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츠만 인수, 바닥상태와 들뜬 상태
수소원자의 예에서 양자역학으로 풀면 수소원자의 에너지는 $$ E_n = - \frac{m_e e^4}{2
(4\pi \epsilon_0)^2 \hbar^2} \frac{1}{n^2} \approx (-13.6 \mbox{eV})\frac{1}{n^2} \quad (n=1, 2, \cdots)$$로 주어짐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n=1$일 때를 바닥상태라 부르고, $n=2$일 때를 첫째 들뜬 상태라 부릅니다.
이 두 상태에 있을 확률의 비를 구한 것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도 잘 설명되어 있고, 대담에도 잘 나옵니다. $$\frac{P(E_2)}{P(E_1)} = \frac{ \exp(-\beta E_2)}{\exp (-\beta E_1)} =
e^ {-\beta (E_2 - E_1 ) } \approx e^{-40 \times (13.6 - 3.4)} = e^{-408} = 6.4 \times 10^{-178} $$
즉 수소원자의 경우 바닥상태에 있을 확률에 비해 첫째 들뜬 상태에 있을 확률은 소수점 아래 178자리까지 가야 비로소 0이 아닌 수가 나오는 매우 작은 값입니다. 쉽게 말해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수소원자는 언제나 바닥상태에 있으리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김정구 교수님의 여는 발제에서 흥미로운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상온일 때에는 $\beta = 40$ 정도라서 전자가 바닥상태에 있을 확률에 비해 첫 번째 들뜬 상태에 있을 확률이 엄청나게 작습니다. 그러면 온도가 아주 높으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태양표면 온도가 6천 켈빈 정도인데, 이를 전자볼트로 환산하면 0.517전자볼트가 됩니다. 이 온도를 위의 공식에 넣으면 $$
\frac{P(E_2)}{P(E_1)} = e^ {-\beta (E_2 - E_1 ) } \approx e^{- (13.6 - 3.4)/0.517} = e^{-19.73} \approx 2.7 \times 10^{-9}$$으로서, 여전히 전자가 바닥상태에 있을 확률이 첫째 들뜬 상태에 있을 확률보다 약 27억배 더 큽니다. 이 계산이 상식과 좀 안 맞는 느낌이 듭니다. 상온이 아니라 비교적 고온이라도 전자가 거의 대부분 바닥상태에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온도가 1백만 켈빈이라면, 그 두 확률의 비가 $$e^{-10.2/86.1743}\approx 0.89$$로서 바닥상태가 아니라 첫째 들뜬 상태에 있을 확률이 89%정도가 됩니다. 이런 온도는 매우 드물죠.
하지만 실제 지구상의 물질을 이루고 있는 전자는 독특하게도 파울리 배타규칙을 따릅니다. 전자가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자가 여러 개 있으면 같은 상태에 놓일 수가 없습니다. 전자가 하나만 있는 수소원자의 경우라면 전자가 거의 언제나 바닥상태에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전자가 여러 개라면 바닥상태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다 채워질 때까지 올라갑니다. 이를 페르미 바다 또는 페르미 준위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울리 배타규칙은 응집물질의 물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양자역학이나 통계역학이 무색할 만큼 파울리 배타규칙만으로 물성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볼츠만의 분포 규칙은 처음에 맥스웰이 초보적으로 논의했기 때문에, 맥스웰-볼츠만 분포라 부릅니다. 고전역학적인 경우는 거의 대부분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따라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으로 가면 맥스웰-볼츠만 분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위의 상황이 그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양자통계라 부르는 영역에서는 해당 입자의 종류에 따라 두 가지 새로운 확률분포를 도입하게 됩니다. 하나는 페르미-디랙 통계이고 다른 하나는 보슈-아인슈타인 통계입니다. 페르미-디랙 통계는 파울리 배타 규칙에 기반을 둔 것이고 기묘하게도 스핀이 홀수의 반(1/2, 3/2 등)일 경우에만 적용됩니다. 보슈-아인슈타인 통계는 파울리 배타 규칙을 따르지 않는데, 이 경우 입자의 스핀은 언제나 정수(0, 1, 2 등)입니다. 입자의 스핀과 통계 규칙 사이의 연결을 스핀-통계 정리라 부르는데, 파울리가 처음 언급했고 나중에 와이트만 등이 상대론적 양자마당이론을 써서 엄밀하게 증명했습니다. (Spin–statistics theorem)
그런데 여는 발제에서 제기된 질문은 전자가 하나 있는 수소원자의 경우였습니다. 여러 스펙트럼 선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전자가 더 높은 에너지 준위에 있다가 더 낮은 에너지 준위, 특히 바닥상태로 떨어지면서 에너지 차이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빛으로 방출된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기본 이론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통계역학적으로 애초에 더 높은 에너지 준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어떻게 다양한 스펙트럼이 관찰되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지만, 대략 말하면, 외부에서 오는 자극(stimulus) 또는 요동(fluctuation) 또는 섭동(perturbation)이 주된 역할을 합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요동은 미시상태의 변화와 관련되고 섭동은 거시상태의 변화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오는 자극/요동/섭동이 있다고 해서 에너지 준위를 쉽게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요건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의 자극/요동/섭동은 무시됩니다. 특별하게 요건이 딱 맞아떨어지면,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만 더 높은 에너지 준위로 훌쩍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광등이 바로 그렇게 요건을 딱 맞추어서 빛을 내는 장치입니다.
