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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앎으로 푸른 미래를 가꾸는 사람들의 공부모임

새 자연철학 세미나

질량-무게, 중력질량-관성질량, 속도-속력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1-11-29 15:38
조회
4022

지난 번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몇 가지 물리학 고유의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몇 가지 용어쌍에 대해 저의 의견을 조금 더 적어보고자 합니다.

(1) 질량과 무게

중등과정의 과학교육에서는 질량과 무게가 다른 것임을 크게 강조합니다. '무게'는 어원을 따져보면 "무거움의 정도"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상 단어입니다. 한자어로 하면 '중량(重量)'이라 합니다. '질량(質量)'이란 단어에서 한자만을 따지면 그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가령 조선시대 문헌들이나 기타의 글에서 重量이나 이와 연결된 표현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質과 量의 두 글자를 조합한 표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두 글자를 붙여 놓은 것이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량(무게)과 질량을 구별해야 한다는 중등과학교육의 강조점은 가령 영어 표현 weight와 mass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이 구별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글 "질량개념의 의미와 간단한 역사"에서 적은 것처럼 1770년대에 처음으로 용수철을 이용한 저울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령 영어권에서 이 두 단어는 실질적으로 동의어였습니다. 지금도 일상어에서는 weight과 mass를 구별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영어 단어 mass는 '빵 반죽'을 의미하는 라틴어 massa에서 왔고, 이 말은 다시 그리스어 maza (μάζα)와 헤브루어 마세(מאַסע)에서 왔습니다. (가톨릭의 '미사 missa'가 영어로 Mass인데, 이것이 성체성사에서 빵을 먹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영어에서만 우연히 두 의미의 말이 한 단어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가령 독일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미사'가 Messe이고 '질량'은 Masse로 다른 단어를 씁니다.)

그러면 물리학, 더 넓게 말해 자연철학에서는 질량과 무게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그 구별에 대해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이전에 뉴턴의 자연철학을 공부할 때 현대 물리학과 너무나 확연하게 달라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뉴턴이 말하는 '물질의 양(Quantitas Materiae)'은 무게나 중량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의 물리학에서 본다면, 중량의 단위는 '힘'의 단위와 같고, 질량의 단위는 '힘'의 단위를 '가속도'의 단위로 나눈 것과 같으니까, 중량과 질량을 구별하는 것이 물리학 안에서는 의미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2) 관성질량과 중력질량

그런데 이러한 구별은 조금 더 어려운 문제로 연결됩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는 여덟 개의 정의로 시작하는데, 그 중 세 번째 정의가 "물질의 내재적 힘"입니다.

Definito III. Materiae vis insita est potentia resistendi, qua corpus unumquodque, quantum is se est, perseverat in statu suo vel quiescendi vel movendi unformiter in directum.

(Definition 3. Inherent force of matter is the power of resisting by which every body, so far as it is able, perseveres in its state either of resting or of moving uniformly straight forward.)

물질의 내재적 힘은 물체가 정지해 있거나 반듯하게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게 만드는 힘으로 정의합니다. 요즘의 용어로는 '관성(慣性)'입니다. 영어의 inertia와 같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원래 하던 식으로 그저 현상유지에 급급한 것을 '관성'이라고 흔히 부르는데, 내용상 같은 의미가 될 것입니다.

뉴턴의 책을 읽을 때 처음 만나는 난관이 바로 이 "물질의 내재적 힘" 또는 '관성'입니다. 현대의 물리학에는 이 개념과 딱 들어맞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저항력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공기저항 같은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물체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 속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이 이런 이상한 용어와 개념을 1687년에 출간된 그 책에서 계속 사용한 것은 당시의 자연철학에서 '임페투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임페투스라는 용어 자체는 14세기에 장 뷔리당이 만든 것이지만, 그 뿌리를 찾아보면 6세기 고대 헬레니즘 시기 그리스의 필로포누스까지 거슬러 갈 수 있고, 이 그리스 자연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방대한 번역 사업을 펼치고 그 번역된 책을 가지고 더 깊이 탐구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 이슬람 자연철학이 있습니다. 11세기의 이븐시나(아비케나)는 필로포누스의 이론을 더 확장했고, 12세기의 이슬람 자연철학자 누르 앗딘 알 비트루지(알페트라기우스)의 손을 거쳐 장 뷔리당이 이를 정리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ory_of_impetus

