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량의 단위와 플랑크 상수의 값
지난 번 보조세미나에서 제가 질문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엉뚱한 말씀을 드린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그래도 중요한 문제라서 여기 조금 더 설명의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흔히 양자역학을 다루는 책에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주장과 통찰이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맞공간' 영어로 하면 reciprocal space의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공간'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이것은 수학적 공간이란 의미가 더 강합니다. 영어로 reciprocal은 '상호적, 호혜적'이란 뜻도 있지만 수학에서는 '역수'를 의미합니다. 즉 $n$의 역수는 $\frac{1}{n}$입니다. 그래서 '맞공간'보다 '역공간(逆空間)'이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역(逆)'은 거스른다거나 뒤집어진다는 뉘앙스가 있어서, 오히려 보통의 공간과 맞선다는 느낌의 용어를 도입하신 것 같습니다.
그 핵심은 푸리에 변환에 도입되는 $$e^{i k x}$$ 또는 $$e^{ i (kx - \omega t)}$$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오일러의 공식을 쓰면 이것은 $$e^{i k x} = \cos (kx) + i \sin(kx)$$와 같이 삼각함수로 표현됩니다. 삼각함수라는 게 원래 삼각형의 세 변의 비로 정의됩니다. 비(比, ratio)라는 것은 곧 분수로 표현되는 양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비'가 되려면, 분모와 분자의 수가 같은 성격의 것이어야 합니다.
사다리의 기울기를 탄젠트 함수로 쓸 수 있다는 말의 기본 전제는 높이와 밑변이 동등한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허수시간을 도입하여 속도를 탄제트 함수로 쓸 수 있으려면 높이를 나타내는 길이와 밑변을 나타내는 확장된 시간이 동등한 성격을 지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x_4 = i c t$라는 양이 공간 $x_1$, $x_2$, $x_3$과 대등하다고 하고 시간과 공간을 합하여 4차원 시공간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삼각함수에서 출력 부분이 거리의 비라면 입력 부분은 각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각이라기보다는 반지름이 1인 원의 원호의 길이가 입력 부분이지만, 그 반지름 1인 원(단위원)의 원호의 길이를 바로 각(角 angle)이라 부릅니다.
이제 흔히 말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가정하고 있는 것을 하나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각이라는 것의 단위가 무엇일까요? 가령 속도는 길이를 시간으로 나눈 값입니다.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를 곱한 값입니다. 하지만 각은 사실상 단위가 없습니다. 흔히 '도(度)'라는 말을 써서 단위원 전체가 되면 360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직각은 90도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각의 단위는 영어로 degree이고 $\deg$ 또는 ${}^\circ$이라는 기호로 나타냅니다. 동아시아 천문학과 수학에서는 한 바퀴가 되는 각을 365도 1/4으로 정했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1년의 길이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각이 도입된 이유가 천문학적인 예측과 계산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과 유럽의 360$^{\circ}$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과 수학이 쐐기문자를 이용한 60진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360이란 수가 가장 약수가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각이라는 것이 곰곰 생각해보면 금방 알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714년에 영국의 수학자 로버트 코츠(Robert Cotes)가 '라디안(radian)'이라는 새로운 각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습니다. 이름 자체는 19세기에 가서야 도입되었습니다. 이것은 부채꼴 모양에서 원호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나눈 값을 각으로 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원의 반지름을 1로 선택하면 그런 원(단위원)의 원호가 길이가 곧 각과 같습니다. 이 단위원의 원호의 길이를 '라디안'이라 하고 rad로 약칭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Radian
