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원팔선표와 삼각함수의 이름
아래 그림은 1631년에 출판된 어느 책에 있는 그림입니다.
[그림 출처: 崇禎曆書 割圓八線表 Chong zheng li shu]
그림 맨 아래에 全數(전수)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을 반지름 1인 원의 반지름 1이라 생각하면 놀랍게도 이 그림이 삼각함수를 나타냅니다.
중간에서 세로로 있는 선분에 正弦(정현)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왼쪽 원호 모양에 正弧(정호)라 적혀 있습니다. 직각부채꼴에서 正弧(정호)를 뺀 나머지 부분에 餘弧(여호)가 있고 그 아래 餘弦(여현)이라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 모서리에서 왼쪽 위로 비스듬이 올라가는 선분의 이름은 正割線(정할선)입니다. 왼쪽 수직 방향으로 正切線(정절선)이 있고, 중간 위쪽에 수평 방향으로 餘切線(여절선)이 있습니다. 또 正割線(정할선) 중간 쯤에 작게 餘割線(여할선)이 보입니다.
오른쪽 끝에 餘矢(여시)가 있고 왼쪽 아래에 正矢(정시)가 있습니다.
이제 수평방향과 정할선이 이루는 각을 $\theta$라 하면, 그림으로부터 정현(正弦)은 $\sin\theta$, 여현(餘弦)은 $\cos\theta$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절선의 길이에 해당하는 正切(정절)은 $\tan\theta$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상세하게 보면, 여절선의 길이 餘切(여절)은 $\cot\theta =1/\tan\theta$이고, 정할선의 길이 正割(정할)은 $\sec\theta=1/\cos\theta$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게 적혀 있는 여할선은 반원의 반지름에 수평한 선과 정할선이 만나는 점까지를 가리킵니다. 원점부터 그 점까지의 거리 餘割(여할)은 $\csc\theta=1/\sin\theta$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보각 함수'에 대한 것을 모두 'co-'라고 이름붙인 반면, 한자로는 모두 '餘-'를 붙입니다.
正矢(정시)는 $1-\cos\theta=\mbox{versin}\theta$ (versed sine)이고, 餘矢(여시)는 $1-\sin\theta=\mbox{coversin}\theta$ (coversed sine)입니다.
위의 그림과 유사한 그림이 아래에 있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Versine]
맨 위의 그림은 할원팔선표(割圓八線表)라는 이름의 책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八線이란 正弦, 正切, 正割, 餘弦, 餘切, 餘割, 正矢, 餘矢를 가리킵니다.
할원팔선표는 1분(1′) 단위로 0도부터 45도까지 여덟 가지 삼각함수의 값을 소수점 이하 다섯째 자리까지 나타낸 삼각함수표입니다.
이 표 읽는 법을 살짝 알려드립니다. 오른쪽 맨 위 칸이 '도(° degree)'이고 그 아래 세로로 0, 1, 2,3; 4, 5, 6; 7, 8, 9 등으로 쓰인 것이 '분(' arcminute)'입니다. 200쪽이 넘는 분량 중에서 제가 캡처한 위의 페이지는 10°부터 10° 1', 10° 2' 등등으로 각이 쓰여 있습니다.
맨 윗줄을 오른쪽부터 읽어나가면 正弦, 正切線, 正割線, 餘弦, 餘切線, 餘割線이라 적혀 있습니다.
각각 $\sin, \tan, \sec, \cos, \cot, \csc$입니다.
가령 할원팔선표 둘째 줄에 있는 값을 보면
17365
17633
101543
98481
567128
575877
인데, 이 값은 곧
0.17365
0.17633
1.01543
0.98481
5.67128
5.75877
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값을 찾아보면 (가령 https://www.wolframalpha.com/)
$$\begin{align}
\sin(10°)=&0.17364817... \\
\tan(10°)=&0.17632698... \\
\sec(10°)=&1.01542661... \\
\cos(10°)=&0.98480775... \\
\cot(10°)=&5.67128181... \\
\csc(10°)=&5.75877048...
