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6회 - 고전역학 1 – 넓게 이해하기
모임 정리
고전역학
작성자
neomay33
작성일
2021-11-30 12:34
조회
3772
새자연철학세미나 6회에서 나눈 얘기 정리입니다.
때: 2021년 11월 25일 목요일 오후 8시 30분 ~ 10시 30분
주제: 고전역학 1 – 넓게 이해하기
여는 이야기: 서*석
논의 자료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2장 “고전역학”(추수밭, 2019, pp.78-131)
- 대담영상 정리글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3-1. 고전역학의 역사지평 : 데카르트와 뉴턴(https://greenacademy.re.kr/archives/12155)
- 대담영상 정리글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3-2. 고전역학의 질문과 개념들(https://greenacademy.re.kr/archives/12246)
- 대담영상 정리글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3-3. 고전역학의 바탕구도와 그 요소들(https://greenacademy.re.kr/archives/12301)
- " rel="noreferrer noopener">대담영상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3-4. 고전역학 Q&A(">)
참고할 수 있는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의 글들
- 11월 30일, 12월 28일 아산 모임 2장 고전역학 부분 발제문(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 9번 글)
- 자연철학 그림노트 1 – 낙하운동 (1, 2장)(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 13번 글)
- 자연철학 그림노트 2 – 미적분학의 근본정리(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 27번 글)
- 이 밖에도 참고할 수 있는 예전 글들이 많습니다.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맨 앞으로 가시면 예전 글들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11월 25일과 12월 9일 두 차례에 걸쳐서 제2장의 고전역학에 대해서 공부를 합니다. <역사지평>에서 데카르트와 뉴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내용정리>에서 고전역학의 앎의 틀을 이해해 봅니다. 넓게 이해하기를 시도하는 첫 시간에는 역사지평의 배경 이야기와 고전역학의 틀을 크게 이해하는 데 힘을 쏟고 깊게 이해하기를 시도하는 두 번째 시간에는 낙하 운동과 조화진동 운동, 포물선 운동 등을 하나하나 다루어 보는 데까지 힘을 쏟아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사소한 내용에서부터 어려운 내용까지 가리지 말고 [자연철학세미나 게시판]에 질문글을 올려주세요. 내용을 잘 추려서 두 차례에 걸쳐 다 다룰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목차
여는 이야기 (서*석)
전체적인 소감, 질문
- 냄새나 소리 등 다른 것들도 많은데 왜 항상 시간과 공간만 가지고 그 둘을 묶어서 씨름을 하는 것일까?
- 세미나에서 하고자 하는 역할 & 철학에 대한 변호
- 장회익선생님의 책은 왜 자연철학 책인가? / 물리학자들은 심학 제2도를 어떻게 보는가? / F=ma?
- "힘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보여주는 한 양상"! /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구분하는 기준?
- 분절된 지식보다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 / 질량 개념, 쉽지 않다! / 뉴턴의 시간과 아인슈타인의 시간
- 고전역학인데 데카르트에서 시작?! / 상태 개념? / F=ma는 오일러가, 벡터는 19세기에 / 서양의 역사관과 동양의 역사관
- 시공간, 속도, 가속도, 힘, 질량 개념... 어려운 개념을 그냥 가르치고 있는데 충분히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 물리가 아니라 '자연'철학! / 동양에서도 수학이 발달했는데 왜 유럽처럼 되지 못했을까? / 생물학은 왜 발달이 늦었을까?
- 인문학 하는 사람들과 수학, 과학 하는 사람들 / 문학 전공자로서 과학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궁금증
본격 질문 새자연철학세미나 6회 질문모음.pdf
- F=ma / 질량 개념 / 데카르트 vs 뉴턴?
- 작용-반작용 제대로 이해하기
- 기계론 철학 / 비스 비바(vis viva)
- 힘, 운동, 위치와 운동량, 운동량의 변화율 / 데카르트는 뭘 했고 뉴턴은 뭘 했나?
- 왜 케플러나 갈릴레오가 아니라 데카르트에서 근대 과학이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가?
- 고전역학의 개념들 & 왜 질량, 위치와 운동량인가? / 고전 역학은 무엇을 했나? / 우리는 고전 역학에서 무엇을 알아야 하나?
- 질량, 힘에 대한 추가 질문
여는 이야기
서*석 :
*준비해주신 발표 자료의 내용을 복사해왔습니다.
관심법의 한계 고백
제 독후감이고, 위의 사례처럼 확대, 과장, 오류, 망상이 섞인, 아주아주 비주류 의견이니, 많이 감안해서 들어주세요. ( 평생 물리학을 공부해 오신 분들이 버글버글한 이 세미나에 앞으로도 계속 오려면, 이런 자아비판이 꼭 필요합니다 ㅠㅠ )
pride - 자존심, 오만.
잘게 분석해서, 살펴보고, 나중에 다시 합친다 - 같은 층위에 있을 때. 질적 차이가 없는 단일한 종류.
내가 납득하면 된다. 남에게 어떻게 설득하냐는 중요한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아예 관심사에서 없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상은, 물체의 운동은, 천상의 천체의 운동도 모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신은 기적을 일으키고, 자연의 알려진 보통의 운행을 방해하는 능력을 (갑작스런 풍랑, 심지어 태양도 멈추게 하셨다) 발휘하기 보다, 이 세계가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하도록 유지하는 일을 하는, 보이지 않는 역활로 바뀌었다. 얼마나 혁신적인가? (예전 같으면 이런 자들은 종교재판으로 처단했을텐데 ... )
뉴턴과 데카르트가 배운 기하는 유클리드 기하. 여기서는 위치가 무시된다. 그러나 해석기하, 좌표계를 만든 데카르트, 그리고 그걸 이어받은 뉴턴은 위치가 아주아주 중요하다. 고전역학의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 (질량 x 속도) 이다.
뉴턴의 질량 개념 - 물체의 본질을 양으로 표시하자. Principia 의 맨 처음에 definition 의 1번이 질량의 정의. 질량의 아이디어를 뉴턴이 최초로 제시함. 당시 왕, 귀족이 있었고, 종교의 영향이 막강한 시대인데, 물체를 그냥 하나의 종류로 간주하고, 그렇게 붙인 양, 질량만 운동에서 따지자고 한다 ! 엄청난 혁명가이자, 내 위에 아무도 없다는 유아론자 !!
운동량 개념도 재미있다. mv 질량이 작아도 속도가 빠르면 운동량은, 충격량은 더 클 수가 있다.
뉴턴의 힘 개념이 놀라운 점 - 저렇게 정의해서 그걸로 일관적인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 꼭 된다는 보장이 없었을 텐데. 그런데 누가 뉴턴의 기하학적 설명을 수식인 F=ma로 바꾸었나요?
왜 서구에만 근대과학이 있었는가는, 왜 서구에만 뉴턴이 있었는가로 바꾸어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미적분은 극한, 미분, 적분, 모두 수학의 무한이 필요하다. 현실의 물리학에선 무한을 쓰지 않는데요. 그렇지만 미적분은 너무나 잘 작동했다 ! )
제3법칙, 작용-반작용, 모든 힘의 총합은 늘 0이다?
벽에 공이 부딪히면, 작용-반작용, 갑자기 반대 방향의 힘이 생긴다! 그리고 공은 제자리에 떨어져야 한다. 공이 같은 속도로, 반대방향으로 튕겨진다면, 벽에서 반대방향의 2배의 힘이 충돌순간에 생성되야 한다. 힘이 저절로 생긴다 ! 어쨌든 이상하다 !!
뉴턴의 벡터 개념 비판
삼각형의 모든 변을 벡터로 바꿔 생각하면, 가장 긴 변은 다른 두 변의 합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양주동 선생의 설명대로, 사냥개도 토끼를 쫒을 때, 똑바로 쫒아가지 갈 지 자로 가지는 않는다던데, 벡터에선 갈 지 자 경로나 직선 경로나 시간을 제외하면 다 똑같다. 힘의 분해에선 시간을 빼고 생각하니까, 결국 간단한 힘의 직선 경로나, 온 우주를 돌고 온 경로나 같게 된다! 이렇게 보면 파인만의 모든 경로의 총합, 입자의 역사, 이런 얘기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게 된다 !!
