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함수와 (시)공간에 대한 실체론-관계론 논쟁
거리함수는 영어로 metric이라 부릅니다. 미국어에서 사전적인 의미는 "미터법을 따르는"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피트나 파운드 같은 오래된 단위를 사용하기 때문에 국제표준이 된 미터법이 낯설기 때문에 특히 과학책이나 공학 관련 책에서 전체적으로 미터법을 쓴다면 아예 책 표지에 metric이라고 명시하는 게 흔합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그린이 소개하는 metric은 말 그대로 거리를 나타내는 함수입니다. 실상 흔히 생각하는 함수와는 좀 다릅니다. 1차원에서는 거리함수가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2차원 평면으로 생각할 때, 각 위치 $(x, y)$에서 $g_{11}(x, y), g_{12}(x, y), g_{21}(x, y), g_{22}(x, y)$와 같이 네 개의 함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차원이라면 $3\times 3 = 9$개의 함수가 있습니다. $n$차원이라면 $n^2$개의 함수가 있는데, 그 함수들이 모두 $n$개의 독립변수에 대한 함수입니다. 차원이 커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집니다.
브라이언 그린도 포함되어 있는 끈이론에서는 시공간의 차원이 무척 큽니다. 보손 끈이론(bosonic string theory)은 26차원이고,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은 10차원, M이론은 11차원입니다.
리만이 다양체를 '다양함 또는 여러겹(Mannigfaltigkeit)'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렇게 차원이 커짐에 따라 거리함수의 독립변수도 종속변수도 더 많아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양체 개념은 미분기하학뿐 아니라 위상수학(topology)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기초개념입니다. 위상수학에서는 두 점이 이웃해 있는가 구별되는가 또는 어떤 집합이 열려 있는가 닫혀 있는가 등을 따집니다. 특히 대수적 위상수학(algebraic topology)은 여러 다양체의 성질을 탐구하는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공간 나아가 시공간이 물질과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인가, 아니면 물체들 사이의 관계인가 하는 논쟁은 라이프니츠-클라크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새뮤얼 클라크가 뉴턴의 제자였으므로 이 논쟁을 라이프니츠-뉴턴 논쟁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시간을 빼고 공간을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클라크와 뉴턴의 주장은 공간이라는 것이 원래 있고 그 공간 안에 물체들이 놓여 있는 것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물체들을 모두 빼 버리고 나면 과연 공간이라는 것이 실체로 존재하겠는가 하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구별할 수 없는 것은 동일하다는 원리와 모든 것은 다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리를 동원하여 공간이 실체가 아니라 물체들 사이의 관계임을 멋지게 논증합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시)공간에 대한 실체론-관계론 논쟁은 사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자연철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브라이언 그린은 물리학자로서 시공간 철학에서 소위 '다양체 실체론(manifold substantivalism)'이라 부르는 것을 옹호합니다. 여하간 수학적으로 볼 때 시공간은 4차원 다양체에 대한 거리함수로 나타낼 수 있으며, 그러한 다양체는 물체(물질)와 무관하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여하간 4차원 시공간이 실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다양체 실체론도 철학에서는 다시 반론이 나옵니다. 이 시공간 철학 이야기도 무궁무진합니다.
실체론-관계론 논쟁에 대해 비교적 쉽게 쓴 입문적인 논문으로 Shamik Dasgupta (2015) Substantivalism vs Relationalism About Space in Classical Physics. Philosophy Compass.10(9): 601-624 [https://doi.org/10.1111/phc3.12219]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한번 구경해 보셔도 좋을 듯 해서 논문의 pdf 파일을 첨부해 놓았습니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연철학 강의 공부모임>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811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811 |
공지사항 |
3기 새 자연철학 세미나 상세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875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875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5)
neomay33
|
2023.04.20
|
추천 3
|
조회 13432
|
neomay33 | 2023.04.20 | 3 | 13432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6229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6229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12969
|
시인처럼 | 2022.03.07 | 0 | 12969 |
687 |
New [질문/토론] 온도가 크게 올라가면, U≦TS가 되어 F<0이 되는 경우가 있나요?