\end{align}$$
입니다. 할원팔선표의 값이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값과 거의 오차 없이 잘 맞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 1분의 각마다 여섯 가지 삼각함수의 값을 쭉 늘어 놓은 것이 이 표입니다.
흥미롭게도 왼쪽 세로줄에도 60에서 시작하여 하나씩 줄어드는 각이 있습니다. 또 맨 아랫줄을 보면 오른쪽부터 읽어서 餘弦, 餘切線, 餘割線, 正弦, 正切線, 正割線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맨 왼쪽 맨 아래에는 79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삼각함수의 중요한 성질 중 하나가 가령 $\cos\theta=\sin(90°-\theta)$와 같은 보각 성질입니다. 따라서 표가 있으면 거기에서 90도(°)에서 뺀 각의 값의 co-로 시작하는 삼각함수의 값이 바로 나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럽에서는 '보각 함수'에 대한 것을 모두 'co-'라고 이름붙인 반면, 한자로는 모두 '餘-'를 붙입니다.
가령 셋째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칸에 있는 수 "7422"는 1이 빠진 것으로 해석하면 "0.17422"라는 의미인데, 이 값은 맨 윗줄과 맨 오른쪽 줄에서 읽으면 $\sin(10° 2')$의 값이지만, 맨 아랫줄과 맨 왼쪽 줄에서 읽으면 $\cos(79° 58')$의 값도 됩니다.
참고로 Wolfram Alpha에서 계산하면
$$\sin(10° 2')=\cos(79° 58')=0.174221086174108040653693174590191773474982280...$$
입니다.
여기에서 수수께끼를 하나 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삼각함수표는 44도 60분 다음에도 있을까요? 답은 "없다"입니다. 0도부터 90도까지 1분 간격으로 여섯 가지 종류의 삼각함수 값을 모두 표로 만들었지만, 보각의 성질을 이용하면 표의 분량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책을 만드는 것 자체가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한자문화권에서 책이 분량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참고로 한자문화권에서 책을 인쇄할 때에는 목판인쇄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 페이지씩 목판을 새겨서 인쇄용 원판을 제작하는 것이죠. 할원팔선표도 그렇게 만들었을 겁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금속활자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할원팔선표는 1631년에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중국으로 간 예수회사 요한 슈렉(鄧玉函 Johann Schreck 1576-1630)과 중국의 학자 서광계(徐光啓 Xu Guangqi 1562-1633)가 처음 작업을 시작하고, 이를 아담 샬(湯若望 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 이탈리아 출신인 지아코모 로(羅雅谷 Giacomo Rho 1592-1638)가 뒤를 이어 결국 아담 샬이 주관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1644년에 西洋新法曆書라는 제목의 책에 포함되어 널리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표가 1710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673년에 페르디낭 페르비스트(南懷仁 Ferdinand Verbiest 1623-1688)이 주도하여 출판된 新法曆書(신법역서)를 조선에서 1710년에 韓構字라는 활자로 새로 찍은 것이 할원팔선표(割圓八線表) 링크에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더 선명한 버전이 있습니다.
崇禎曆書 割圓八線表 Chong zheng li shu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표는 인도에서 5세기 경에 나온 파이타마하시단타(Paitāmahasiddhānta, ca. CE 425)에 나와 있습니다. 아리야브하타(Aryabhata)가 낸 아리야브하티야(Aryabhatiya, ca. CE 510)에서 이를 정리해 놓았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Versine)
위의 그림을 참조하면 원호는 활 시위 모양이고 수평 방향 반지름은 화살 모양입니다.