이런 비판의 개인적 이유 - 어느날 꿈에 시지프스께서 현몽하셔서 이르시길, 시지프스가 산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힘겹게 쫒아 내려왔을때, 신의 사자가 와서 말한다. 야, 일해라 일! 바위가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니, 뉴턴의 벡터 계산에 의하면 제자리니까 일한 게 없어요! 몇 천 년째 농땡이를 치고 있구만~! 먼저 들른 아틀라스란 놈도 가만히 들고 있으면서 힘들다고 난리치더만, 그것도 일이 아닌데 말이야. 신화 속 인물들은 너무 게을러...
이 이야기를 듣고서 아틀라스와 전서구로 서로의 억울함을 이야기 해 봤다. 결론은, 일을 정의하는 뉴턴 물리학, 그 기본인 벡터 개념이 문제라는 것이다 ! 아인슈타인은 잘 해결 했는지 모르겠네, 그건 좀 어려워서 말이지~!
동양에서는 왜 근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나? 라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유럽 문화의 독특함 - 회화의 원근법, 음악의 평균율, 과학의 환원주의, 이런 것들은 다른 문명에서는 없던 것들. 이 당시 서유럽 문명에는 독특함이 있구나. (아마도 건축 양식 (큰 도시마다 있는 대성당), 복식, 음식 (후추, 향신료 때문에 대항해시대 열림), 역사관 (모든 문명에서 역사는 흔히 퇴행적, 복귀적으로, 예전에 황금시대가 있었고, 점점 타락해서~, 요순시대가 최고이고 ..., 갑자기 발전한다는 역사관이 출현 )
서유럽의 저 시기의 생각이 좀 독특한데, 그 문명이 전세계를 잡아먹고는, 왜 너희는 이런 것이 없느냐고, 그러니 열등하다고 억압하는 상황...
고전역학을 2번이 나누어 다룰테니, 한번은 비-과학적인 접근, 독해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서양은 환경을 무시하고, 원하는 문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방식은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단순히 쌓아올라가는 방식이다. 좀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 간단한데? 라면서 코웃음쳤을 법한. (디지털 문명이라지만, 2진법 자체는 얼마나 간단한가 ! 그리고 세상을 그렇게 on-off 로만 본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 그런데 그런 디지털 방식이 현재의 모든 영역을 죄다 바꾸어 놓았다 !!! )
동양에서의 예측 - 천문을 보고, 지리를 고려하고, 인사를 살펴서, 앞일을 예측한다. 고려할 것이 무척이나 많고, 서로의 작용이 다르고, 그때그때 다르고, 상호작용마저 고려해야 했다.
왜 서양만 계량화가 되었냐고? 동양이 방정식은 더 잘 풀었다. 송대에 10차 방정식을 풀었다고 한다. 세종때에도 계산술이 대단했다고 하고. 하지만 그것은 중인이 담당해서인지, 사대부까지는 전파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너무 발전해서 그래서 너무 복잡해서가 아닐까?
어짜피 지금도 인문, 정책에서는 그리 복잡한 계산을 쓰지 않는다. 근거자료로 통계를 많이 쓰지만, 이건 통계학이 근대후반에 발전한 덕분일 것이고.
제 결론 : 서유럽의 근대 과학은, 동양의 지성인이라면 너무 유치하고 단면적으로만 본다면서 질겁했을 법한 방식입니다만, 그게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너무 다양한 상황을 다 고려했는데, 그걸 상식과 지성 수준에서 처리했지, 계산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했습니다. (과연 어떤 계산이 가능할지는 ... 아직도 그런 것은 없는 듯 합니다.) 동양의 수학, 계산술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되려 너무 많이 발전해서, 쉽사리 익히기 어려웠을 듯 하고, 너무 전문성을 띠었기에, 되려 다른 학문 영역과의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여는 이야기 끝.
전체적인 소감, 질문
- 냄새나 소리 등 다른 것들도 많은데 왜 항상 시간과 공간만 가지고 그 둘을 묶어서 씨름을 하는 것일까?
장*주
시간과 공간을 늘 묶는데 왜 다른 것들과는 왜 더 묶이는 게 없었는지 궁금했다. 예를 들어서 냄새, 소리 같은 다른 것들은 좀 손에 잡히는데, 시간과 공간은 안 보이고 안 잡히는 개념인 것 같다. 왜 이렇게 어려운 개념으로 씨름을 하는지 궁금하다.
장회익
어떤 면에서는 가장 바탕이 되는 개념이 시간과 공간이다. 냄새는 그 안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화학물질이 코에 들어와서 자극하는 게 냄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다른 것들로 설명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꼭 시간과 공간만 기본적이라는 법은 없지만, 우리가 찾아서 해나가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장*주
그런데 시간과 공간은 다 안 보이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종결점으로 삼고 찾아갔는지...
장회익
그게 재밌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데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기준을 만든다. 바로 칸트가 그것을 궁금하게 여겼다. 시간이라는 것이 저 밖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이성, 생각 속에서 그 틀을 만들어서 사물을 본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꼭 머리 속에서만 나오느냐, 저쪽 바깥 세계에는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없느냐 하면, 사실 그렇게 얘기하기도 어렵다. 거기에 맞으니까 우리가 생각해서 볼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다.
아마 동물 중에서 인간만큼 지능이 높지 않은 동물들은 공간이라든기 시간이라는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는 동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물론 멀리 있는 것을 사냥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은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사물을 이해할 때 이해의 틀로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을 만들어서 보고 있다. 그게 왜 만들어지느냐, 누구한테 배워서 만들 수도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자득적 개념'이라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만들어서 그걸 통해서 봐야지, 그 개념을 만들지 못하면 사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만들어서 가지고 있는 그런 개념의 대표적 개념이 공간과 시간,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있다.
이*원
맛이나 색깔이나 향기나 이런 것은 우리 감각 지각으로 느끼는 건데 공간과 시간에도 그런 게 있기는 있다. 거리나 길이, 시간 간격이라든가, 몇 초가 지났다든가. 이런 것은 우리가 나름대로 직접이든 간접이든 감각 지각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그런 비슷한 영역의 개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도 다른 개념들과 같은 레벨에서 얘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질문을 하신 거라고 저는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길이가 얼마다, 간격이 얼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느끼는 이해의 내용과, 지금 질문을 던지신 내용은 시간이란 뭔가 공간이란 뭔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출발은 우리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하려고 하면 정말 답하기가 쉽지 않은 그런 레벨이 있는 것 같다.
아마 맛이나 향기나 이런 것들도 더 깊은 레벨이 있겠지만 아마 시간, 공간처럼 가장 바탕에 있는 개념은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개념에도 가장 근본 차원에 있는 개념에서부터 우리 감각 지각이 쉽게 포착할 수 있는 개념까지 여러 층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세미나에서 하고자 하는 역할 & 철학에 대한 변호
이*원
선생님의 글에 대한 소감보다는, 저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장회익선생님의 글에 대해서는 읽을 때마다 이견이 별로 없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을 하시고,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을 꼭 써주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궁금했던 부분, 조금 불확실했던 부분들을 잘 이어서 정리를 해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철학적 관점에서 과학의 흐름을 오히려 더 바라보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제가 장회익선생님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장회익선생님이 하고 계시는 그 과학으로부터의 더 깊이 있는 사고로 꿰뚫어 들어가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사고 구조라는 게 뭔지 파헤치는 것일 것이다.
사실은 근대철학자들도 오래전부터 그것을 고민했었다. 그런 면을 철학자들은 또 다른 배경이 있다. 장회익선생님은 그런 배경보다도, 과학 그 자체로부터 일단 다양하게 우리 앞에 펼쳐졌던 과학 지식으로부터 보다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성찰을 추구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철학자들에게 부족한 어떤 구체성이 장회익선생님의 이론 안에 들어 있다.
대신에 그래서 장회익선생님이 갖고 계신 내용 안에는 철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다. 좀 납득이 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개념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까 여는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힘' 개념이라는 것도 뉴턴과 라이프니츠 당시에 힘이 뭔지 논쟁이 많았다.
앞서 질문에서도 나왔지만 시간, 공간에 대해서도 계속 논쟁을 해왔다. 사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다 자연철학자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연철학보다는 다른 철학에 무게 중심을 두고 더 강하게 했던 반면, 뉴턴이나 갈릴레이나 이런 사람들은 좀 더 자연철학에 무게를 두었다. 오늘날 과학이라고 하는 게 다 자연철학이었다.
그렇게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보니까 계속 논쟁을 해왔다. 역사가들이 그런 논쟁을 계속 서술을 하고 있는데, 어떤 답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철학자들은 사실 역사적인 흐름을 다 꼬박꼬박 챙겨보진 못한다. 대충 이 사람 생각은 이렇고 저 사람 생각은 이렇다 정리를 하는 식으로 공부를 한다.
