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조지 웰즈의 시간여행기계
자료
상대성이론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2-01-06 00:09
조회
2993
1895년에 출간된 허버트 조지 웰즈(H.G. Wells 1866-1946)의 소설 <시간여행기계 The Time Machine>에는 유명하지만 덜 알려진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물체는 네 방향으로 연장되어 있어야 해. 길이, 폭, 두께 그리고 지속이지. ... 시간과 3차원 공간 사이에는 우리의 의식이 시간을 따라 흐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차이가 없지. ... 네 번째 차원은 바로 시간이야."
당혹스러운 문장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세상에 발표한 것이 1905년인데 그로부터 무려 10년 전에 이미 과학소설가 H.G. 웰즈는 상대성이론을 다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일까요?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4차원 시공간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일깨워 준 것은 1907년 헤르만 민코프스키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모두 4차원 시공간 연속체의 그림자일 뿐임을 주장한 12년 뒤 민코프스키의 생각을 이미 웰즈가 갖고 있었을까요? 그런 놀라운 생각을 웰즈가 어떻게 하게 된 걸까요?
사실 이런 식의 독해는 19세기 물리학이나 수학에 익숙하지 않을 때 흔히 가질만한 접근입니다. 1860년대부터 수학자들은 n차원에 대해 꽤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불운한 철학자/언어학자/수학자 헤르만 그라스만이 <선형 확장 이론, 수학의 새로운 분야>을 발표하면서 n차원 이야기를 처음 시작한 그 해(1844년)에 아일랜드의 수학자 윌리엄 로원 해밀턴이 사원수(quaternion)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그라스만은 ‘n개의 계단이 있는 영역(Gebiet n-ter Stufevector)[벡터 공간]’에 있는 ‘확장적인 양(extensive Größe)[벡터]’을 ‘단위들의 계(System von Einheiten)[기저]’로 나타낼 수 있다는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라스만의 지극히 혁명적이고 참신한 이론은 당시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지만 펠릭스 클라인 등이 새로운 방향으로 이 개념들을 발전시키면서 수학계에서는 흔한 이야기로 점차 확장되어 갔다.
사원수는 전통적인 데카르트 좌표계의 세 방향 외에 네 번째 방향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올리버 헤비사이드는 사원수와 전자기학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공간의 세 차원 외에 네 번째 차원이 시간이 되리라는 아이디어를 조금씩 펼쳤습니다.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는 방정식들을 잘 보고 있으면, 그리고 그것을 사원수를 써서 표현하든지 아니면 그를 성분으로 나누어 벡터성분과 스칼라 성분으로 나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이 네 번째 차원이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웰즈가 "시간이 네 번째 차원"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그라스만이나 맥스웰이나 헤비사이드를 읽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웰즈는 지금 임페리얼 칼리지의 일부가 된 과학사범학교(Normal School of Science 나중에 Royal College of Science가 됨)를 다니는 동안 Science School Journal이란 것을 만들어 계속 출간하면서 여러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발표했습니다. 이 무렵 동급생 해밀턴-고든(E. A. Hamilton-Gordon)에서 "네 번째 차원"에 대해 듣게 되었고, 또 네 번째 차원이 시간일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얻게 되었습니다.
" In the students' Debating Society -- I heard about and laid hold of the idea of a four dimensional frame for a fresh apprehension of physical phenomena..." (웰즈의 회고)
다른 기록에 따르면, 토론대회 비슷한 것이 1887년 1월 14일에 있었는데, 해밀턴-고든이 그 자리에서 네 번째 차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흥미롭게도 1880년대에는 네 번째 차원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는 말도 그 기록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찰스 하워드 힌턴(Charles Howard Hinton)이란 사람으로 연결됩니다.
1884년부터 1888년까지 힌턴은 Scientific Romances라는 제목으로 팜플렛을 발행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권이 바로 "네 번째 차원은 무엇인가?"였습니다.
C. H. Hinton, Scientific Romances No. 1. What is the Fourth Dimension (London: Swan Sonnenschein and Co., 1884).
웰즈는 1888년 "The Chronic Argonauts"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써서 Science School Journal에 실었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디어의 취재원을 모두 밝힐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힌턴이나 해밀턴-고든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언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1895년에 출간된 <시간여행기계>에서는 "Professor Simon Newcomb was expounding this to the New York Mathematical Society only a month or so ago."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사이먼 뉴컴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당시 잘 알려져 있던 미국의 천문학자였다. 뉴컴은 마이클슨의 광속 측정 실험도 함께 했고, 응용수학자로서 경제학과 통계학도 연구했습니다.
