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 생명이론을 이해하는 팁 한 가지 (?)
장회익 생명이론을 대할 때 조심할 점 한 가지는 기존의 '생명 관념'을 손에 든 채로는 이 이론을 손에 들 수 없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기존의 바탕관념을 대체하는 새로운 바탕관념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의 눈을 우리 주변에서 거둬들여서 태양계나 우리 은하계를 넘어서 어딘가 모를 우주 한 복판에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자연의 기본원리에 따라서 원소가 만들어지고 이것들이 별과 떠돌이별을 이루고 나아가 이것들의 시스템까지 형성하는 가운데에 뭔가 이런 것들과 질적으로 현저하게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샅샅이 살펴본다고 가정을 하는 겁니다. 이 때 '질적으로 현저하게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고, 어떤 곳에서 어떤 조건이 있을 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죠. '2차 질서'란 기존의 질서들을 바탕으로 우연하지만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되 그 정교성에서 너무나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질서를 말하는데 우주 가운데에 기존 질서와 구분해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질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에 우리의 기존 관념을 부여한다면 '생명'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2차 질서는 필연적으로 '온생명적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장회익 생명이론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독창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알고나면 너무나도 자명하여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름을 붙일 때에 기존의 낡은 바탕관념을 일부 폐기해야 해서 다소간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사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생명'이란 개념은 이 2차 질서 전체에만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념으로 구획하여 가리키고자 하는 대상이 조건의존성이 너무나도 커서 그 특수 조건을 함께 논하지 않고는 대상을 가리키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라면 그 개념은 마땅히 대상과 특수 조건을 모두 아울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작용체'와 '보작용자'가 함께 '작용단위'를 이룬다는 ⟪과학과 메타과학⟫의 9장 논의를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이제 '생명'은 우주 가운데 매우 특수한 조건을 이루어 고도의 정교성을 이루고 유지하고 있는 특정 작용 단위를 가리키는 말로 바탕관념이 혁신됩니다. 하지만 워낙 일상어로 깊숙하게 자리잡은 용어이기도 한지라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명에는 '온생명이라는 별칭을 하나 붙여주고, 지금까지의 일상어에 가까운 생명 개념은 '낱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 낱생명 중심으로 온생명을 바라볼 때의 상황 맥락에 맞는 '보생명'이라는 새 개념도 도입하고요.
이렇게 보면 '생명', 즉 '온생명'과 '낱생명'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2차 질서 체계 전체와 그 질서 체계 안의 개별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자촉질서)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명확합니다. 따라서 온생명은 낱생명이 아니라서, 또는 낱생명과 달라서 생명이 아닌 게 아니냐는 의문은 일종의 비문이 됩니다. 기존 바탕관념 체계에서는 몰라도 새 생명 바탕관념 체계에서는 그렇습니다.
한편 자촉질서는 아주 다양한 양태로 전개될 수 있을테니 논의를 더 풍부하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자연철학 강의⟫ 7장에 나온 가장 간단한 자촉질서 모형은 두 줄로 이루어진 구성물이라 그야말로 자촉질서 A가 자유에너지 흐름과 구성 물질을 포함한 바탕질서 안에 있다면 바로 또 다른 A가 생겨나는 데 촉매가 됩니다. 하지만 한 줄로 이루어진 구성물 d가 있고 이것이 거울상에 해당하는 b가 생겨나는 데 촉매 역할을 한다면 d → b → d 식의 격세 자체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구체적인 구현태는 어떤 구성체로부터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시스템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암수가 함께 유사자체촉매 기능을 발휘하는 우리가 하는 동식물까지 아주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2차 질서 체계 전체는 당연히 자촉질서가 아니지만 고도화된 온생명은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와 무관하게 또 하나의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온생명을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는 그 온생명 또한 자체촉매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겠죠. 물론 새 온생명의 바탕질서까지 만들어낼 수는 없을테니 기존의 질서를 활용해서 그렇게 하겠지만요.
장회익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자기 관념 체계 안에서 활용할 포스트잇과 같은 태그를 하나 마련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일단 어지러운 여러 관념들 가운데에 발상의 기반 역할을 하는 바탕관념들을 찾아 태그를 붙여야 하겠고요, 그 다음에 낡은 바탕관념과 새 바탕관념 역시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어야 할 겁니다. 해서 바탕관념 교체 작업을 할 때 교체 대상이 은근슬쩍 묻어들어오지 않나 늘 주의깊게 보아야 헷갈리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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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촉매반응 또는 자가촉매반응을 통해 국소질서가 생겨나는 것은 생화학적 상황에서 비교적 흔하게 발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벨루소프-자보친스키 반응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elousov%E2%80%93Zhabotinsky_reaction" target="_blank" rel="noopener">Belousov–Zhabotinsky (BZ) reaction
브롬산칼륨($\rm{K Br O}_3$), 말론산($\rm{CH}_2 (\rm{COOH})_2$), 황화망간($\rm{Mn S O}_4$)의 혼합물을 묽은 황산($\rm{H}_2 \rm{SO}_4$)을 용매로 하여 용액을 만들어 가열하면,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벨루소프는 1951년 무렵 세포호흡에서 가장 핵심적인 반응인 크렙스 회로(TCA)와 비슷한 반응회로를 무기물로 만들어 보려던 과정에서 이 반응을 발견했습니다. 이 반응은 평형상태에서 매우 먼 상태에서도 스스로 짜인(자기조직화한) 패턴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인 것이어서 생명 현상을 생화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물론 벨루소프-자보친스키 반응은 상당히 인위적이어서 이를 통해 생명현상을 이해한다는 서술이 과장된 것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례로 자주 거론됩니다.
세포호흡의 핵심 반응인 크렙스 회로(https://en.wikipedia.org/wiki/Citric_acid_cycle" target="_blank" rel="noopener">Krebs cycle, TCA)는 아래의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생화학반응인 해당과정(解糖過程, https://en.wikipedia.org/wiki/Glycolysis" target="_blank" rel="noopener">Glycolysis)는 포도당을 분해하여 피루브산을 만드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PFK(Phosphofructokinase)라는 이름의 효소가 자체촉매로 개입합니다.
그래서 해당과정이 자체촉매 반응의 좋은 예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상세하게 분석하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어서 아직도 단순화된 모형을 연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