그래서 철학자 그 비슷하게 제가 만약에 장회익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기여를 해야겠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존의 철학자들의 논의와의 연결인데, 이번에 선생님의 이 책에서 시도를 하고 계신다. 데카르트에서부터 출발을 해서. 이렇게 하시다 보면 언젠가 철학자들이 자기 자리를 잃게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하셨다고 생각한다.
좀 전에 여는이야기에서 해주셨듯이, 철학에 대해서 제가 조금 변호를 한 가지 하려고 데카르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제 얘기는 마치겠다. 데카르트 시절부터 철학하는 사람들의 주장에서 주어가 '나'로 바뀌었는데 이게 유아론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것, 우리 지식 우리 인식의 확실성을 찾고 싶어했다. 그것의 배경이 됐던 것은 르네상스 시절의 수많은 지적 혼란이다.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까지 다 한꺼번에 모였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 참된 것인가, 어떤 것이 확실한 것인가 이것을 찾아야되겠다고 계속 갈등을 하고 고민을 했다.
데카르트는 가장 솔직한 거다. 너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나의 의식에 대해서는 알 수가 있다, 그게 확실성을 추구하는 내가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될 태도가 아니냐,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 유아론은 아니고, 나로부터 가장 확실한 나의 생각을 일단 이야기를 쭉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성찰, 나의 음식에 대한 성찰, 나의 본질에 관한 것, 나의 의식의 본질에 관한 것, 그래서 그로부터 세계의 이해와 신에 대한 존재성 이런 것들을 다 나의 의식에서부터 출발해서 오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나'에 대해서 다 하고 나면 그 다음 과제는 타인도 그럴까 하는 걸 질문을 던져야 된다. 우리 철학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중요한 전제기 있었다고 본다. 즉 그 철학자들이 나로부터 출발했지만 동일성이라는 테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와 너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 대해서 확실한 얘기를 한다고 하면 너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야, 그래서 일반화가 가능했다고 우리 철학자들은 생각한다. 근대 철학을 모더니즘 철학이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테제를 동일성 테제라고 본다. 그래서 이게 너무 오만하다기 보다는, 거꾸로 데카르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겸손했던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물리학이나 다른 많은 이야기도 했지만 자기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수학, 기하학에서부터 모든 사고를 출발했다는 것을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데카르트의 그런 전통이 데카르트에서 어느 날 튀어나온 독특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서양 그리스 철학의 또 한 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수학을 중시했던 그 흐름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부터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흐름들이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어느 날 갑자기 천재로 태어났다기 보다는 그 흐름의 하나를 이어가는 것이고, 거기서 조금 아주 구체적인 방법론인 기하학을 대수학과 결합한 해석기하학을 만든 것이다. 즉 수치화한 것이다.
예전에는 도형만 있었고, 함수적인 형태의 수치 해석이 없었는데 변수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예전에 사람들은 수라는 게 변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1이면 1이고 2면 2지, 수가 변한다? 그것부터가 생각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개념을 만들고 함수 개념을 만들고 그래서 기하학을 함수로 표현을 하고 좌표계에 그래프를 그리고 그런 해석기하학을 만들어놨더니 뉴턴이 그걸 가져다가 바로 이 자연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데 쓴 것이다.
'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진 책이다'라는 이야기는 사실 뉴턴, 갈릴레이가 한 걸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피타고라스학파에서부터 나왔던 얘기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근대 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게 가능했던 것은 방법론이 구체화되고 새롭게 세련되어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본격화된 것이지 기본 아이디어는 그전부터 있었다, 이렇게 보시면 좋지 않을까 한다.
- 장회익선생님의 책은 왜 자연철학 책인가? / 물리학자들은 심학 제2도를 어떻게 보는가? / F=ma?
이*일
간단히 말씀드리면 보통 물리학 교과서, 일반 물리학 교과서든 또는 중고등학교의 물리학 교과서에서 고전역학을 가르칠 때 갈릴레오부터 시작을 한다. 갈릴레오가 어떻게 했고 사고 실험이 어떻게 돼서 물체가 힘을 한번 받으면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다.
그런데 장회익선생님 책이 자연철학 책이라고 제가 느낀 것은, 갈릴레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데카르트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과학자들의 일대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장회익선생님께서 뉴턴과 데카르트를 이렇게 잘 연결시켜줘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사회자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2장에서 고전 역학을 이렇게 심학 제2도로 딱 정리한 것을 물리학자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궁금하다.
이*일
물리학, 고전역학의 시작이다. 앞서 여는이야기에서 나왔듯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는 F=ma가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 법칙, 힘이 가해지면 운동상태가 변한다 이렇게만 나온다. 앞에서 질문한 것처럼 F=ma가 그 책에 나오지 않는데, 누가 나중에 그런 식으로 바꿔놨는지 궁금하다.
질량 곱하기 속도를 운동으로 보고, 그것을 정리해서 힘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굉장히 대단한 일이다. 사실은 제가 중학생 시절에 역학을 배울 때 힘이란 게 뭐냐고 하면, 힘은 물체를 변형시키거나 물체의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때에도 실제로 눈으로 보면 물체에 힘을 가하면 물체가 변형이 되고 운동을 시키는 두 일이 별개의 현상인데 왜 이 두 가지가 이렇게 나타날까 궁금했다.
나중에 대학교 1학년 때 일반물리학을 배우면서, 물체를 변형시키는 것도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체에 힘을 가하면 거기에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분자라든가 이런 것에도 힘이 가해지니까 움직이는 것이다.
F=ma가 뭐냐? 여기서 가속도는 속도의 시간적 변화율로 명확히 정의가 되는데, 힘이 뭐냐 질량이 뭐냐 하는 것은 따로따로 정리되기 어렵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처음에 질량의 정의가 나온다. 질량은 부피 곱하기 밀도다, 이렇게 정의를 하고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 자체도 정의는 맞는 정의지만, F=ma와 관련해서 보면, 그것을 안다고 해서 F=ma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가속도를 매개로 해서 힘과 질량을 동시에 정의한다고 보는 것이다. 운동과 관계되는 관성 질량을 정의하는 식이 F=ma이다, 힘과 질량을 동시에 정의하는 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그런 면에서 중력, 만유인력에서의 질량은 정의가 또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중력 질량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이 같다는 것, 그것을 그냥 본능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도 아니고, 정의가 완벽하게 원칙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맞춰야 된다. 그래서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이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가야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우
중고등학교 때 F=ma라고 계속 반복해서 배웠던 간단한 식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세계의 비밀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것을 설명하는 수식을 조금 더 따라가서 한 단계 더 깊이 이해하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을 느끼면서 읽었고, 조금 공부를 해보고 싶다.
- "힘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보여주는 한 양상"! /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구분하는 기준?
신*상
힘을 정의하는 부분이 좀 신선하게 다가왔다. 보통 힘이라고 하면 다른 것과 어떤 물체가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게 되는데. 선생님께서 책 118쪽에서 '힘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보여주는 한 양상이다'라고 말씀해주셨다.
힘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이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 어떤 물체가 속도를 가지고 움직일 때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할 때 부딪히는 순간, 거기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그때에 비로소 힘이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계속 앞으로도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제가 궁금한 것은, 앎의 바탕 구도에서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 그리고 그것을 잇는 변화의 원리라는 부분에서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에 대한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들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궁금했다.
예컨대 시간 차를 얘기하는 걸까 아니면 시공간의 다름을 얘기하는 걸까 아니면 그 외에 더 뭔가가 더 있을 수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좀 들었다. 그걸 나누는 게 뭘까, 어디까지 허용하시는 건가?
- 분절된 지식보다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 / 질량 개념, 쉽지 않다! / 뉴턴의 시간가 아인슈타인의 시간
이*은
중등 교육 과정에서 보면 과학사적인 과정에서 과학 지식이나 개념을 배운다기 보다는 좀 분절된 지식을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님의 자연 철학 강의는 역사 속에서 분절된 지식을 좀 퍼즐 맞추듯이 연결하는 작업 같은 느낌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다. 이렇게 맥락 속에서 지식이 습득되는 것,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또다시 한 번 했다.
정해진 어떤 진리, 이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의 여부의 중요성도 분명히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이든 갈릴레오의 사고 실험이든 어떤 자연을 해석하고 지금까지 규명되거나 합의된 것들에 대한 개념의 특징이나 그 방식들을 배우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하는 편이다.
