Ferdinand Kurlbaum, 1857-1927)은 흑체의 열복사가 복사선의 파장에 따라 어떻게 분포하는지 매우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를 10월 19일에 플랑크를 비롯하여 몇 명만 모인 작은 모임에서 발표했다. 이를 위해 루벤스와 쿠를바움은 모임이 열리기 며칠 전에 플랑크에게 새로운 측정결과의 데이터를 미리 주고 상세한 논평(Diskussionsbemerkung)을 부탁했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 있던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은 기존의 파셴(Friedrich Paschen, 1865-1947)의 실험과 잘 일치하도록 기체분자운동론을 써서 실험식 $$ u( \lambda ,T)=c _{1} \lambda ^{-d} \exp \left( - \frac{c _{2}}{\lambda T} \right)$$($c_1 , c_2$는 상수, $d\approx 5$)을 유도해 발표했다. 그런데 장파장 영역에서는 빈의 실험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루벤스와 쿠를바움의 실험결과였다. 플랑크는 이 새로운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한 논평을 준비하는 중에 올바른 흑체복사 공식을 얻었다.
플랑크의 논변은 다음과 같다. 만일 맥스웰-볼츠만의 등분배정리를 만족한다면 흑체복사의 에너지 분포가 $$ u( \nu ,T)= \frac{ 8 \pi \nu ^{ 2 } } { c^{ 3 } } kT$$로 주어지는데, 이렇게 에너지가 온도에 비례한다면, 온도와 엔트로피의 도함수 사이에 $$ \frac{ 1 }{ T } = \frac{ \partial S } { \partial U } $$의 관계가 있으므로 $$\frac{\partial ^{2} S}{\partial U ^{2}} = \frac{\alpha }{U ^{2}}$$ ($\alpha$는 임의의 상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빈의 실험식을 얻기 위해서는 엔트로피를 $$S= \frac{U}{a \nu } {\log} \frac{U}{eb \nu }$$라고 가정해야 하며, 이 때 $$\frac{\partial ^{2} S}{\partial U ^{2}} = \frac{\beta } {U}$$ ($\beta$는 임의의 상수)가 된다.
이 두 경우의 절충으로 엔트로피의 에너지에 대한 도함수가 그 중간 형태인 $$\frac{ \partial ^{ 2 } S } { \partial U^{ 2 } } =- \frac{ \alpha } { U( \beta +U) } $$ ($\alpha$, $\beta$는 임의의 상수)와 같은 관계를 만족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이 가정으로부터 에너지밀도의 식을 구하면 $$u( \nu ,T)= \frac{\alpha' \nu ^{3}} {\exp( \beta' \nu /T)-1}$$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빈의 실험식을 개선하면 루벤스와 쿠를바움의 새로운 실험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파셴의 실험결과를 넘어서는 루벤스와 쿠를바움의 실험이 없었더라면, 플랑크가 에너지 양자화 가설을 도입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플랑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루벤스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복사법칙의 정식화나 양자이론의 기틀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졌거나 심지어 독일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플랑크 작용 양자의 의미
플랑크를 과학사 명예의 전당에 굳건하게 세운 것은 그가 제시한 에너지의 작용 양자(Wirkungsquantum)라는 개념 덕분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양자이론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둘러싼 과학사학자들의 견해는 갈려 있다. 프랑스의 과학사학자 올리비에 다리골에 따르면, 플랑크의 에너지 작용 양자라는 개념을 둘러싼 과학사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묶음은 물리학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입장으로서, 1900년에 이미 플랑크가 미소물리학적 실체들의 에너지는 특정의 띄엄띄엄 떨어진 값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도입했다고 본다. 여기에는 1919년에 초판이 나온 뒤 양자이론의 보급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의 교과서 [원자구조와 분광선](Atombau und Spektrallinien)의 영향이 컸다. 조머펠트는 “플랑크가 [1900년에] 진동수가 $\nu$인 복사에너지는 기본 에너지 양자 $\epsilon=h\nu$의 정수배로만 방출 또는 흡수된다는 에너지 양자의 가설을 제안했다”라고 썼고, 그 덕분에 물리학자들은 플랑크가 양자이론을 처음 열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훈트(F. Hund)나 요스트(R. Jost)와 같은 물리학자 출신의 역사학자들뿐 아니라 클라인(M.J. Klein)같은 중견 과학사학자들도 대개 이 견해를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 왔다.
