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세 층위의 문제: 개념사적 비교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 강의에서 9장 “앎이란 무엇인가?”는 인식 전반에 대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해명을 꾀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앎의 주체 조직에 외부 정보 $\alpha$가 가해질 때, 조직의 변별 구조 $\Gamma_{\alpha\beta}$에 의해 특정되는 반응 $\beta$가 나타난다고 하면, $\Gamma_{\alpha\beta}$를 $\alpha$와 $\beta$를 연결하는 서술내용이라 한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이러한 앎의 주체는 물리적 실체를 가지게 되며, 이 물리적 실체를 보는 관점은 역학적 서술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조직의 구성체로 보는 관점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이것이 (제3의 주체에 의한) 역학적 서술의 대상으로 간주될 때, 이것이 역학 모드(mechanical mode)에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 조직을 이루어 정보와 반응 관계를 연결하는 기구로 간주될 때, 이것이 서술 모드(descriptive mode)에 있다고 말한다.”(<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457-458쪽)
이는 기존의 양자역학 서울해석에서 ‘상태서술’과 ‘사건서술’을 구분함으로써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싼 많은 난점들을 해결하거나 해소한 것을 더 일반적인 개념과 용어로 다시 논의한 것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앎의 과정에 대한 해명은 이와 같은 양자역학의 해석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마음 또는 의식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학 모드와 서술 모드에 대한 더 근본적이고 자성적인 이해로서 ‘의식 모드’가 추가로 도입되어야 한다.
“이미 의식의 주체가 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정보적 진행의 최소한 일부만이라도 의식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앎의 주체인 ‘나’는 앎에 대한 의식의 주체도 된다는 선언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한다면 앎의 주체는 ‘역학 모드’와 ‘서술 모드’ 이외에 또 하나의 존재론적 모드로 ‘의식 모드’에 놓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462쪽)
그런데 이와 같이 세 층위로 나눈 ‘모드’에 대해 일반적인 독자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세 ‘모드’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하필 세 층위인가? 흔히 이야기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구별은 이 ‘모드’와 어떤 관계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더 포괄적인 개념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 역학 모드 / (B) 서술 모드 / (C) 의식 모드
이와 관련하여 사회적 현상에 대한 과학기술학의 접근을 참고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현상을 다음과 같은 세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다. 데이빗 벨(Bell 2001)은 사이버문화의 서술을 material stories, symbolic stories, experiential stories로 나누어 논의했으며, 캐서린 헤일즈(Hayles 1999)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를
(A) 물질적 층위 (what it is) / (B) 의미론적 층위 (what it means) / (C) 실제적 층위 (what it does)
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이는 이전의 스탠리 아로노위츠(Aronowitz 1996)가 테크노사이언스와 사이버문화를 다루면서 세 층위를 구별한 것과 이어진다.
(A) 존재론(ontology), (B) 현상론(phenomenology), (C) 의미론(semantics)
벨(Bell 2001)의 세 층위는
(A) 물질적 층 또는 물질적 이야기 / (B) 기호적 층 또는 기호적 이야기 / (C) 경험적 층 또는 경험적 이야기
이다. 데이빗 벨이 이렇게 세 층위(stories)를 구분하는 것은 사이버문화의 연구를 구획하는 원론적인 분류학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해당한다.
물질적 층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즉 정말로 존재하는 세상의 틀(매트릭스)과 같은 것으로서 사이버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기반이다.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조직이 될 수도 있고, 마이크로칩과 같은 과학기술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디지털시대에서 두드러지는 물질적 층은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컴퓨터는 곧 0과 1의 이진법적 환원을 상징하는 것이며, 인터넷은 이러한 환원을 지구적인 현상으로 끌어올리는 토대가 된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물질적 층, 여기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비롯한 마이크로전자공학 내지 더 현대적인 나노기술이 없다면 애초에 디지털 융합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디지털 융합을 기술적 융합으로 축소하는 관점이 지니는 위험성이다.
기호적 층은 물질적 층 위에 놓인 이야기하기이다. 벨이 말하는 기호적 층 또는 기호적 이야기는 사이버공간의 재현을 중심으로 한다. 즉 대중문화 속의 사이버공간이 어떻게 생산되고 순환하며 소비되는지 등이 바로 기호적 이야기 또는 기호적 층이 된다. 따라서 벨에게 기호적 층은 대체로 사이버펑크 소설이 중심적인 대상이 되며, 이는 기호적 사이버공간을 구성하는 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르가 된다.