그래서 개념 자체, 어떤 정해진 것 혹은 합의된 최종 결론은 나중에 또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찾고 있는 소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지금 책에서 서술하는 방식에서처럼 그 소를 규명할 수 있는, 소에 대해 알게 되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좀 더 중요시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제가 이제 고전역학에서 제일 관심이 가는 개념 중에 하나가 질량에 대한 개념이다. 아직도 저는 이제 질량에 대한 개념이 좀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또 더 연구해보고 싶은 개념이다. 일상생활에서 질량과 무게의 개념을 굉장히 혼동해서 쓰는데, 저는 이런 상황들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걸 다르게 구별을 할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을 평소에 좀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뉴턴이 말한 균일한 시간이랑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말하는 변하는 시간, 이 두 가지 다른 시간이 둘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것이 맞고 이것이 틀리고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는 각각의 개념에 대한 설명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두 개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 고전역학인데 데카르트에서 시작?! / 상태 개념? / F=ma는 오일러가, 벡터는 19세기에 / 서양의 역사관과 동양의 역사관
김*춘
'거인의 어깨'라고 할 때 일반적인 교양과학 책이나 중등학교 교과서에는 갈릴레이나 케플러가 거인이라고 서술돼있는데, 이 책에서는 데카르트부터 나와서 저도 좀 새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청소년 시기에 혼자 공부하는 시기, 뉴턴의 경우에는 대학에 가기 전에 몇 년 동안 혼자 공부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지성인들 중에서 크게 된 사람 중에서 굉장히 이제 필요한 요건이다, 공부하는 방법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일관되게 말씀해주셨다.
이런 구절이 있다, "그뿐 아니라 양자역학에 의하면 위치와 운동량의 값들로 상태 개념을 설정하는 것 또한 부적절하며 이 값들은 오히려 진정한 상태가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 그 성격의 일부를 드러내준 흔적에 해당하는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셨는데 이건 진정한 상태가 있다고 봐야 되냐 없다고 봐야 되느냐 그것이 이제 논쟁적이지 않고 결론으로 딱 얘기할 수 있게 됐구나, 이 부분을 주의깊게 봤다.
그리고 앞서 나왔던 F=ma에 대한 것인데, <프린키피아>에는 운동량의 시간에 대한 변화율이 힘으로 정의돼 있는데 학교 교과서에는 F=ma로 쓰여져 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오일러가 교육적인 필요에 의해서 썼고, 이제 교과서에서 그렇게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까 벡터 얘기해 주셨는데, 그 벡터라고 하는 것은 19세기에 발명된 수학이고 뉴턴 시대는 보통은 벡터가 없었다고 알고 있다. 보통 깁스(Josiah Willard Gibbs)나 벡터 형성사를 보면 19세기 몇몇 사람들이 벡터 기호를 쓴다. 개념은 그 이전부터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다음에 아까 역사관 중에서, 황금시대는 과거였고 미래가 아니다 그런 얘기를 해 주셨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황금시대가 에덴에 있는 게 아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래서 아마 유대 구약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약 2천년 동안의 역사관이라고 하는 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 이게 더 주된 모멘텀이 아닐까, 신앙의 어떤 방향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좀 해봤다. 그러니까 서양의 세계관은 황금 시대가 과거에 있었다는 동양의 세계관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이렇게 보통 알려지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시공간, 속도, 가속도, 힘, 질량 개념... 어려운 개념을 그냥 가르치고 있는데 충분히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영
갈릴레오가 아니라 데카르트부터 나온 것이 저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과학의 선구자의 역할을 데카르트가 했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물리적인 것만 말하자면, 그분들이 처절하게 진리를 탐구하고자 를 썼는데, 제가 쭉 물리 공부를 하다보면 물리 개념이 시공간 그런 것을 떠나서 간단한 것에서도 아주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서 속도라는 개념을 우리가 그냥 흔하게 쓰지만 쉬운 개념이 아니다. 속도가 미분의 개념인데. 위치와 시간도 잘 정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속도를 평균 속도, 중간 속도로 배우는데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의미의 속도는 중간 속도이고, 순간 속도는 측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균 속도만이 측정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순간 속도라는 것을 가져다가 평균 속도의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속도라고 생각한다.
가속도는 더 어려운 개념이다. 두번 미분한 가속도 개념은 정말로 어려운 개념이다. 학교에서 평범하게 가져다가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한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이런 개념을 충분히 생각하고 알아가는 기회가 굉장히 필요하다.
뉴턴의 운동법칙이라고 하면 F=ma 이게 가장 유명한 식이다. 개인적으로 힘이라는 개념이 물리적으로 좋은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힘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물리량도 아니고, 우리가 단지 어떻게 표현해야될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 그런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어떤 근본적인 물리력이 아니다.
F=ma는 좋지 않은 식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질량, 가속도, 힘이 모두 얽혀서 뭉뚱그려져서 정의된 아주 이상한 식이다. 가속도는 힘에 비례한다 이렇게만 가속도를 정해놓고, 그 다음에 물체의 종류에 따라서 똑같은 힘이라도 가속도가 달라지니까 거기에다가 관성이라는 그런 비례 상수를 넣은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냥 가속도는 힘에 비례한다는 식으로 뉴턴의 운동 법칙을 가르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 힘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가속도라는 것은 힘에 비례하는 그런 양이다, 학생들한테 이렇게 가르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질량은 똑같은 힘이라도 가속도가 다 다를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비례상수로서, 무거운 물체는 가속이 덜 되고, 가벼운 물체는 잘 되고 이런 식으로 부차적인 비례 상수로 도입하는 이런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거기서 질량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 질량은 관성 질량이다. 어떤 관성을 가졌느냐.
그런데 아까 나온 중력 질량은 지구와의 만유 인력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이것도 어려운 개념이다.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이 왜 똑같냐 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 물리가 아니라 '자연'철학! / 동양에서도 수학이 발달했는데 왜 유럽처럼 근대 학문이 나오지 않았을까? / 생물학은 왜 발달이 늦었을까?
김*미
재미있게 읽다가 수식이 나와서 좀 어려웠다. 역사지평 부분의 이야기는 스폰지처럼 쑥쑥 들어왔다. 읽은 소감은, 이것이 '자연' 철학 하는 건가, 물리가 아니라 '자연' 철학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여는이야기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저도 느꼈다.
소위 말하는 유럽 철학도 사실은 그리스철학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도에서도 수학이 발달했는데 왜 발달하지 못했을까, 중국 등의 어떤 동양철학이나 유학이나 불교같은 종교때문일까 의문이 들었다.
124쪽에 선생님께서 자유에너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생물학이 왜 늦게 발달했는지 궁금하다. 과학적 해명을 주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적인 관심으로만 봐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 인문학 하는 사람들과 수학, 과학 하는 사람들 / 문학 전공자로서 과학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궁금증
구*아
철학자인 줄 알았던 데카르트가 엉뚱하게도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다. 흔히 예술이나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굉장히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라고 생각을 하고, 물리학이나 수학을 전공하시는 선생님들은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여기서 보니까 그렇지 않았다.
이 모임에서 선생님들을 만나뵙기 전까지는 이런 지적인 교류를 할 기회가 없었기에 그 세계를 몰랐었다. 제가 이 책을 읽은 선생님들을 여기서 만나 뵙게 되면서 물리학이나 수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낭만주의자들인지 알고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여기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얘기를 한다. 이 세상의 중심에 나가 있다, 물론 그 '나'가 로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나'는 아니다. 장회익교수님이 말씀으로 이해를 하자면 이 온생명 속에서 교류하는 그 안에 '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는 되었다.
어쨌든 물리학이나 수학은 기본적인 평범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와 조금 다른 세계, 예를 들면 이 세계의 법칙을 이 세계의 진리를 내가 알아보리라, 나의 이성을 가지고, 그리고 그것을 아주 단순한 어떤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지난번에 근거들의 연쇄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단계와 단계를 밟아가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진리를 내가 공식화해보리라, 그리고 그 진리를 통해서 내가 깨달아보겠다, 이 지적인 어떠한 것을 얻어내리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구나, 그래서 저한테 굉장히 놀라웠다.