자연사랑
|
2025.04.18
|
추천 1
|
조회 18
|
자연사랑 | 2025.04.18 | 1 | 18 |
686 |
[나의 질문] 최우석 - '선택의 여지' 그리고 '앎과 실재' (2)
시인처럼
|
2025.04.14
|
추천 0
|
조회 45
|
시인처럼 | 2025.04.14 | 0 | 45 |
685 |
[질문/토론] 대상 물체의 현재 온도가 낮을수록 △S의 값이 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자연사랑
|
2025.04.14
|
추천 1
|
조회 48
|
자연사랑 | 2025.04.14 | 1 | 48 |
684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와 범심론 (9)
유동나무
|
2025.03.30
|
추천 2
|
조회 168
|
유동나무 | 2025.03.30 | 2 | 168 |
683 |
[질문] 앎의 세 모드(역학 모드, 서술 모드, 의식 모드)와 포퍼의 세 세계
자연사랑
|
2025.03.24
|
추천 0
|
조회 151
|
자연사랑 | 2025.03.24 | 0 | 151 |
682 |
[질문]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가요? (1)
자연사랑
|
2025.03.13
|
추천 0
|
조회 207
|
자연사랑 | 2025.03.13 | 0 | 207 |
681 |
[자료] 물리법칙과 '나'라는 문제
자연사랑
|
2025.03.12
|
추천 1
|
조회 216
|
자연사랑 | 2025.03.12 | 1 | 216 |
680 |
[자료] 자유에너지 경관과 준안정상태의 변화
자연사랑
|
2025.02.22
|
추천 1
|
조회 205
|
자연사랑 | 2025.02.22 | 1 | 205 |
679 |
[자료] 우주의 역사와 운명 (1)
자연사랑
|
2025.01.28
|
추천 1
|
조회 325
|
자연사랑 | 2025.01.28 | 1 | 325 |
678 |
[자료] 우주와 물질 - 개요 (4)
자연사랑
|
2025.01.27
|
추천 1
|
조회 337
|
자연사랑 | 2025.01.27 | 1 | 337 |
실체론-관계론 논쟁을 지난 2019년 12월에 올린 글("자연철학 강의 심학십도 제3도와 시간-공간의 관계론-실체론 논쟁")에서 살짝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셔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https://bit.ly/3Tx4aP7
제가 올린 ‘우주의 구조’ 주석의 내용 전반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수학적인 개념인 다양체로 정의되는 4차원 시공간이 왜 추상적 개념에 그치지 않고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는 논리적 개연성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학적 개념으로서 물체와 independent하게 정의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개념이라고 해서 꼭 실체가 있다는 의미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폰에서 로그인이 안되어 또 작성자명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네요 ㅜㅜ
저도 Stella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그린은 인용하신 3장 각주 23(p. 499)에서 "By "spacetime" I always mean a manifold together with a metric that solves the Einstein equations, and so the conclusion we've reached, in mathematical language, is that metrical spacetime is a something."라고 말합니다. 그린은 '시공간'을 다름 아니라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충족시키는 거리함수가 있는 다양체 $(\mathcal{M}, g)$로 정의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대중적인 저서 <특수 및 일반 상대성 이론>의 부록에서 "시공간은 물리적 실재인 실제의 물체들과 독립하여 별도의 존재를 할당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꼭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체는 '공간 안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 '빈 공간'이란 개념은 의미를 잃어버린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적 형식 이론으로서 일반상대성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이 있고, 이 방정식을 충족시키는 풀이로서의 거리함수가 있고, 그런 거리함수를 갖추고 있는 다양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물체와 무관하게 말이죠. 따라서 다양체 실체론의 주장은 수학적 실재론과 유사한 주장을 하게 됩니다.
막스 테그마크는 아예 그런 수학적 구조야말로 우주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Max Tegmark (2014) Our Mathematical Universe: My Quest for the Ultimate Nature of Reality.
김낙우 옮김 (2017).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 - 우주의 궁극적 실체를 찾아가는 수학적 여정. 동아시아
(http://aladin.kr/p/eoU4w" target="_blank" rel="noopener">http://aladin.kr/p/eoU4w)
저도 다양체 실체론이 아주 매력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다양체 관계론쪽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사실 아인슈타인이 다른 방식으로 말한 부분도 본문에 나오기에 주석의 내용이 더 헷갈렸습니다. 설명해주신 걸 듣고 나니…이제 좀 정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 많은 걸 다 읽으시고 아시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