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4, 겹실틈 실험, 양자이론의 확률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에서 양자역학과 연관된 심학제4도의 핵심은 아래와 같은 [공리 4]에 있습니다.
공리4: '측정'에서 상태의 변화확률은 대략 말해서 "가능한 사건의 수"와 "관심을 두는 사건의 수"의 비로 정의됩니다. 이 정의는 엄밀하지 못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가장 직관적인 것은 동전 던지기와 같은 시행을 반복하여 수를 세는 것입니다. 독일의 수학자 리하르트 폰미제스가 이런 개념을 정리했는데, 흔히 ‘빈도주의’라 부릅니다. 여하간 확률을 계산할 때에는 똑같은 시행을 여러 번 반복하거나 똑같이 준비된 대상을 여러 개 써서 한꺼번에 시행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지금의 시행과 나중의 시행이 독립적이라고 놓아야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속된 여러 시행들이 모두 별개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상태 $$\Psi = \sum_{i} c_i \phi_i$$에 있을 때, 지점 $j$에 해당하는 위치에 '측정장치'를 놓아 대상과 접촉시키면
(1) 확률 $|c_j |^2$으로 '측정장치'에 흔적을 남기고 대상은 $$\Psi'=\phi_j$$로 전환되거나
(2) 확률 $1-|c_j |^2$으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phi_j$가 빠진 새로운 상태 $$\Psi'' = \sum_{i\not=j} c'_i \phi_i$$로 전환된다.
지금 상황은 확률 계산의 상황과 많이 다릅니다. 이것은 확률이론에서 조건부 확률이라 부르는 것과 연관됩니다.
쉬운 예로 범죄현장에서 범인을 추리하는 셜록 홈즈의 사고과정을 생각해 봅니다. 우선 선택지 $A_1$, $A_2$, $\cdots$, $A_n$이 있다고 해 보죠. 선택지라고 하면 아무래도 추상적이니까, 이 목록을 용의자들의 알리바이 같은 것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 선택지가 모두 같지는 않을 터이므로 $$A_1, A_2, \cdots, A_n$$ $$p_1, p_2, \cdots, p_n$$과 같이 각 선택지(용의자의 알리바이)에 확률을 대응시킬 수 있습니다.
그 중 $A_k$가 맞는지 확인해 봅니다. 만일 $A_k$가 맞다면 상황은 끝나버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단 그 선택지(용의자)는 제외하고 나머지로 새로 확률을 배당합니다. $$A_1, A_2, \cdots, A_n$$ $$p'_1, p'_2, \cdots, p'_n$$ 이 목록에서 $A_k$는 빠져 있습니다. 이 새로운 상황에서 확률들의 분포는 당연히 달라집니다.
조건부 확률은 $P(B|A_k)$라는 기호로 나타내는데, 사건 $A_k$가 일어났다고 할 때 그 다음으로 사건 $B$가 일어날 확률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사건 $A_k$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때 사건 $B$가 일어날 확률을 $P(B|\neg A_k)$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neg$는 논리적 부정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P(B)\not = P(B|A_k)$이며 또 $P(B) \not = P(B|\neg A_k)$입니다. 즉 조건부 확률의 이전 단계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아닌가에 따라 나중 단계에서의 확률 분포는 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해 짧게 언급하자면, 장회익 선생님은 '측정'이나 '관측'이란 용어를 굳이 피하고 대신 대상과 변별자가 '만난다' 즉 '조우한다'는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위의 재서술에서는 변별자라는 용어 대신 주류의 용어인 '측정장치'라고 썼습니다. 여하간 그런 조우가 없다면 (또는 코펜하겐 해석 등에서 말하는 것처럼 측정이나 관측이 없다면) 당연히 확률분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확률분포가 달라지는 것은 대상과 변별체가 만날 때입니다. '빈-사건'이란 개념은 대상과 변별체가 만나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아예 애초에 만남이 없다면 '빈-사건'도 없습니다. 만남이 있은 뒤에 '사건'이나 '빈-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위의 탐정 추리에서 용의자 한 명을 제외하는 것이 곧 '빈-사건'입니다. 겹실틈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목하는 것이 겹실틈 즉 실틈이 두 개 있는 상황이다 보니, 애초에 출발점 상에서 하나의 실틈이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전자 총이 있더라도 정확하게 그 실틈 하나를 통과시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전자 총에서 전자가 하나씩 발사될 때 그 살짝 열린 실틈으로 지나가는 것도 있지만 꽤 많은 수는 실틈 옆에 있는 가림막으로 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가림막에 부딪치는 전자가 바로 '빈-사건'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두 개의 실틈, 즉 겹실틈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세 가지입니다. (1) 1번 실틈을 지나는 것 (2) 2번 실틈을 지나는 것 (3) 두 실틈 모두 지나지 않는 것. 이 중 (3)이 바로 '빈-사건'입니다.