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생각에 가장 반대 지점에서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더라'라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행태를 보이는 것이 왜 그럴까라는 것에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인간은 이럴까, 왜 인간이 이렇게 추잡스러운가, 인간은 왜 이렇게 불쌍한 것인가, 왜 인간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가, 그런데 그 인간이 세계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들이 문학 텍스트다. 그래서 많은 문학 텍스트를 읽으면서 아, 이렇게 인간이 부조리하구나, 이 세상은 이렇게 쉽게 판단내릴 수 없구나, 이 세상은 이렇게 심플하지 않구나라는 것을 거듭 거듭 확인하면서, 때로는 애정으로 때로는 어떤 쇼크로 자꾸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 반대 지점에서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하시는 선생님들은... 예를 들면 <코스모스>(다큐멘터리)를 볼 때 처음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별빛을 바라보면서 아이에게 저 별빛이 수억 년 전인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의 별빛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빛을 발한 우주 속에 별의 불빛을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거다라는 얘기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저는 너무 놀라웠다.
그러면서 그것을 공식화하려는 노력이 저한테는 굉장히 놀라웠다. 그래서 저게 수학의 세계구나, 그러면 수학의 세계라는 것은 진리인가, 그래서 그것들을 공부하면서 진리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그러면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세계의 어떤 질서를 다는 아니지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확장시켜가면서 깨달을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이구나 그것을 제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생각할 때는 데카르트가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인 게 당연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그래서 이 사람이 엉뚱하게도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였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여기에서 참여를 하고 듣고 싶은 게, 제가 잘 모르지만 물리학자들이나 지금 알려진 수학자들이 당시에는 그 시대의 진리를 부정하고 그래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또 이단으로 또 처벌을 받기도 했고 아주 가난하게 죽기도 했는데, 그것이 저에게는 또 굉장히 강렬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한 총평이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계속 듣고 싶고, 수학의 세계와 물리학의 세계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지 그게 진짜 진리인지도 궁금하고, 저의 세계관과 너무 달라서 좀 재미있다.
본격 질문
사회자
오늘은 역사 지평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까, 왜 데카르트부터 시작했고 데카르트를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맥락들을 좀 짚어보고, 그다음에는 고전 역학이 뭔지 얘기를 정리하면 좋겠다. 다음 시간에는 심화 제2도를 중심으로 어떻게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요체가 되는가 그걸 확인하는 과정으로 가면 좋겠다.
앞에서 F=ma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본 질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김*영님이 F=ma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해주시겠다.
- F=ma / 질량 개념 / 데카르트 vs 뉴턴?
김*영
아까 김*춘님이 정확히 말씀해주셨는데, F=ma을 처음 얘기한 사람은 뉴턴이 아니라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Leonhard Euler)이다. <물리학의 문화사>라는 책에 나와있다.
뉴턴은 미적분학에 대한 얘기를 했고,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프린키피아>를 새로운 언어로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책 전체는 기하학의 언어로 서술이 되어 있다. 뉴턴 이후에 오일러가 1752년에 그 내용을 집대성했다.
벡터에 대해서도 김*춘님이 정확히 얘기해주셨는데, 벡터라는 개념 자체도 19세기에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이 처음 만들었다.
앞에서 가속도가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미분을 한다는 게 도대체 뭔가,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신 게 지극하 당연한 말씀이다. 가속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뉴턴이었다. 과학사에서는 자주 논의되는 내용이다. 뉴턴의 두 번째 법칙은, 운동의 양은 힘에 비례하여 변화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변화'라는 말만 했을 뿐, 가속도 개념을 못 썼다.
그리고 질량 개념도 어렵다. 질량 개념을 가장 초창기에 했던 사람은 케플러였다. 그리고 질량에 대해서 상세히 얘기하고 운동에 대해서 전부 해명했던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가 결과적으로 틀린 얘기를 했지만. <방법서설>은 서론이고, 뒷부분에 나오는 얘기들을 보면 틀린 얘기지만 운동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것을 상세히 다루었다.
장회익선생님 책에도 자세히 나오는데, 뉴턴은 데카르트의 텍스트를 거의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데카르트가 틀렸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데카르트 비판에 내 평생을 바치리라,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장회익
그런데 거기서 데카르트가 틀렸다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얘기하는 건가?
김*영
데카르트는 관성 운동을 원 운동과 직선 운동으로 본다. 뉴턴은 원 운동은 관성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운동량 보존에 대한 얘기도 이미 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질량 곱하기 속력으로만 생각을 한다. 방향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충돌 문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엉터리가 돼버렸다. 그래서 x, y, z로 나누어서 세 방향을 별도로 고려해야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데카르트가 잘못 생각했다고 비판을 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뉴턴의 많은 텍스트는 다 데카르트의 텍스트에 대한 수정 내지는 교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장회익
데카르트가 틀렸다라기 보다는 정확하게 얘기를 못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당시에는 벡터 개념이 명확치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지, 데카르트의 세 개의 법칙은 그 자체로 틀린 것이 없다. 물론 거기에 우리가 파악하기에 불명료한 부분은 있겠지만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뉴턴이 데카르트의 법칙에 힘 개념을 하나 더 도입함으로써 명백해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 작용-반작용 제대로 이해하기
장회익
아까 여는이야기에서 작용-반작용 얘기를 했는데. 책에 내가 작용, 반작용을 썼는지 안 썼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논의를 안 한 것도 같은데, 사람들이 작용-반작용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혼동한다.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근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힘이라고 하는 것은 두 물체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온다. A가 B 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B가 당겨줘야 한다. 이럴 때 반작용은 뭐냐? A가 B를 당겨주는 것이다. 상호작용의 반대측이 받는 힘이 반작용이다. A가 작용도 받고 반작용도 받는 게 아니다. 하나가 작용도 받고 반작용도 받는다고 하면 항상 아무 힘도 못 받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상당히 혼란스러워 한다.
제일 쉽게 지구와 돌을 가지고 얘기해보자. 돌이 지금 지구로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돌과 지구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돌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 돌은 무슨 힘을 받느냐, 지구가 돌을 당기는 힘을 받는다. 그것만 받는다. 이 돌은 반작용은 안 받는다. 그러면 반작용은 누가 받느냐? 돌이 지구를 당겨주는 힘이 반작용이다. 그래서 반작용은 돌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상대쪽 즉 지구의 운동이 어떻게 되느냐를 볼 때 반작용이 있는 것이지, 돌 안에 작용-반작용을 같이 집어넣으면 굉장한 혼동이 온다.
일반적으로 작용-반작용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다, 그래서 정지해있는 것은 다 작용-반작용이 평형을 이루어서 정지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정지한 것 속에는 반작용이 없다.
내가 예전에 작용-반작용 문제를 내가지고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천장이 돌이 매달려 있고 그 돌은 지구의 중력을 받고 있는데 그때 반작용이 뭐냐 했을 때, 실이 돌을 잡아당기고 있는 힘이다 하는 것이 아주 매력적인 오답이다. 조금 아는 사람들은 거의 다 거기에 걸려드는데, 전혀 답이 아니다. 반작용은 돌이 지구를 당기는 힘이다. 실이 돌을 당기는 게 아니다. 돌은 두 가지 힘, 즉 실이 당기는 힘과 지구가 당기는 힘이 평형을 이루어서 정지하고 있는 것이다. 작용-반작용때문에 정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 문제를 공군사관학교에서 입학시험에 출제를 했었다. 나중에 시험문제에 대한 분석이 나왔는데, 변별도가 마이너스가 나온 거다. 상위 학생들은 많이 맞히고 하위 학생들은 적게 맞히면 이게 변별도가 있다고 해서 좋은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문제의 경우에는 상위 학생들은 많이 틀리고 하위 학생들은 오히려 더 맞힌 결과가 나온 거다. 왜냐하면 전혀 모르는 애들은 그런 말도 처음 들어보니까 아무데나 동그라미 친 거다. 그렇게 하면 우연히 맞을 확률이 4분의 1인데, 조금 안다하는 학생들은 다 걸려든 거야. 그러니까 다 틀렸지. 그래서 후에 이 문제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렇게 나쁜 문제가 있다고 교육시키는 데 사용했다. 그 문제를 내가 냈거든. (웃음)
그후에 작용-반작용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이 상당히 높아졌다. 왜냐하면 수험준비서에 그 문제가 예제로 나갔거든. 그 전까지는 전부 다 거꾸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고전역학의 핵심은 아니지만, 굉장히 많이 헷갈리는 문제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상당히 헛갈려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서 말씀을 드렸다.
김*미
오늘 선생님 말씀을 안 들었으면 저도 작용-반작용 설명을 잘못 이해했을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이라는 학자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온톨로기 개념을 들어서 지금 말씀하신대로 철학적인 설명을 했었다. 그런데 왜 우리 학계에서는 작용-반작용을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다하는 얘기만 하는 걸까?