활을 떠난 화살이 운동할 수 있는 것은 손에서 전달된 임페투스가 화살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인데, 공기저항 같은 게 없다면 그 임페투스 때문에 화살이 그대로 반듯하게 일정한 빠르기로 날아갈 수 있을 겁니다. 공기저항 같은 것 때문에 화살에 전달된 임페투스는 주변에 흩어져 버립니다. 임페투스가 다 떨어지면 화살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뉴턴이 새로 정의한 '물질의 내재적 힘 vis insita'는 14세기의 '임페투스'와 같은 건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그와 유사합니다. 또 이 물질의 내재적 힘은 물질의 양에 비례합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물질의 양' 즉 '질량'은 일종의 '관성'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은 별로 없지만 20세기 중엽까지도 '질량'과 '관성'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뉴턴은 행성의 운동이 타원 궤적을 그린다면 태양과 행성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아래그림에 있는 명제 11 (문제 6)이 바로 그 증명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출처: Phil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힘, 즉 태양이 행성에 미치는 가해진 힘(vis impressa)은 단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합니다. 그런데 뉴턴의 책에서는 이 힘이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는 이야기는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의 물리학 교과서에 흔하게 나오는 $$ F = \frac{GMm}{r^2}$$라는 수식은 만유인력 또는보편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에 각각 비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수식은 뉴턴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초기의 서술은 1798년 헨리 캐븐디시의 것입니다. 1785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샤를-오귀스탱 쿨롱이 정전기에서 보이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전기를 띠고 있는 두 물체의 전기의 양(전하량)이 각각 비례한다는 것을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으로 밝히고 발표했습니다. 이를 $$ F = \frac{kQq}{r^2}$$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영국의자연철학자 존 미첼(John Mitchell 1724-1793)[https://en.wikipedia.org/wiki/John_Michell]는 1783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정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정교한 실험을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을 실제로 하지 못한 채 1793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 실험을 자신의 오랜 벗 대신 해서 성공한 사람이 헨리 케븐디시입니다.

위의 수식은 정전기력의 원천이 전하인 것처럼 중력의 원천이 질량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중력 질량'이란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정말로 중력의 원천이 질량, 즉 물질의 양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현상적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또 이 힘은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상 그 '질량'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여전히 논쟁적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캐븐디시의 수식에는 새로운 종류의 상수, 즉 뉴턴 중력상수 $G$가 도입됩니다. 캐븐디시의 논문의 제목은 "지구의 밀도를 결정하기 위한 실험 (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https://doi.org/10.1098/rstl.1798.0022]입니다.

수식을 $$ (m_I) g = \frac{G M_E (m_G)}{{R_E}^2}$$와 같이 써 놓고 관성질량 $m_I$와 중력질량 $m_G$가 같기 때문에 지표면에서의 중력가속도 $g$는 $$ g = \frac{G M_E }{{R_E}^2}$$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 좀 공허할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애초에 중력이라는 힘을 만들어낸다는 관념과 상태 변화에 대해 버팅기는 내재적 힘(관성)은 서로 무관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단순화시키면, 애초에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닌데, 굳이 다르다고 한 뒤에, 알고 보니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식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물리학 교과서에 "질량 X 가속도 = 힘"이라는 공식이 고전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버클리는 뉴턴 자연철학에서 '힘'이라는 관념이 일상적 경험이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상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하면서, '힘'이라는 개념을 전혀 도입하지 않고 운동을 설명하려 애를 썼습니다. 이와 달리 18세기 크로아티아(달마시아) 지역 출신의 자연철학자 루제르 보스코비치(Roger Joseph Boscovich [Ruđer Josip Bošković] 1711-1787)는 1758년에 초판이 간행된 Philosophiæ naturalis theoria redacta ad unicam legem virium in natura existentium (자연에 존재하는 단일한 힘들의 법칙만으로 유도한 자연철학의 이론)>에서 힘들 사이의 관계만으로 운동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Roger_Joseph_Boscovich]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이를 계승하여 이와 관련된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3) 속도와 속력

데카르트는 1630년쯤에 탈고한 <세계와 빛에 대한 논고 (Traité du monde et de la lumière)>와 1644년에 발표한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에서 충돌의 일반 원리를 다루면서, 임페투스와 유사한 운동량(momentum)의 보존을 주장했습니다. 임페투스처럼 운동량은 물질의 양이 많을수록 그리고 물체가 빠를수록 더 크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물체의 운동방향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실험을 직접 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책에 등장하는 충돌의 이론은 모두 틀려 있습니다.