원주율 $\pi$로 나타내면 반지름이 1인 원의 원호 전체는 $2\pi$이므로 $$360^{\circ} = 2 \pi \ \mathrm{rad}$$입니다. 이미 비(比)이기 때문에 라디안은 본질적으로 단위가 없는 양입니다. 이를 흔히 차원 없는 양(dimensionless quantity)이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차원'은 시공간의 차원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냥 단위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래서 결국 푸리에 변환에 등장하는 $kx$나 $\omega t$는 단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x$와 $t$가 이미 각각 '미터(meter $\mathrm{m}$)'나 '초(秒 second $\mathrm{s}$)'와 같은 단위를 갖고 있으니까, $k$나 $\omega$의 단위는 그런 단위의 '역수'라고 해도 됩니다. 즉 $k$의 단위는 $\mathrm{m}^{-1}$이고, $\omega$의 단위는 $\mathrm{s}^{-1}$입니다. 여기에서 $k$나 $\omega$는 그 자체로는 물리적 의미를 갖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새 공리 중 [공리 2]에 따르면, $k$와 $\omega$는플랑크 상수 $\hbar$를 통해 각각 운동량와 에너지로 연결됩니다. 즉 $$p=\hbar k , \quad E=\hbar \omega$$와 같습니다. 운동량은 단위가 $\mathrm{kg}\cdot\mathrm{m}\cdot \mathrm{s}^{-1}$이고, 에너지의 단위는 $\mathrm{kg}\cdot\mathrm{m}^2 \cdot \mathrm{s}^{-2}$입니다. 이것은 고전역학에서 $$p=mv , \quad E = \frac{1}{2} mv^2$$임을 상기하면 쉽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위의 관계 즉 맞공간의 관계로부터 $$\mathrm{kg}\cdot\mathrm{m}\cdot\mathrm{s}^{-1} = [\hbar] \cdot \mathrm{m}^{-1}$$ 또는 $$\mathrm{kg}\cdot\mathrm{m}^2\cdot\mathrm{s}^{-2}= [\hbar] \cdot \mathrm{s}^{-1}$$가 됩니다.
두 식 모두 $$[\hbar] = \mathrm{kg}\cdot\mathrm{m}^2\cdot \mathrm{s}^{-1}$$를 의미합니다. 즉 플랑크 상수의 단위가 이렇게 주어집니다. 이를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mathrm{J} \mathrm{s} = \mathrm{J}\cdot \mathrm{Hz}^{-1}$과 같습니다.
2019년에 플랑크 상수의 값을 으로 고정하기로 국제 도량형 위원회가 결정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lanck_constant
이렇게 복잡해 보이며 아주 작은 숫자로 나타나는 것은 지구상에서 인류가 역사적으로 킬로그램, 미터, 초 같은 단위를 써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관념을 맨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면 길이, 시간, 질량의 단위를 거기에 맞추어서 정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hbar=1$이 되게끔 길이와 시간과 질량의 단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광속도 마찬가지입니다. $$[c] = \mathrm{m}\cdot \mathrm{s}^{-1}$$에서 $c=1$이 되게끔 길이와 시간의 단위를 선택한다면, 가령 길이를 초 단위로 잴 수 있습니다. 초와 미터를 쓰는 단위계에서는 $c=2\ 9979\ 2458 \mathrm{m}\cdot\mathrm{s}^{-1}$이므로, $c=1$이 되는 단위계에서는 1초라는 길이가 곧 2억 9979만 2458미터와 같습니다.
$$[\hbar] = \mathrm{kg}\cdot\mathrm{m}^2\cdot\mathrm{s}^{-1}$$에서 $\hbar=1$이 되는 단위계를 선택하면, $$\mathrm{kg} = \mathrm{m}^{-2}\cdot\mathrm{s}$$이므로 킬로그램을 미터와 초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만일 $\hbar=1$이면서 덧붙여 $c=1$이 되는 단위계를 선택하면, 킬로그램을 초로 바꿔쓸 수도 있고 미터로 바꿔쓸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양자역학을 푸리에 변환을 통해 이해하는 새 공리체계에서는 자연스럽게 플랑크 상수가 도입되고, 또 이를 잘 활용하면 시간과 공간과 질량의 관계가 도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랑크 단위계도 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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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하여 "물리량의 단위 정의와 그 자연철학적 함의"가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볼츠만 상수의 값이 고정된다는 말"이라고 제목을 달아 두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비단 볼츠만 상수에 그치지 않고 자연철학 전체, 특히 물리학과 관련되는 부분이 모두 연관됩니다. 고전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우주론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