1978년에 출판된 토머스 쿤의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 1894-1912]는 양자이론의 역사적 서술에서 기념비적인 저서로 평가된다. 쿤은 이 책에서 엄밀하게는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화 가설을 양자이론의 탄생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플랑크가 에너지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는 문장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고전열역학의 맥락에서였다는 것이다. 플랑크가 1900년 무렵에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자신이 한 연구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는 것에는 대개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과학사학자들은 1900년을 양자이론의 탄생의 해로 보는 데에 회의적이다. 오히려 1906년에 플랑크의 가설을 실질적-물질적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광전효과를 설명했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나 빛알가설이 흑체복사이론에 어떤 본질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논의한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양자이론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쿤의 주장이다.
쿤의 주장이 나온 뒤 오래지 않아 일군의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양자불연속 논쟁(quantum discontinuity dispute)’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논쟁은 겉보기에는 막스 플랑크가 양자이론의 효시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여러 입장이 대립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를 통해 양자불연속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더 심도 깊게 논의하는 마당이었으며, 여러 가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들이 더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쿤으로 대변되는 둘째 묶음의 과학사학자들은 플랑크의 논문들 자체와 1948년까지 계속 나왔던 플랑크 자신의 강의록이나 회고록을 바탕으로 플랑크의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고전적인 통계열역학의 맥락에서 제시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혁명적인 의미는 1908년 이후에야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플랑크는 동역학의 법칙들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 혁명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셋째 묶음은 이 두 강한 주장의 중간 정도인데,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이 큰 혁명을 부르리라는 것은 몰랐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그 자신은 혁명을 가져 왔다는 견해이다. 칸그로(H. Kangro)나 네델(A. Nedell)이나 갤리슨(P. Galison) 등이 이 묶음에 속한다. 로젠펠드(L. Rosenfeld)나 야머(M. Jammer)는 첫째와 셋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며, 플랑크 자신이나 다리골은 둘째와 셋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양자불연속 논쟁이 흥미로운 까닭은 다양한 역사학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그들이 채택하는 논변이나 역사학 방법 및 역사학적 전제 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 때문이다. 과학사학자들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조금씩 다른데, 여기에는 (1) 역사 연구 상의 전통 (2) 플랑크의 1900년 논문에 나타나는 증명 (3) 통계열역학 (4) 현대적인 관점에서 플랑크를 다시 읽기 (5) 플랑크가 제시했던 목표 (6) 플랑크가 복사이론을 전개할 때 밟았던 각 단계를 형식연산 및 기호연산을 통해 찾아내려는 노력 등이 있다.
플랑크의 양자 개념이 이미 불연속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주장의 바탕에는 개별적인 발견의 평가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질문들이 있다.
★ 역사학자가 과학적 발견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에 얼마나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 상세한 증명 대신에 증명의 뼈대만 간추려도 되는가?
★ 발견자가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는 현재의 관점을 역사학자가 얼마나 받아들여야 하는가?
★ 역사학자가 발견자의 경로를 따라가는 정도는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 발견자의 경로에서 나타나는 형식적 및 기술적인 상세함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가?