경험적 층은 물질적 층이나 기호적 층과 구분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제시된다.
벨의 이러한 층위 구분은 게임연구자인 오르세트(Aarseth 2003)가 나누는 세 층위와 통한다.
(A) 채널 / (B) 응용 / (C) 담론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검토해볼만한 접근이 Fagerjord & Storsul (2007), Frau-Meigs (2007), Liestøl (2007)이다.
Fagerjord, A. & Storsul, T., “Questioning convergence”, pp. 19-31.
Frau-Meigs, D. “Convergence, internet governance and cultural diversity”, pp. 33-53.
Liestøl, G. “The dynamics of convergence & divergence in digital domains”, pp. 165-178.
구나르 리스퇼(Gunnar Liestøl)의 “디지털 영역에서 융합과 발산의 동적 원리”(Liestøl 1996)는 “디지털 미디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세 층위에서 논의해야 함을 주장한다. 리스퇼이 제안하는 세 층위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A) 하드웨어의 층: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물질적 및 물리적 하부구조
(B) 소프트웨어의 층: 코드화된 명령들,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을 정의하는 프로토콜
(C) 의미웨어(meaningware)의 층: 개별적인 메시지와 의미, 글, 이미지, 소리, 영상으로 이루어진 내용
뉴욕 대학 법학교수인 요차이 벵클러와 창조적 공유(CC)로 널리 알려진 로렌스 레식(Benkler 2000, Lessig 2001)은 이 세 층위 또는 겹들(layers)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A) 물리적 층 / (B) 코드-논리적 층 / (C) 내용 층
벵클러는 정보환경의 수준을
(A) 물리적 하부구조(인프라)의 층, (B) 논리적 하부구조의 층, (C) 내용 층
으로 나누고, 물리적 하부구조의 층은 전선, 케이블, 라디오 주파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논리적 하부구조의 층은 곧 소프트웨어라고 규정한다. 앞에서 논의한 (Bell 2001)의 기호적 층은 단순화된 면이 있다. 이와 달리 벵클러-레식의 틀에서는 기호적 층을 다시 코드-논리적 층과 내용 층으로 구분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개념을 처음 구분한 것은 미국의 통계학자 J.W. Tukey였다. 1958년에 <미국수학월보>에 발표한 논문에서 현대의 전자계산기에서는 진공관, 트랜지스터, 전선, 테이프 등과 같은 “하드웨어”만큼이나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졌다고 하면서, 이를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해석루틴, 컴파일러 및 자동화 프로그래밍의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Today the "software" comprising the carefully planned interpretive routines, compilers, and other aspects of automative programming are at least as important to the modern electronic calculator as its "hardware" of tubes, transistors, wires, tapes and the like. (John W. Tukey, “The Teaching of Concrete Mathematics”, The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 vol. 65, no. 1 (Jan. 1958), pp 1-9. 니켓은 이보다 5년 전에 컴퓨터 자체와 구분되는 프로그램을 지칭하기 위해 이미 이 용어를 창안했다고 주장했다. Paul Niquette, Softword: Provenance for the Word "Software".)
존재론/현상론/화용론의 구분은 채널/응용/담론 내지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미웨어의 구분과는 다르다. 이는 라캉의 실재적/상상적/상징적 세계의 구분과도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키틀러의 축음기/타자기/영화는 라캉의 세 세계와 대응되거나 조화를 이룬다.
David Marr (1982) Vision
(A) Computation / (B) Algorithm / (C) Implementation
장회익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역학모드/서술모드/의식모드의 세 층위 모형은 이러한 다양한 세 층위 모형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 것이 가지는 의미와 의의는 무엇일까? 어떤 면에서 이런 세 층위는 거의 대부분의 인지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구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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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에서 보여주셨던 그 글이네요. 발제하느라 혼이 나가서 자세히 못 봤는데, 이렇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질문을 위한 메모 수준의 글이라 불친절합니다. 짬이 나는 대로 내용을 보충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