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공간과 심플렉틱 다양체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83-86쪽에는 "공간들 사이의 독립성과 의존성"이란 제목으로 된 논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간의 독립성이란 개념이 모호한 면이 있고, 수학 영역에서 다루어진 것이 있어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19세기에 해밀턴(Hamilton), 류비유(Liouville), 볼츠만(Boltzmann), 깁즈(Gibbs), 푸앵카레(Poincaré) 등의 손을 거쳐 위상공간이란 개념이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은 고전역학의 상태공간입니다. 1840년대부터 직관적으로 말하는 공간(空間, space, Raum)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인 공간으로 확장하는 시도가 조금씩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헤르만 그라스만과 베른하르트 리만입니다. 3차원 공간에 국한하지 않고 이를 4차원, 5차원, 6차원 등으로 확장하여 임의의 $D$차원으로 확장한 논의를 수학자로서 매우 과감하게 전개한 것입니다. 수학계에서도 이런 시도는 처음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차 공간의 차원이 꼭 3으로 국한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 대한 공감이 퍼져나갔습니다.
차원에 대한 입문적 논의로서 위키피디어에 있는 서술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Dimension
위키피디어에서는 차원에 대한 논의를 크게 (1) 수학에서의 논의, (2) 물리학에서의 논의, (3) 컴퓨터 그래픽에서의 논의로 나눕니다. 수학에서도 벡터공간, 다양체(manifold), 대수다양체(variety), 가환환(commutative ring), 위상학적 공간, 프랙탈(쪽거리), 힐버트 공간 등의 차원으로 세분하여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물리학에서의 논의는 주로 고전물리학의 근간이 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시간까지를 포괄하여 4차원 시공간을 다루는 상대성이론을 다룹니다.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84-85쪽에는 공간의 차원이 선형공간으로서 서로 독립적이고 그 축(기저)이 서로 수직인가를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논의가 나옵니다. 이것은 공간의 차원에 대한 물리학적 접근입니다.
그런데 고전역학의 상태들을 모아 놓은 추상적 공간인 위상공간(phase space)의 수학적 구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85쪽에는 "고전역학에서는 위치 공간과 운동량 공간을 서로 독립적이라고 보고 있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이 위치 공간과 운동량 공간을 묶어 놓은 위상공간의 특별한 수학적 구조를 갖습니다. 이를 심플렉틱(symplectic) 구조 또는 심플렉틱 기하(symplectic geometry)라 부릅니다. 1939년 독일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 도입한 심플렉틱(symplectic; symplektisch)이란 용어는 복소수(complex)의 단어상의 의미와 같습니다. 접두사 com-과 sym-이 같은 의미이고, 어간에 '주름'을 의미하는 plek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고, 위상공간의 수학적 구조를 심플렉틱이라 부르는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 개념을 더 잘 보기 위해서는 올다발(파이버 번들, fiber bundle)이라는 수학적 개념을 살펴봐야 합니다. 위상공간의 수평축은 위치공간이고 수직축은 운동량공간입니다.
(출처: https://mathworld.wolfram.com/FiberBundle.html )
이 그림에서 기저다양체(base manifold)의 각 점에 올(fiber)이 매달려 있는 것을 모두 합하여 올다발(파이버 번들)이라 부릅니다. 더 구체적으로 접다발(tangent bundle)부터 보는 게 직관적이겠습니다.
기저다양체가 구면일 때 접평면(tangent space)을 생각하면, 이 접평면을 올(fiber)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바탕다양체가 원일 경우를 생각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angent_bundle )
파란색으로 표시된 바탕다양체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올(fiber)이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각 점에서의 접선처럼 되어 있는 것이 위의 그림이라면, 아래 그림은 이 접선과 수직인 직선이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접다발이 일반적인 올다발(fiber bundle)과 다른 점은 각 점에서 다발이 일의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올(fiber)은 실질적으로 아무 것이나 다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접다발‘이라고 규정을 해 버리면, 아무 올이나 되는 게 아니나 오로지 접선만 허용됩니다. 그 만나는 곳에서 명확한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저다양체와 올 사이에 일종의 일대일 대응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아래 그림과 같은 일반적인 올다발에서는 올의 선택이 자유로운 편입니다.