쿤은 막스 플랑크의 연구에 내부 모순이 없었고 시간적으로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1900년에는 양자불연속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문헌상의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리골은 플랑크의 접근이 약한 의미에서 정합적이긴 했지만 강한 의미로 무모순성이나 완전성을 갖춘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플랑크는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양자라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명료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양자불연속 논쟁의 일단락을 짓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와 양자혁명
1962년에 출판된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들의 구조]는 단순히 ‘패러다임’이란 용어만으로도 대단히 영향력 있는 저술이었음에 틀림없으며, 많은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은 이 책의 주장들이 자신의 연구에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1978년에 출판된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 1894-1912]에서는 [과학혁명들의 구조]에서 상세하게 논의되었던 ‘정상과학’, ‘패러다임’, ‘이상 현상’, ‘위기’, ‘혁명’, ‘세계관’ 등의 용어나 개념들이 실제적으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피상적으로 보자면, 양자이론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알 수 있는 소위 ‘양자혁명’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과학혁명’의 사례가 아닐까? 과학철학의 한 연구로 분류될 수 있는 [과학혁명들의 구조]가 일반론을 전개했다면,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발표된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은 그러한 일반론의 훌륭한 사례연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1978년에 출판된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은 [과학혁명들의 구조]에서 제시된 과학적 지식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일반이론에 따라 평가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하는 것이 독일의 과학사학자, 요흔 뷔트너, 위르겐 렌, 마티아스 셰멜의 연구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정상과학 시기에는 ‘수수께끼 풀이’처럼 패러다임 내에서 문제를 던지고 이 문제를 더 넒은 영역에 적용하는 과정을 통해 패러다임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 가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점점 이론의 예측과 실험결과 사이의 불일치가 쌓여감에 따라 기존의 패러다임은‘위기’를 맞게 되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들이 시도되며, 그 중 가장 적응력 있는 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가는 것이 과학적 지식의 일반적인 전개과정이다.
그렇다면 쿤의 주장대로 아인슈타인의 빛알 가설과 에렌페스트의 통계역학적 접근을 통해 일어난 1906년의 ‘초기 양자혁명’은 이러한 과학혁명의 일반 이론에 따라 서술될 수 있는가?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 과학지식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단절(과학혁명)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 이러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연속적 성장이 가능한가?
★ 과학혁명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이러한 쿤의 질문들을 통해 양자혁명을 정교하게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양자혁명의 특수한 성격과 상세한 모습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과학혁명의 구조에 관한 이론에서도 훌륭한 기여가 될 것이다.
상대성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젊은 천재 아인슈타인을 처음 사로잡았던 문제는 플랑크의 흑체복사법칙과 고전물리학의 관계였다. 쿤이 자신의 책을 펴 낼 당시까지의 출판물에서는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최근에 일군의 과학사학자들이 편집한 [알버트 아인슈타인 논문집]을 통해 새로운 사료들이 나타났다.
1900년 무렵에 아인슈타인과 그의 약혼자 밀레바 마리치 사이에 오고 간 편지들을 보면,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흑체 복사 공식이 과연 고전물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를 가지고 골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1899년 3월부터 1901년 7월 사이에 씌어진 10편의 연애편지는 아인슈타인이 플랑크의 논문을 매우 상세하고 꼼꼼하게 읽었으며, 1907년에 출판된 비열의 양자이론에서 표현되는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이미 이 시기에 매우 잘 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왜 1900년 무렵에 자신의 생각을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뷔트너 등의 대답은 열통계물리학이 당시에 존재했던 고전물리학 이론들의 망 속에서 제 위치를 찾을 수 없음을 아인슈타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플랑크의 원래의 모형이 모형들의 망에서 인식적 고립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쿤의 의미에서 양자혁명이 일어난 것은 1900년의 플랑크의 논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1907년의 비열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 1908년 헨드릭 안톤 로렌츠의 로마 강연, 1910년의 플랑크의 논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이다.
뷔트너 등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형, 물리적 성질, 지식영역의 세 범주를 구성하고, 아인슈타인과 플랑크의 사유 속에서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범주유형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사유와 플랑크의 사유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양자혁명의 문제를 일반적인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지식의 단절과 전이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뷔트너 등은 아인슈타인과 플랑크의 접근을 모형/물성/지식영역이라는 세 범주를 통해 명확하게 검토함으로써, 지식의 해체와 재구성의 모습을 선명하게 밝혀냈다.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이라는 문제가 고전역학과 전기역학 사이의 경계선 긋기 문제였고, 그렇게 명확하게 경계선을 그으려는 노력 속에서 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이론이 탄생한 것처럼, 열복사의 문제는 열역학과 전기역학 사이의 경계선 긋기 문제였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지식들을 통합하려 하고 그 속에서 기존의 지식들 사이의 개념적 상호충돌을 지식구조의 차원에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쿤의 표현처럼 기존의 패러다임과 불가공약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탄생은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춰져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이와 같은 패러다임 이동의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정신적 모형에 따른 지식 구조”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양자이론과 실험
양자혁명이 처음 일어난 곳은 어디인가? 막스 플랑크가 1900년 12월 14일에 자신의 논문을 읽었던 베를린 대학의 물리학연구소(Physikalische Institut)인가? 아니면 그의 연구실이 있던 이론물리학 연구소(Institute für theoretischer Physik)인가? 독일의 물리사학자 디터 호프만은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에 있던 물리기술제국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 PTR)가 바로 그 곳이라고 대답한다.