아리야브하타는 '正弦정현'에 해당하는 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르다지야(ardha-jya) 또는 지야아르다(jya-ardha)라고 불렀습니다. 활시위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야(ज्या, jyā)로 간단히 말하기도 했고, 종종 jiba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지야'의 뜻은 '활시위'이고 한자로 번역한 弦(활시위), 弧(활), 矢(화살)하고도 잘 어울립니다.
Jyā, koti-jyā and utkrama-jyā
이것이 이슬람 자연철학으로 건너가서 새로 번역되지 않은 채 그냥 '지바jība (جِيبَ)'로 음차되어 적혔습니다. 12세기에 이슬람 자연철학의 저서들이 광범위하게 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중 누군가가 아랍어 '지바jība (جِيبَ)'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그만 오역이 일어났습니다. 아랍어는 jb جب와 같이 자음만을 쓰고 모음을 점으로 추가해서 표현하곤 하기 때문에 종종 모음을 다르게 발음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음차인 jb جب를 '자이브( جيب jayb)'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 뜻은 '가슴, 옷의 주름, 주머니, 만(灣)'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랍어 '자이브( جيب jayb)'를 라틴어 sinus('가슴, 만, 곡선')로 번역했습니다. 어쩌면 크레모나 출신의 게라르도(Gherardo of Cremona, Gerardus Cremonensis c. 1114 – 1187)가 그 당사자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1145년에 알콰리즈미의 al-jabr w’al-muqabala를 Liber algebrae et almucabola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체스터 출신의 로버트(Robert of Chester)일 수도 있습니다. sinus가 영어로 번역될 때 sine이 되었습니다. 독일어나 프랑스어로는 여전히 Sinus가 사용됩니다. 스페인어로는 seno(세노)라서 스페인어로 된 수학책에서는 $\sin(x)$ 대신 $\mbox{sen}(x)$라 씁니다.
위의 그림을 참조하면 수직 방향의 현의 길이를 sinus rectus라 하고 수평 방향의 화살에 해당하는 부분의 길이를 각각 sinus residae와 sinus versus로 불렀던 것이 납득이 갑니다.
나중에 sinus rectus는 그냥 sinus가 되었고, sinus residae를 co-sinus라 불렀습니다. sinus versus는 나중에 versin이라는 약칭을 얻었습니다.
프랑스의 비에트(François Viète 1540-1603)가 sinus residae라 부른 것에 co-sinus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던 영국의 에드먼드 건터(Edmund Gunter 1581-1626)가 sin이라는 약칭을 도입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설은 덴마크의 토마스 핀케(Thomas Fincke 1561-1656)가 Sin.과 같이 마침표가 있는 기호를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림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Versine)
위의 그림에서 반지름 1인 원에 접하는 직선EF를 빗면으로 하는 직각삼각형 OEF를 생각할 때, 길이 AE를 umbra recta라 하고, 길이 AF를 umbra versa라 불렸습니다. 움브라(umbra)는 그림자라는 뜻이고 sinus rectus (똑바른 활시위)와 sinus versus(옆으로 누운 활시위)의 경우처럼 '똑바른 그림자'와 '옆으로 누운 그림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토마스 핀케는 접선이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접하여 만난다'는 의미의 tangere를 써서 umbra recta 대신 tangens라는 용어를 제안했습니다. 에드먼드 건터는 umbra versa 대신 cotanges라는 용어를 제안했습니다.
독일어는 지금도 여전히 라틴어와 똑같이 Sinus(지누스), Kosinus(코지누스), Tangens(탄겐스)를 쓰고 있고, 프랑스어는 sinus(시뉘), cosinus(코지뉘), tangent(탕장)을 씁니다. 스페인어는 seno(세노), coseno(코세노), tangente(탄헨테)를 씁니다. 그럼 중국어로는 어떻게 될까요? 예, 맞습니다. 正弦函数, 余弦函数, 正切函数로 씁니다. 덧붙여 余切函数, 正割函数, 余割函数도 있습니다.
(جيب , 삼각함수의 한문 이름과 어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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