장회익
작용-반작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 반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내가 힘을 받을 경우에 상대방이 받는 힘이 반작용이다. 내 운동을 반작용과 관련지으면 안 된다.
- 기계론 철학 / vis viva
이*원
그 얘기와 연결이 되는 것인데, 데카르트의 철학은 물질계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기계론적 철학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물질계에 대해서 데카르트가 신뢰하고 있던 것은 딱 두 가지 요소이다. 하나는 사물이 있고 그것을 질량 m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운동과 변화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기호를 속도 v로 쓴 것이다.
그래서 사물이 운동을 하면서 변하는 상태를 mv가 표현해준다고 생각을 했다. 다른 물체와 충돌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운동이 전달되는 과정을 보면서, 이 mv라는 것 자체를 당시 기계론 철학자들은 사물이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이 운동을 하면서 상태가 변화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mv라는 개념을 '비스 비바'(vis viva)라고 했다. 우리말로 하면 '활력' 그런 의미이다. 기계론 철학자이기 때문에 사물이 그것을 고유하게 뭔가 가지고 있다고 본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물의 변화하는 어떤 양상으로서 표현한 것으로 본다.
라이프니츠 얘기가 나왔는데,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발을 했던 사람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물은 내적인 뭔가를 다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스 비바라고 하는 힘도 사물 자체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내적인 힘이라고 생각해서 mv2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래서 데카르트 철학을 가장 비판했던 사람이 라이프니츠이고, 뉴턴의 경우는 데카르트를 비판했다기보다는 아까 장회익선생님 말씀처럼 데카르트에게서 부족한 부분을 메꿔 나가거나 또는 일부 수정하는 그런 전략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데카르트는 여러분 아시는 유클리드 공간을 우주 공간의 기본 형태로 수학화해서 봤다. 그래서 직선 운동을 굉장히 중요한 기본 운동으로 봤다.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은 원 운동을 가장 기본 운동으로 봤는데 데카르트에 와서 직선 운동을 기본으로 보는 식으로 바뀌었다.
직선 운동이 곡선으로 바뀌는 것은 뭔가의 작용에 의해서 휜 것이다 이런 생각을 뉴턴이 더 구체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뉴턴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보였던 mv의 개념만 가지고는 사물의 수학적인 서술이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실험을 본다. 갈릴레이가 경사면에서 구슬을 굴리는 실험을 했는데, 그때그때마다 속도가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속도가 달라지는구나, 속도의 변화라는 개념을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해와는 상관이 없더라도 그것을 가속도라고 표현을 하려고 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것을 위치의 미분, 속도의 미분 이런 식으로 체계화를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아까 얘기처럼 변화를 주는 것에는 뭔가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서 외부의 힘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대상 자체의 내부에 있는 힘이 아니고 외부에 있는 힘이라는 개념으로 비스 비바를... 물론 뉴턴이 직접 이런 얘기를 한 적은 없지만 뉴턴의 제자인 클라크(Samuel Clarke)라는 사람이 나중에 라이프니츠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논쟁을 한다. 거기에 뉴턴의 자연 철학에서는 비스 비바가 F=ma 같은 거다, 이런 얘기들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동을 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직선 운동은 관성의 원리에서 본 것이고, 이것을 바꾸는 운동은 어떤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데 그 힘은 역시 뉴턴도 약간의 기계론적 전통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가해져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그 자체 내부에 존재하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내부에서 있었다고 생각했던 철학자는 오히려 라이프니츠다.
그래서 수학적인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와 또 다른 면모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그 당시에 사람들이 운동이나 사물에 대해서 가졌던 어떤 철학이나 세계관 이런 게 또 영향을 많이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철학자들은 좀 그런 면을 많이 보고 있다.
- 힘, 운동, 위치와 운동량, 운동량의 변화율 / 데카르트는 뭘 했고 뉴턴은 뭘 했나?
장회익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운동이라고만 했다. 그 운동이라는 게 바로 mv, 질량에다가 속도를 곱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운동량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은 운동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운동을 양화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받으면 운동이 변한다고 했거든. 운동의 변화율이 바로 운동량의 변화율이고, 그것이 바로 ma이다. 질량이 안 변하면 그것이 운동량의 변화율이다.
가속도 개념을 직접 거기에 쓰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운동량이 변하는데, 질량이 안 변하면 운동량이 변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질량에다가 속도의 변화율 즉 가속도를 쓰는 것이다.
뉴턴의 제2법칙을 그대로 두고 그냥 말을 바꾼 것이다. F=ma라고 해서 대단히 다른 걸 도입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같은 내용이다. 나는 F=ma를 거론 안 했다. 나는 그걸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혼란스러워서 내 책에는 뺐다. 책에서는 운동량의 변화가 힘이다, 그것 뿐이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것과는 어떻게 다르냐 묻는데, 운동량의 변화가 힘이다하는 데에 F=ma가 들어있다, 그게 끝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심 개념은 위치와 운동량이다. 위치와 운동량이 두 가지 핵심 개념이다. 그런데 운동량이 실제로는 질량에 속도를 곱한 것이니까 거기에 질량과 속도가 들어가지만, 사실은 운동의 크기를 이미 데카르트가 얘기했고 뉴턴이 물려받았다. 그런데 힘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쓴 것이 뉴턴이 한 일이다.
그런데 뉴턴 이전에는 서로 힘을 받는 두 물체가 서로 붙어서 충돌해야만 힘을 주고 받는 것으로 봤다. 그런데 사실 많은 경우에 물체들이 서로 연결이 돼야 힘이 전달되지만, 중력같은 것은 물체가 떨어져있어도 힘을 받으니까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그것을 얘기하지 못했다.
뉴턴은 떨어져 있어도 힘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한 것이다. 그 가정이 틀렸냐 맞았냐 우리가 논쟁할 건 없다. 그렇게 하면 다 설명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 보편 중력 법칙을 가정하면 다 설명이 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하면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첫 번째 근사의 첫 항에 그게 나온다. 일차적인 근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뉴턴의 식에 플러스 알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중력으로 설명 못 하는 것까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상대성이론이 더 일반적이고 상세하지만, 뉴턴 당시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제일 중요한 첫 번째 항을 얻어서 본 것만 해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물체들이 줄에 달려 있거나 뭔가에 연결이 돼 있어야만 힘이 작용한다, 이런 것도 우리의 상상이다. 자연이 그렇지 않다 그러면 끝이다. 멀리 있는 것에 서로 영향을 못 미칠 이유가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마찬가지로 왜 반드시 연결돼있어야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도 물을 수 있다. 둘 다 일종의 관념이다.
반드시 연결이 돼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떨어져있는 대상들이 서로 힘을 주고 받는 것이 이상하지만, 꼭 붙어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연결돼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게 된다. 뉴턴은 후자였다. 데카르트는 항상 맞물려서 힘을 받는 걸로 봤기 때문에, 떨어져서 힘을 주고 받는다는 주장을 못마땅하다고 비판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데카르트에 더 가까운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뉴턴이 좀 적절하게 이해를 못 했다, 그 말은 옳다. 그 이전에 그 말을 하는 것은 사실 어느 쪽 말이 옳다 그르다 판정할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 왜 케플러나 갈릴레오가 아니라 데카르트에서 근대 과학이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가?
사회자
이제 역사지평의 얘기와 고전역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들을 얘기하면 좋겠다. 왜 갈릴레오나 케플러가 아니라 데카르트부터 나오는 것이 신선했다고 말씀들을 해주셨다. 데카르트로부터 고전역학 부분을 시작하신 말씀을 장회익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보면 좋겠다.
장회익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 앎이라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앎을 추구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물음이었다. 물론 케플러도 앎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성과를 냈다. 또 갈릴레오도 중요한 법칙을 찾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앎이라고 하고, 무엇이 가장 기본적인 앎이냐 하는 것에서 데카르트가 출발을 했고 그것을 이어받은 것이 뉴턴이다, 이렇게 봤다. 우리가 지금까지 항상 법칙 중심, 사실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그것과 연결을 짓는다면 케플러나 갈릴레오 이런 사람들이 먼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는 출발점은 앎의 출발, 기본적인 앎이 뭐냐, 보편적인 앎이 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시조가 되고, 실제로 뉴턴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데카르트다.