이제까지 과학사 서술에서 ‘실험’이 줄곧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과 같은 이론물리학자들이 누린 영광에 비해, 정작 양자혁명을 실질적으로 (즉 물질적으로) 가져온 오토 루머(Otto Lummer, 1860-1925,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rnst Pringsheim, 1859-1917), 페르디난트 쿠를바움, 하인리히 루벤스, 빌헬름 빈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정밀한 실험은 플랑크의 복사이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밀측정의 과학기술을 목표로 1887년에 설립된 PTR은 당시 새롭게 등장했던 전기조명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는 곧 실제적인 빛(조명)의 표준을 확립하고 모호함 없는 조도의 단위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열복사에 관해서는 이미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1824-1887)가 1860년에 흑체(schwarzer Körper)의 개념을 제안한 바 있었지만, 정작 이러한 추상적 관념이 실제적으로 실험실에서 구현되기까지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1897/98년에 루머와 쿠를바움은 오랜 연구 끝에 이른바 ‘전기적인 백열 완전흑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호프만의 논문은 이와 같이 실험실에서 흑체를 구현하고 이에 대해 매우 정교한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온도와 파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확정적인 데이터를 얻는 과정을 상세히 살피고 있다. 이 정교한 실험 덕분에 고온 및 장파장에서 빈의 공식이 데이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00년 여름이었다. 쿠를바움과 함께 이 실험결과를 얻었던 루벤스는 1900년 10월 7일에 부인과 함께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친구 플랑크를 찾아갔다가 이 얘기를 꺼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플랑크는 10월 19일에 있었던 쿠를바움의 발표에 대한 논평을 준비하던 중에 자신의 유명한 공식을 얻었고, 논평에서 이 결과를 암시하는 내용을 말했다. 그로부터 6주 뒤에 다시 열린 베를린 물리학회에서 플랑크의 공식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1900년 무렵의 흑체복사에 관한 연구에서 교과서적인 관점은 이론물리학자 플랑크의 역할을 너무 과장함으로써 당시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역할뿐 아니라 실험과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조차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밀측정을 목표로 했던 물리-기술 제국연구소의 설립이라든가, 조명산업과 관련된 엄격한 조도의 단위를 확정하려는 사회적 및 기술적 필요라든가, 루머 등과 같은 탁월한 실험물리학자들의 꾸준한 연구에 대한 언급이 없이 천재적인 이론물리학자 플랑크의 위대한 업적을 말하는 것은 과학을 신화화하고 현재와의 연관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
플랑크의 먹구름
켈빈 경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윌리엄 톰슨은 1900년 4월 27일에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열과 빛에 관한 동역학 이론에 드리워진 먹구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열과 빛이 운동의 한 양식임을 주장하는 동역학 이론의 아름다움과 명쾌함은 지금 두 조각의 구름 때문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지구가 어떻게 탄성체, 본질적으로 빛에테르와 같은 탄성체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 분배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이론입니다."