온 세상에 오직 수소원자 하나만 있고 주변에 아무런 자극/요동/섭동이 없다면 수소원자의 에너지는 언제나 최소값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매우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든 자극/요동/섭동이 있기 때문에 그런 희박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에너지 준위, 즉 들뜬 상태로 옮겨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국소질서의 출발점이며, 물질적 자연세계에서 우연이 개입하는 첫 관문이 됩니다. 또 그것이 확장되어 비로소 생명 탄생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자크 모노의 저서가 <우연과 필연>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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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이 1/40전자볼트라는 말의 설명
상온일 때 $kT=1/40 \ \mathrm{eV}$라는 것은 물리학자들은 항상 머리속에 넣어두고 있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볼츠만 상수가 $k=1.380 649\times 10^{-23}\ \mathrm{J}\cdot\mathrm{K}^{-1}$입니다. 에너지의 단위 줄(J)을 전자볼트 단위로 바꾸려면 전자의 전하량에 해당하는 값 $e=1.6\times 10^{-19}$을 나누어 주면 되기 때문에 볼츠만 상수는 대략 $k=8.6 \times 10^{-5} \ \mathrm{eV} \cdot \mathrm{K}^{-1}$가 됩니다.
상온은 대개 섭씨 15도를 가리키기 때문에 켈빈(K) 단위로 쓰면 $T = 298 \ \mathrm{K}$이 됩니다.
이 둘을 곱하면 $ kT = 8.6 \times 10^{-5} \times 298 = 2.56 \times 10^{-2} = 0.0256 \approx 1/40$을 얻습니다. 단위는 물론 전자볼트(eV)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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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세미나 녹취는 엄두도 못내고 있었는데요. 핵심을 정리해주시고 설명도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n=2 를 ‘첫째 바닥상태’라고 하신 부분은 오타가 아닐까 싶어 여쭤봅니다. 첫째 들뜬 상태를 말하시는 걸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세미나때 설명해주신 부분을 제가 놓쳐서 잘 듣지 못했는데 상온을 섭씨 15도로 계산하여 베타값이 40이 나오는 건가요? 세미나때 링크해주신 부분을 나중에 보려니 에러가 나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상온을 27도로 놓고 300K로 맞춰도 어차피 큰 차이 없이 2.48…/100인 걸 보니, 대략 2.5로 반올림하여 계산하신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오타를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1/40 전자볼트 이야기는 링크 대신 다른 곳에 있는 글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beta = \frac{1}{kT}$라서 상온에서 $\beta\approx 40$이 됩니다.
네. 그렇잖아도 책을 찾아보니 역수꼴이라서 다시 질문을 정정한 사이에 답을 주셨나 봅니다. 감사해요. ^^
이렇게 답글쓰고 보니 이제야 본문에 추가하신 걸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적어주셔서 감사해요. 다행히 제가 단위 환산해서 처음 계산한 값과 같아서 이제야 안심이 됩니다. 근사값인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뭔가 확인되지 않은 불편함이 있어서 성가시게 해드렸네요. ^^
우와~ 어쩐지 읽다 보면 조금 똑똑해질 것만 같은 해설입니다!! 나중에 자극, 요동, 섭동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분명 그렇게 할 수 없을 아주 어려운 것이겠지만... ㅠㅠ
요동(fluctuation)을 확률이론에서는 분산 또는 표준편차라 부릅니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현실에서 평균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퍼져 있는 편차가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물리적인 작용이 아니고요? 뭐가 되었건 편차에 해당하는 것을 총칭하는 것... 이렇게 보아야 하는 건가요?
요동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가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통계학자와 물리학자의 접근이 다릅니다. 또 열역학적 요동과 양자요동은 이름은 비슷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상당히 다릅니다. 열역학적 요동은 브라운 운동으로 대표되는데, 여하간 평균에서 벗어나는 것과 연관됩니다. 양자요동은 더 복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