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심학제5도와 결정론과 일리야 프리고진
1996년에 출간된 일리야 프리고진(Ilya Romanovich Prigogine 1917-2003)의 저서 [확실성의 종말: 시간, 혼돈, 자연법칙 (La Fin des certitudes)]은 매우 파급력이 컸습니다. 뉴턴역학으로 대변되는 가역성과 결정론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Ilya Prigogine (1996). La fin des certitudes. Temps, chaos et les lois de la nature, Paris, Odile Jacob. (https://fr.wikipedia.org/wiki/La_Fin_des_certitudes)
이듬해에 이 책의 영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모두 이자벨 스텡어스(스탕게르스)의 역할이 컸는데, 스텡어스가 겸손하게 공저자로 이름이 올라가길 사양했다는 말이 저자의 글에 있습니다.]
Ilya Prigogine (1997). The End of Certainty: Time, Chaos, and the New Laws of Nature. Free Press. (https://amzn.to/3MrfRCZ)
같은 해에 한국어판 [확실성의 종말]도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프리고진은 뉴턴역학이 세 가지 방향에서 모두 부정되거나 확장되었음을 내세웁니다. 먼저 상대성이론 특히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양자역학(양자이론)에서 소위 '파동함수'의 도입을 통해 뉴턴역학이 확장되었다고 하면서 양자역학의 측정 문제를 비롯한 세밀한 개념적 문제를 상세하게 논의합니다. 그런데 프리고진의 강조점은 세 번째 확장 즉 비가역 과정에 대한 열역학 특히 혼돈이론(카오스이론)이라 부르는 비선형동역학에 있습니다.
우연찮게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장과 심학제2도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 고전역학의 자연철학이 바로 심학제3도의 상대론적 자연철학과 심학제4도의 양자역학적 자연철학, 그리고 심학제5도의 열통계역학적 자연철학으로 확장되는 것과 모양새가 같습니다. 물리철학 또는 물리학의 철학에서는 바로 이 세 가지 물리학 이론, 즉 상대성이론, 양자이론, 열통계역학이 전체적인 논의의 기본을 이룹니다.
비가역과정의 열역학에 대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프리고진답게 이 세 기본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열통계역학입니다. 특히 비가역과정 및 비평형열역학이 심학제2도에서 묘사된 결정론적 자연철학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넘어서는가 하는 점을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에피쿠로스(Ἐπίκουρος 341-270 BCE)의 '클리나멘(비껴남)'이라는 개념을 되새깁니다.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99-55 BCE)의 [사물본성론 De Rerum Natura]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물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이고 있을 때,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의 장소에서 자기 자리(spatium)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만 있을 정도로, 비껴났다는 것을. 하지만 만일 그들이 기울어져 가곤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아래로, 마치 빗방울처럼, 깊은 허공을 통하여 떨어질 것이고, 충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타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들에게는, 그래서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 [Lucretius, De rerum natura 2.216–224]
고대 그리스-로마의 자연철학에서는 이러한 '비껴남' 또는 '우연'이 단순히 시의 한 구절로 제시되었을 뿐이지만, 프리고진은 이 '비껴남'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확실성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프리고진이 내세우는 핵심 개념은 비가역과정에 대한 열역학적 연구에서 비롯한 스스로 짜임(자기조직화)와 흩어짐 구조(dissipative structure)입니다. 또 불안정계의 물리학으로부터 대칭성과 예측가능성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고전물리학과 달리 요동(fluctuation), 불안정(instability), 다중선택(multiple choices), 제한된 예측가능성(limited predictability)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프리고진의 독특한 사유가 혜강 최한기(1803-1979)의 자연철학과 연결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최한기는 氣에 기반을 둔 존재론적 사유를 전개했습니다. 氣가 形質(형질)과 活動(활동)의 두 측면을 지니며, 만물이 곧 氣라는 존재론적 믿음을 가지고 고유한 자신의 자연철학적 사유를 제시했습니다. [신기통(神氣通)]과 [추측록(推測錄)]을 합본한 [기측체의(氣測體義)] (1836)와 서양천문학의 핵심내용을 소개하는 [지구전요(地球典要)] (1857)와 함께 [기학(氣學)] (1857)과 [운화측험(運化測驗)] (1860)을 저술한 최한기는 1861년경에 [담천(談天)]을 통해 비로소 뉴턴의 자연철학을 접하게 됩니다. 이 책은 존 허셜(John Herschel, 1792-1871)이 저술한 Outlines of Astronomy (천문학 개요 1883)를 Alexander Wylie (1815-1887)와 리션란(李善蘭, 1811-1882)이 공역한 것입니다.
최한기가 氣輪(기륜)과 攝動(섭동)의 이론을 바탕으로 독특한 자연철학적 존재론을 제시했다고 이야기되는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과 [성기운화(星氣運化)] (1867)는 뉴턴의 자연철학을 재구성하고 비평한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최한기가 말하는 攝動(섭동)은 어쩌면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비껴남)이나 프리고진이 말하는 불안정계의 물리학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심학제6도에서 다루어지는 우주와 물질, 심학제7도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로서의 생명에 대한 논의가 모두 우연, 요동, 확률, 예측불가능성 등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이러한 관념과 통찰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소한 예로 책 끝의 찾아보기를 보면 우연, 요동, 확률, 예측불가능성이 색인어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382쪽에 일리야 프리고진에 대한 언급이 한 문장 있는데, 장회익 선생님께서 텍사스 대학에 계실 때 프리고진을 가까이에서 만나셨고 그의 열역학에 관심을 가지셨다는 내용만 있습니다. 프리고진의 비평형 열역학은 곧 흩어짐 구조(소산구조)와 스스로 짜임(자기조직화)에 대한 일반적 논의로 이어지는데, 이것이야말로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질문은 제가 보는 이런 관점이 적절한가 또는 오히려 장회익 선생님께서 이런 개념들을 강조하고 계시는데 제가 제대로 못 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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