(출처: https://www.semanticscholar.org )
이 수학적 개념은 가령 아래 그림에서 보는 갈대 다발 같은 것에서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bit.ly/3IW2ATb )
일반적인 올다발에서 올(fiber)은 다소 과장하자면 어떤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래 그림에 나타낸 접다발에서는 올이 반드시 그 점에서의 접선 또는 접평면 또는 접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접다발은 조금 특별한 올다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Symmetry 2015, 7, 599-624; doi:10.3390/sym7020599)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86쪽에는 "이러한 의미에서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며 따라서 공간의 성격으로서의 위치 공간과 운동량 공간은 서로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고전역학의 존재론이 지닌 또 하나의 암묵적 가정이다."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만, 실상 이 위치공간과 운동량 공간은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146-151쪽에 "양자역학의 상태함수와 푸리에 상반함수"가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사실 이 위상공간의 심플렉틱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일 수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Uncertainty_principle
심플렉틱 공간은 접다발(tangent bundle)이 아니라 여접다발(cotangent bundle)에 속합니다. 라그랑지안 정식화에서는 위치와 속도 $(q, \dot{q})$가 상태를 나타내는데, 속도가 접선에 대응하기 때문에 위치와 속도를 아우르는 확장된 공간은 접다발의 성질을 분명하게 지닙니다. 이와 달리 해밀터니안 정식화에서는 위치와 운동량 $(q, p)$가 상태를 나타내며, 접선이 아니라 여접선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접다발이 됩니다. 더 테크니컬한 부분으로 가기는 어려워 보입니다만, 여하간 모두 올다발의 일종이고, 접다발이든 여접다발이든 기저다양체에 붙는 올은 각 점에서 일의적으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곧이곧대로 '독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의미를 조금 더 곱씹어보아야 하긴 하지만, 위치공간과 운동량공간이 일대일대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에서 매우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푸리에 변환을 매개로 위치 공간과 운동량 공간이 상호변환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Fourier_transform#Uncertainty_principle
푸리에 변환을 설명하는 위키피디어 항목에 '불확정성 원리'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에서 이 점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름 아니라 심플렉틱 구조와 연관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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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더 쓰기 어렵지만, 위상공간의 심플렉틱 다양체 구조는 일종의 복소수 구조입니다. 애초에 symplectic이란 용어가 complex라는 용어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복소수해석학이란 분야에서는 신기하게도 실수부분만 알면 허수부분도 알 수 있는 성질을 지닌 함수들이 있는데, 심플렉틱 다양체도 실수 부분과 허수 부분의 관계가 오묘합니다.
하지만 푸리에 변환이 심플렉틱 공간에서 어떤 형태가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고 있어서, 나중에 틈이 날 때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Symplectic Vector Space
석사과정 때 처음 접하셨다는 올다발을 전 이제야 처음 듣네요. 요사이 자유로운 수학적 사유를 조금 풀어주는 유투브 채널이 있어 조금씩 현대 수학의 개념을 접해볼 예정입니다. 부담감 없이 재밌는 얘기처럼 들으니 또 모르던 즐거움이 생기더군요. 푸리에 변환과 심플렉틱 공간도 뭔가 재밌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 같네요, 공부하시고 정리되시면 여기에도 올려 주세요. 저는 링크하신 거랑 위키피디아 들춰보겠습니다.^^
위상공간과 여접다발과 심플렉틱 기하학의 기초에 대한 최근의 흥미로운 논쟁을 A Fight to Fix Geometry’s Foundations(Quanta Magazine)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위상공간의 심플렉틱 구조와 푸리에 변환 사이의 관계는 '선형정준변환'(linear canonical transformation)으로 볼 수 있는데, 제가 잘 모르는 주제라 더 공부를 해 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어떤 수학적 개념인지를 다양한 예시와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흥미롭네요. 이렇게 세미나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은 것이 종종 다른 책이나 공부를 할 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당장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늘 일단 접해보고 싶어집니다. 항상 이렇게 나누어시는 선생님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수학에서 올다발(fiber bundle) 개념을 석사과정 때 처음 접했는데,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거기에 폭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수학자들이 만든 장난감 같은 개념들이 물리학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 무척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