앞의 문제는 마이클슨과 몰리의 실험과 관련된 “에테르 속의 운동”이라는 문제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1905년 탄생했고, 이는 20세기의 새로운 물리학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 뒤의 문제에 대해 처음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한 이가 바로 플랑크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생겨나 점점 더 힘을 얻게 된 양자역학에 플랑크는 끝까지 불신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명한 ‘과학사의 플랑크 원리’가 등장한다. 과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을 대치해 가는 것은 어떤 특별한 합리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이론을 믿는 세대가 새로운 이론을 믿는 세대로 점차 대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랑크 자신은 새로운 과학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과학을 잘 이해하고 다듬어 나가는 데 언제나 더 큰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먹구름이 20세기 물리학에 폭풍우를 가져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폭풍우는 전쟁이었다. 가족과 학문에 대한 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던 플랑크에게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깊은 고뇌의 시작이었다. 1913년 베를린 대학교(지금의 훔볼트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된 직후 플랑크는 여기저기에서 소문으로 들리는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과학과 학문의 발전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1914년 9월 독일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독일의 군사적 행동과 정치적 목적에 동참한다는 ‘지식인 93인 성명(Manifest der 93: Aufruf an die Kulturwelt)’이 발표되었다. 이 성명에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 파울 에를리히, 에밀 피셔, 프리츠 하버, 펠릭스 클라인, 빌헬름 뢴트겐 등과 더불어 플랑크의 서명이 포함되어 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막 60세에 접어든 플랑크는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고 전쟁 중에 망가진 과학연구기관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플랑크는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이던 프리드리히 슈미트-오트 및 학술원의 동료 프리츠 하버와 에른스트 폰 하르나크와 더불어 “독일 과학 비상대책기구(Notgemeinsc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을 세우고, 독일 전 지역의 과학자들을 조직하여 지위와 정치적 관점의 차이와 무관하게 당장 시급한 재정 충당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26년에 퇴임한 후에도 플랑크는 매우 활발하게 다양한 강의를 기획하고 열정적으로 청중에게 물리학의 중요성을 알렸으며, 독일물리학연보(Annalen der Physik)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뮌헨에 과학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박물관 도이체스 무제움(Deutsches Museum)을 설립하는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1930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에 취임한 이후 플랑크의 남은 인생은 이 협회를 지키는 데에 바쳐졌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이름이 막스 플랑크 협회로 바뀐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1935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를 위한 하르나크 하우스 연설에서 세 번이나 망설이다가 간신히 오른손을 들어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해야 했던 플랑크는 그가 믿었던 세계에 대한 합법칙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작거나 크거나 할 것 없이, 그 안에서 자연의 법칙들이 확고하고 일관성 있게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공동생활도 높든 낮든, 고귀하든 보잘것없든 모두에게 동일한 법칙을 요구합니다. …… 그러한 성향 안에서 프로이센과 독일은 위대해졌습니다. 모국을 사랑하는 모두가 이러한 성향을 보존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할 성스러운 의무가 있습니다.”
1918년에 막스 플랑크와 더불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군사용 독가스 개발의 책임자였고, “평화 시에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모국을 위해”라는 모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일찍 기독교로 개종했고, 스스로를 명실상부한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 치하의 나치에서는 그의 혈통이 더 큰 문제였고, 독일 화학의 자부심은 1934년 망명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앞에서 인용한 1935년의 플랑크의 연설은 다름 아니라 프리츠 하버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때에 그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연설에서 플랑크가 느꼈을 슬픔과 비분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
1945년 2월 23일은 플랑크의 삶에서 아마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날이었을 것이다. 막스 플랑크 자신도 참여했던 수요일모임(Mittwochs-Gesellschaft)이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체포된 사람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플랑크의 둘째 아들 에르빈과 죽마고우 에른스트 폰 하르나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아들이 일차대전 중에 전사하고, 쌍둥이 두 딸이 첫 출산에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아내조차 이른 나이에 사별해야 했던 플랑크에게 둘째 아들의 사형 소식은 정말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죽음의 소식을 듣는 중에도 87세의 플랑크는 약속되어 있던 대중 강연의 약속을 소중하게 지켰다. “그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을 위해, 진리와 지식 속에서 인간성을 찾아가는 노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사회적 소임을 다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플랑크의 삶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말, “Sieh zu, was du tust; sag an, warum du es tust; denn die Zeit fliesst dahin.”(네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네가 그것을 왜 하는지 말하라. 시간이 흘러가버릴 테니)이라는 말을 플랑크가 평생 좌우명으로 여겼다는 사실과도 잘 통한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모국이 있다.” 이 말은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2년 전 프로이센의 본 대학교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를 반납하면서 한 말이다. 양자 역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막스 플랑크는 어땠을까? 생전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것을 목도하고,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고, 나치 치하에서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으로서 독일의 물리학을 지키고 대변했던 그에게 과연 모국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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