그리고 뉴턴의 제1, 2, 3법칙이 데카르트의 1, 2, 3법칙과 거의 같다. 힘 하나만 빼면 그대로 똑같다. 사실상 데카르트가 이미 해줬는데 이것을 우리 현재 교육에서는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를 철학자로 보고 계통이 다르다고 본 거다. 과학 계통은 케플러, 갈릴레오니까 그렇게만 연결을 하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을 항상 떼어놓고 생각하는데, 사실 데카르트는 대단한 과학자다. 그런데 철학자라고 딱지를 붙여 놓으니까 아예 과학에서는 제외 해버린 것이고,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은 그런 구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서구 근대 학문에 출발을 놓은 것이 데카르트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다 비판했다. 그리고는 나는 아무것도 못 믿겠다, 내가 생각한다면 그거 하나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철저하게 모든 것을 비판하고 나서, 그리고 실제로는 그래도 믿을만 한 게 있다, 그게 뭐냐, 수학이다 이렇게 한 것이다.
여태까지 철학자들이 뭐라고 많이 했지만 그런 것은 실질적인 지식이 아니다, 그냥 말만 하는 거다 하고 그냥 확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정말 우리가 받아들이고 간직해야될 지식이 뭐냐, 내가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학은 이미 믿을 수 있다고 해서 수학에 바탕을 딱 두고 출발한 것이다. 그것이 철학이다. 그 철학이 바로 과학의 철학이 된 것이다. 그 철학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뉴턴이다.
그리고 조금 다르게 심신 문제로 연결해서 다시 정리한 건 사실 좀 틀렸다고 봐야 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현재로서는 가장 비판받아야될 중요한 부분이다. 뒤에서 얘기했지만 그것을 스피노자가 비판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하고 데카르트의 이론을 수정하면서 나아갔다.
이런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이 데카르트이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과학의 출발점이 된다. 앞에서 나왔지만 수학에서 좌표를 만든다든가 소위 해석기하학을 만든 것이 다 데카르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아마 뉴턴이 멀리 못 갔을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데카르트 얘기가 별로 없다. 케플러와 갈릴레오를 빼놓고 데카르트 얘기를 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내가 본 관점에서는 데카르트를 출발로 삼는 것이 옳다. 그리고 심지어는 한국의 여헌 장현광의 물음까지 연결을 하니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기본적인 물음을 묻느냐, 어떻게 그 물음에서 진전해나가느냐, 이런 각도로 보고 싶다 하는 취지라고 보면 되겠다.
- 고전역학의 개념들 & 왜 질량, 위치와 운동량인가? / 고전 역학은 무엇을 했나? / 우리는 고전 역학에서 무엇을 알아야 하나?
사회자
질량, 운동량, 위치, 특성과 상태 이런 중요한 고전역학의 개념들이 나오는데, 이런 개념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오늘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왜 굳이 질량이었는가, 왜 굳이 위치와 운동량이었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앞에서 질문을 해주셨다.
장회익
우선 이것을 한번 비교해보자. 앞에 첫 장에서 나온 여헌의 설명과 뉴턴이 만들어 준 고전역학의 설명 사이에 대단히 비슷한 구조적인 관계가 있다. 처음의 상태를 알고 변화의 법칙을 알면 나중 상태가 나온다, 그래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하는 구도는 똑같다. 그래서 내가 그 구도를 살린 것이다.
심학 제2도에서 네모 속의 빈칸에 뉴턴이 최초로 내용을 채워넣었다, 이렇게 봤다. 그런데 거기에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앞에서 여헌의 얘기를 보면, 하늘을 올려다 보고 하늘의 이치를 찾고, 땅을 내려다 보고 땅의 이치를 찾고, 그 다음에 초목을 들여다보고 초목의 이치를 찾아라 하고 쭉 수십 개를 나열했다. 그리고 그 각각에 대해서 다 이런 게 성립한다고 했다.
그런데 뉴턴은 딱 한 가지다. 질량을 가진 입자 하나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떤 점프가 있는가 하면,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다 할 수 있지만, 그것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하나를 짚는다고 하면 뭐냐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색깔도 있고 소리도 있고 다 많은데 왜 하필 공간 안에 있는 질량 하나냐? 다양한 특성이 있는데, 차이나는 것은 다 빼고 모든 것들이 다 공유하고 있는 것이 하나 그것이 뭐냐? 질량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양이 어떻게 생기고 뭐가 어떻든 간에, 그런 모양도 하나의 점으로 근사할 수 있고 나머지 점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으니까, 점 하나에 질량 하나 있는 것이 그 전체가 다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성질이다. 이 점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다른 것들도 다 무게가 있으니까 적용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도 거기에 어떤 부가적인 여건을 적용하면 그것도 설명이 된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그 후에 우리가 한 일이지만, 왜 고전역학은 질량 하나로 나머지 복잡한 현상들과 어떻게 연결하느냐 이렇게 물었는데, 그런데 그 질량만 가지고 여러가지 결합으로 해서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가정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 후에 상당히 많은 성공적인 연구들을 했다. 대기의 운동, 고체의 운동, 회전 운동 이런 것들이 다 기본은 질량에서 나온다.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것 하나 잡아낸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 위치만 있고 질량만 있는 것.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하고 본 것이다.
그런데 위치가 대단히 중요한데 운동이라는 게 또 있다. 질량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또 공통적으로 위치와 운동을 가지고 있다. 운동은 뭐냐? 운동은 속도와는 다르다. 속도는 운동의 한 성격이지만, 속도가 같다고 해서 운동이 같은 것은 아니다. 바위덩어리와 같은 속도로 모래 하나가 움직인다고 해서 같은 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속도 곱하기 질량, 그것을 운동으로 치자. 그래서 요즘은 운동이라고 안 하고 운동량이라고 한다. 운동량이라는 개념과 위치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변수라는 것이다.
위치와 운동량이 처음에는 이랬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되느냐.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무엇으로 구분하느냐. 마찬가지로 운동과 위치로 구분하는데, 시간에 어떻게 달라지느냐가 나중 상태다. 지금 이 시간 이전 또는 우리가 현재 관찰할 수 있는 이 시각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이 처음 상태,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간에 이것이 어떻게 된다하는 것이 나중 상태. 이것을 핵심으로 잡아서 정리한 것이다.
물론 뉴턴도 지금 보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서 쓴 것은 아니다. 뉴턴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뉴턴 역학이 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가장 보편적인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뉴턴 역학으로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사실 그럴 만한 것이, 우선 하늘에 있는 천체도 다 설명이 되고, 지구상에 있는 돌멩이도 설명이 되고, 아주 작고 미세한 가루도 설명이 되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계산하기에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도 해보면 다 됐다. 그러니까 굉장히 놀라웠던 것이다.
그것을 뉴턴 당시에 일단 성취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첫 번째 빈칸 속에(심학 제2도) 뉴턴 역학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발전된 것을 그 후에 넣어야되지만, 일단 그것 자체가 엄청나게 큰 지적인 성취다.
인류지성사에서 뉴턴 역학만큼 자연을 합법칙적으로 서술하는, 그리고 미래를 합법칙적으로 예측하는 가장 신뢰할만한 틀, 현재 우리가 볼 때 완벽한 틀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히 보편적인 것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우리가 대단히 중시해야 된다.
이런 중요한 것이 데카르트와 뉴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런데 내가 요즘 상당히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한 이해할 생각은 안 하고 언필칭 뉴턴-데카르트 패러다임에서 빨리 벗어나야 된다, 이것이 우리를 잘못 이끌었다는 얘기만 돌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적인 어떤 사상을 가졌다고 하면 일단 비판하는데, 뉴턴-데카르트 패러다임에서 이렇게 했다 하면서 모든 악을 그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알면 큰 일 나는 것 처럼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그 관문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그 다음에 올라선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옛 시대의 유물이고 현재는 새로운 것을 해야한다고 해서 포스트모던, 뉴에이지 사이언스라고 해서 옛전 것을 싹 밀어내야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뉴턴, 데카르트의 얘기가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고전 역학을 완전한 것,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수정이 됐고, 이제는 '진리'라는 말을 안 한다. 그 전 사람들에게는 고전 역학이 워낙 완벽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것이 그것을 바탕으로 다 설명이 돼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상당히 많은 것을 실제로 설명을 했다.