뉴컴은 1894년에 "현대의 수학적 사유"라는 제목의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4차원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Simon Newcomb, "Modern Mathematical Thought," Nature, 1894, 49: 325-329.
웰즈가 이 논문을 읽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여행의 아이디어가 뉴컴의 논문에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Bork, A. (1964). The Fourth Dimension in Nineteenth-Century Physics. Isis, 55(3), 326-338. http://www.jstor.org/stable/228574
Ethan Siegel. "When Einstein met H.G. Wells". Medium.com (Jan 14, 2015) https://bit.ly/2W870Sz.
"‘... any real body must have extension in four directions: it must have Length, Breadth, Thickness, and—Duration. But through a natural infirmity of the flesh, which I will explain to you in a moment, we incline to overlook this fact. There are really four dimensions, three which we call the three planes of Space, and a fourth, Time. There is, however, a tendency to draw an unreal distinction between the former three dimensions and the latter, because it happens that our consciousness moves intermittently in one direction along the latter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our lives.’
‘Really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Fourth Dimension, though some people who talk about the Fourth Dimension do not know they mean it. It is only another way of looking at Tim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ime and any of the three dimensions of space except that our consciousness moves along it. But some foolish people have got hold of the wrong side of that idea. You have all heard what they have to say about this Fourth Dimension?’
‘It is simply this. That Space, as our mathematicians have it, is spoken of as having three dimensions, which one may call Length, Breadth, and Thickness, and is always definable by reference to three planes, each at right angles to the others. But some philosophical people have been asking why three dimensions particularly—why not another direction at right angles to the other three?—and have even tried to construct a Four-Dimension geometry. Professor Simon Newcomb was expounding this to the New York Mathematical Society only a month or so ago. You know how on a flat surface, which has only two dimensions, we can represent a figure of a three-dimensional solid, and similarly they think that by models of thee dimensions they could represent one of four—if they could master the perspective of the thing. See?’
‘Scientific people ... ‘know very well that Time is only a kind of Space. Here is a popular scientific diagram, a weather record. This line I trace with my finger shows the movement of the barometer. Yesterday it was so high, yesterday night it fell, then this morning it rose again, and so gently upward to here. Surely the mercury did not trace this line in any of the dimensions of Space generally recognized? But certainly it traced such a line, and that line, therefore, we must conclude was along the Time-Dimension.’
[H.G. Wells (1866–1946). The Time Machine. 1898. https://www.bartleby.com/1000/1.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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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9일 카톡방에 웰즈의 타임머신의 바로 저 구절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neomay7님이 이 이야기를 꺼내신 건 기억했는데, 그게 이 게시판이 아니라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이었다는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나저나 시지프스님이 답글 다신 게 한밤중이시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염려해 주시고, 새해 인사도 먼저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검은 호랑이 해 라는데, 검은 얘는 바빠서, 검은 물이 거진 다 빠지고 줄무늬만 남은 호랑이라서, 대신에 2마리를 데려 왔습니다 ^^ )
다음 페이지 입니다.
웰즈의 시간여행기계에 4차원 시공간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이전에 neomay3님이 상세하게 이야기하신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찾아보려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언제쯤이었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타임머신 얘기 한 게 지난 여름이었군요. 시지프스님 감사합니다! ^^
웰즈의 이 소설은 초반부가 제일 재밌었어요. 자신이 나중에 '습작'이라고 생각해달라고 했던 것처럼 후반부는 전개도 정신없고, 역사가 진보하지 않는다는 주제(제 해석에 따르면)도 식상하고 어설프게 풀어졌다고 생각해요. 웰즈의 그런 아이디어가 이후에 나온 SF나 SF영화에서 펼쳐질 씨앗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요. ^^;
하여튼 초반부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모임에서 웰즈의 타임머신 이야기도 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뒷부분이 더 재미있었어요. 엘로이와 몰록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제 생각에도 메트로폴리스를 비롯하여 많은 SF에 나오는 두 계급의 디스토피아 사회가 타임머신에 나오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닮은 것 같습니다.
웰즈가 후대를 위해서 유산으로 남겨주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좀 편협했나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네요. ^^
& 제가 소개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려워요... ^^;
'Time Machine' 을 '시간 여행 기계' 라고 표기하니까 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훨씬 정확한 표현이지만요. 언젠가 타임 머신을 시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은 이런 사기꾼 ~! 이었습니다 ^^ (시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time piece 도 쓰더라구요. 이것도 이상하게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