이 겹실틈에 도달하기 전에는 전자 총에서 나온 전자가 모든 위치에 다 갈 수 있지만, 겹실틈 이후에는 '빈-사건'에 해당하는 것 즉 (3)은 제외하고, (1)과 (2)만 고려하자는 것이 바로 "공리 4"의 핵심입니다.
첨부한 그림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림 출처: Feynman Lectures on Physics)
화학 분야에서 '전자구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양자물리학의 핵심을 흐려버리는 전형적인 오개념입니다. 과학교육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도 이 '전자구름'이라는 표현과 개념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겹실틈 실험에서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해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위에 인용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 나오는 그림 1-3의 맨 끝에 있는 (c)에 $P_{12}=|\phi_1 + \phi_2 |^2$이라 쓰여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스크린의 알록달록한 무늬를 말해 줍니다. (이를 흔히 '간섭무늬'라고 부르지만, 간섭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므로 그 이름은 정확하지 않고 오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그림은 제가 지난 번 세미나에서 여는 발제에 사용한 슬라이드의 일부입니다. 수식이 복잡해 보입니다만, 핵심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psi(x, 0)$은 첫 실틈을 지날 때의 상태함수입니다. 다른 변별체를 만나지 않은 채 오른쪽으로 이동한다면 시간이 흐르므로 넷째 줄에 있는 $\psi(x, t)$와 같이 됩니다. 오른쪽으로 $y$만큼 움직인 뒤를 생각하면, 위의 시간 $t$ 대신 $y/v$를 대입하면 됩니다. 다섯째 줄은 두 실틈을 지난 뒤의 상태함수를 더한 것입니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의 표현을 빌면 $\phi_1 + \phi_2 $입니다.
즉 이 슬라이드의 다섯 번째 줄에 있는 식이 $\phi_1 + \phi_2$를 계산한 것입니다. 곧이곧대로 두 함수를 더한 것에 불과합니다. 선형대수나 힐버트 공간이나 그런 고급수학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상태함수를 계산하여 두 개를 더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이 상태함수의 절대값 제곱을 한 것이 확률인데, 이를 Mathmatica처럼 그래프를 그려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그린 것이 아래 그림 왼쪽에 있는 파란색 그림입니다. 그 오른쪽에는 1989년의 유명한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전자구름이니 입자-파동 이중성이니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212쪽에 있는 것처럼, 상태함수를 계산하고 그 절대값 제곱이 확률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첨부한 그림 두 개에서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방법으로 계산한 상태함수 $\psi(x, y)$는 장회익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사건을 일으킬 성향입니다. 이 성향이 들쭉날쭉한 모습으로 계산됩니다. 이제 이 상태함수로부터 확률을 계산해서 그려 보면 바로 위의 파란색 그림처럼 됩니다. 여기에서 노란색으로 된 부분이 '사건'을 일으킬 성향이 높은 지역이고 파란색으로 된 부분이 그런 성향이 낮은 지역입니다.
이제 이렇게 계산으로 알아낸 '사건 야기 성향'이 정말 맞는지 실험으로 직접 확인해 봅니다. 1989년에 발표된 히다치 그룹의 토노무라 등의 논문이 바로 그 실험의 결과입니다. 전자를 하나씩 쏘았기 때문에 명백하게 '간섭'은 없습니다. '간섭'은 물결처럼 한꺼번에 두 실틈을 지날 때에만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간섭'은 없어도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계산방법으로 계산한 '사건야기성향'은 들쭉날쭉 알록다록입니다. 그리고 실험은 그 둘쭉날쭉 알록달록을 명료하게 확인해 줍니다.
(T.L. Dimitrova and A. Weis, “The Wave-Particle Duality of Light: A Demonstration Experiment,”
American Journal of Physics 76 (2008), pp. 137–142. http://aapt.scitation.org/doi/abs/10.1119/1.2815364 )
여기에는 관찰자가 파속을 붕괴시킨다느니, 세계가 무한히 갈라져서 무수히 많다느니, 불확정성 원리니. 상보성원리니 하는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단지 확률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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