그런데 원자 세계에서는 고전 역학으로 전혀 설명이 되지를 않고, 상대성이론에서 속도가 커지는 데 가서는 엄청나게 다르게 적용이 된다. 그것이 또 묘하게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바뀌어 나가는데 이것이 다음 장에서부터 우리가 보게 될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첫 번째가 상대성이론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책에는 상대성이론을 먼저 놓았다. 일단은 무엇을 어떻게 바꿔서 상대성이론이 됐느냐, 다시 또 무엇을 어떻게 더 바꾸면 양자역학이 되느냐, 이것을 찾아가면 우리 지성사를 보는 데 있어서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하고 심오하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첫 발, 탄탄하게 디뎌야할 첫 발이 뉴턴의 고전역학이다. 뉴턴 자신이 전부 다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 이루어진 고전 역학의 틀, 복잡한 것을 다 끌어안고 누가 당시에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나왔다, 이런 얘기들이 물론 흥미로운 주제다. 그러나 우리는 바쁜 사람들이니까 핵심이 뭐냐, 핵심을 분명히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밟고 넘어가자, 이것이 사실 내가 더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한번 더 기회가 있는데, 도대체 고전 역학의 핵심이 뭐냐 하는 것을 한번 더 분명히 정리하고 그 다음 논의로 넘어가면 좋겠다.
사회자
다음 시간에는 심학 제2도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하고, 여는이야기는 제가 요약 발제하는 것으로 해보겠다. 추가 질문 한두 분 더 듣고 마치겠다.
- 질량, 힘에 대한 질문
김*우
확인하는 차원에서 질량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다. 앞에서 힘이 근본적인 물리량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이*원님 말씀 중에, 힘이 사물 안에 내재돼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개념과 내재돼있다는 논쟁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물리량이 아니라는 것은 내재돼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그 말과 같은 것이라고 보고, 그게 맞는 설명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장회익
시간이 없으니까 내 의견을 간단히 얘기하겠다. 상호작용이라고 하는 표현을 내가 썼다. 상호작용의 한쪽이 받게 되는 영향을 힘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쪽이 아주 크면 이것은 상호작용을 받아도 꼼짝을 안 한다. 작은 것 혼자서만 힘을 받게 된다.
지구상의 물체 운동에서는 우리가 지구가 움직이는 것까지 신경을 안 쓴다. 워낙 미세하니까. 그래서 물체 혼자서만 힘을 받게 되지만, 뉴턴 역학에서 운동량의 변화를 주는 힘은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상호작용이니까. 상호작용의 어떤 것이 물체를 당겨주는 것이지 물체 내부에서 내는 힘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체력, 근력 이런 것은 사실 우리 몸에 저장돼 있는 에너지를 얘기하는 것이지 뉴턴의 힘과는 전혀 다르다. 내가 걸어가는 것도 내 힘으로 걸어가는 게 아니다. 내가 한 발짝 걸을 때 왜 내가 움직이게 되느냐, 지구가 나를 밀워줘서 가는 것이다. 지구가 왜 밀어주느냐, 내가 지구를 밀기 때문이다. 내가 뒤로 미니까 지구가 반작용으로 나를 밀어줘서 내가 가는 것이지 내 힘으로 가는 게 아니다.
내가 지구를 못 밀면 어떻게 되느냐? 앞으로 못 간다. 완전히 매끄러운 얼음에서는 한 발짝도 못 간다. 내가 뒤로 지구를 밀 방법이 없으니까. 아래로 밀 수는 있지만, 아래로 미는 것 가지고는 위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못 간다. 그 이유는 내가 뒤로 지구를 밀어줘야 내가 앞으로 가는 데 매끄러우면 마찰력이 없어서 지구를 밀 방법이 없다. 꼼짝 못 하는 것이다.
그래서 뉴턴이 얘기하고 있는 힘은 뭔가에 의해서 내가 받는 상호작용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힘은 실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기본적인 상호작용을 네 가지로 보고 있는데, 입자들 간의 상호작용도 있는 것으로 친다. 없는 게 아니다. 가상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한 대상을 중심으로 볼 때에 그 대상에 미치는 힘이 뭔가에 의한 여러 개의 힘일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합력, 벡타적인 합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것을 명확하게 하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원
제가 했던 특강이 있는데, 근대 과학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에서부터 뉴턴까지 기존의 과학사가들이 어떻게 봤는지 다뤘다. 근대 과학이 테크닉으로보면 수학이지만 세계관으로 보면 철학이 깊이 관여되어 있는 발전 과정이기 때문에 보시고 참고하시면 좋겠다.
"근대 과학의 역사적 기원: <객관성의 칼날>" 이중원. 2020. 11. 7.
끝.
이상은 새자연철학세미나 제6회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조금 요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따로 하신 메모나 추가 질문, 토론 거리도 게시판이나 카톡으로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탈자, 띄어쓰기 제보도 대환영입니다.
녹취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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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우주의 역사와 운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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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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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 | 2025.01.28 | 1 | 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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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우주와 물질 - 개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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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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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 | 2025.01.27 | 1 | 337 |
'비스 비바'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글을 올렸습니다만, 이 용어를 처음 제시한 것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라이프니츠였습니다. 1686년 <악타 에루디토룸>이란 학술지에 낸 짧은 논문 "신이 운동의 양을 항상 보존한다는 자연법칙에 관한 데카르트의 주목할만한 오류의 간단한 증명"에서 데카르트가 '운동의 양(quantitas motus)'라 부른 것($m |\vec{v}|$)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스 비바(vis viva)'라고 새로 이름붙인 양($mv^2$)이 보존되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Gottfried Wilhelm Leibniz, "Brevis demonstratio erroris memorabilis Cartesii et aliorum circa legem naturalem, secundum quam volunt a Deo eandem semper quantitatem motus conservari; qua et in re mechanica abutuntur," Acta Eruditorum, 1686, pp. 161-163.
mv^2은 운동에너지 할 때 (1/2)mv^2밖에 못 봐서 제가 잘못 들었나 했어요. 바로 확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도 똑같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잘못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임 끝난 뒤 책이나 자료들을 열심히 뒤져 보아서 올바른 이야기로 바꾸어 적으러 애쓰고 있습니다. 비스 비바 나오는 부분은 고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비스 비바’는 운동에너지의 초기 개념이 맞습니다. 처음에 질량과 속력의 곱이, 그리고 속력 대신 방향을 고려한 속로를 써서 질량과 속도의 곱이 보존된다는 주장이 나온 뒤, 질량과 속도 제곱의 곱을 ‘비스 비바’라 부르면서, 이것이 보존된다는 이야기를 라이프니츠가 했습니다. 19세기 초에 토머스 영이 이 라틴어가 맘에 들지 않아서 영어로 energy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1867년쯤 나온 윌리엄 톰슨과 피터 거쓰리 타이트의 책에 처음으로 ‘운동에너지’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그 뒤로는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정리하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엄청나게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한 말 중에서 "데카르트는 관성 운동을 원 운동과 직선 운동으로 본다. 뉴턴은 원 운동은 관성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분은 실상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내용입니다. 데카르트가 원운동을 관성운동(자연스러운 운동)이라 보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적어보겠습니다.
"운동량 보존에 대한 얘기도 이미 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질량 곱하기 속도로만 생각을 한다."라고 제가 얘기했다면 명확히 틀린 것입니다. 실상 "질량 곱하기 속도"라는 표현이 데카르트의 책에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질량 곱하기 속력"입니다. 현재의 물리학 용어로는 '속도 velocity'가 방향까지 고려한 벡터 양의 이름이고, '속력 speed'은 크기만 고려한 스칼라 양의 이름입니다.
아, 그렇군요.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운동량 보존에 대한 얘기도 이미 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질량 곱하기 속도로만 생각을 한다."에서 '속도'를 '속력'으로만 고치면 될까요? 녹음을 들으면서 했는데 나름 요약하고 정리하다가 잘못 옮겼나봐요.
아닙니다. 제가 잘못 말한 것 같습니다. 강의실에서나 온라인 세미나에서는 기억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할 때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 확인해 보면 잘못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의 녹취에서는 ‘속도’만 ‘속력’으로 고치시면 됩니다. 데카르트가 원운동을 관성운동(자연스러운 운동)으로 여겼는지 여부는 생각보다 많이 복잡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기억에 의존하여 데카르트가 원운동을 관성운동으로 보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찾아보니까 데카르트의 텍스트에 해석의 유연성이 있습니다. 텍스트가 복잡하고 개념도 낯설다 보니 꽤 유명한 과학사학자들이 데카르트는 원운동을 관성운동으로 보았다고 적었습니다. 과학사 교과서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막상 데카르트의 텍스트를 다시 읽고 더 찾아보니까, 그러한 교과서의 설명이 잘못된 것이라는 논문도 여럿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