1668년 영국 런던 왕립협회는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문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해 11월에 존 월리스(John Wallis)의 논문이 투고되었고, 12월에는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의 논문이 투고되었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의 논문도 투고되었습니다. 지금의 관점과 가장 가까운 것은 하위헌스의 논문이었습니다. 하위헌스는 운동량을 질량과 빠르기의 곱으로 볼 때 운동의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168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갈릴레오의 낙하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질량과 빠르기의 곱($m v$)이 아니라 질량에 빠르기 제곱을 곱한 양($m v^2$)을 고려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이 새로운 양을 '비스 비바(vis viva)' 즉 '살아 있는 힘 living force)'라 이름붙이고, 평형 상태에 있을 때의 힘 '비스 모르투아(vis mortua)' 즉 '죽어 있는 힘 dead force)'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질량에 빠르기 제곱을 곱한 양($m v^2$)의 중요성을 처음 지적한 것은 하위헌스였습니다. 지금 알려져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충돌과 흔들이(진자) 시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을 다루었습니다. 비스 비바 논쟁은 여러 면에서 곱씹어 볼만한 흥미로운 논쟁이지만 여기에서는 더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더 상세한 것은 아래 논문이 유용합니다.

Carolyn Iltis (1971). "Leibniz and the Vis Viva Controversy". Isis, Vol. 62, pp. 21-35.
George E. Smith (2006). "The vis viva dispute: A controversy at the dawn of dynamics". Physics Today 59, 10, 31-36; doi: http://dx.doi.org/10.1063/1.2387086

지금은 용어에 대한 글이라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거론되는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고자 합니다. 표준적인 물리학 용어로 빠르기의 크기만을 생각하는 양, 영어로 speed를 '속력(速力)'이라 하고, 빠르기의 크기와 방향까지 고려하는 양, 영어로 velocity를 '속도(速度)'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매우 혼동스럽고 부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크기만을 생각하는 양(흔히 맥스웰의 제안을 따라 '스칼라 양'이라 부릅니다)은 온도, 밀도, 경도, 강도 등과 같이 '~도(度)'를 접미어로 나타냅니다. 이와 달리 크기와 방향을 함께 생각하는 양(흔히 '벡터 양'이라 부릅니다)의 대표적인 예가 힘(force)입니다. 그래서 '속력(速力)'이라고 '~력'으로 된 용어는 벡터 양을 나타내고, '속도(速度)'와 같이 '~도'로 된 용어는 스칼라 양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일관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용어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 배울 때에는 무척 혼동스럽고 왜 그런 식으로 이름이 붙었는지 납득이 안 가는데, 그냥 그렇게 오랫 동안 써 오다 보니 익숙해져 버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관되지 못하고 무원칙스러운 용어법은 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장애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는 현재로서는 해결방법이 전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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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연 이지연
    2022-06-08 08:51

    Velocity vs Speed에 대응하는 번역에 있어서 속도와 속력간에 그런 혼동의 여지가 있었군요. 아마도 일본인들이 번역을 했을 것 같은데…벡터량와 스칼라량이라는 개념이 동양에서 체화해 받아들이기엔 조금 낯선 개념인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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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자세한 자료, 설명들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2025.06.09
1. 변별체의 존재 양상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공부할 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바로 위의 답글에 쓴 물의 온도를 재는 상황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장회익 선생님의 '변별체' 개념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측정장치 개념에서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하여 추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관적으로는 모종의 측정장치를 염두에 두면 이해가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입자물리학에서는 매우 다양한 측정장치 또는 검출장치를 사용합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세미나에서 인용하신 안개상자(cloud chamber)나 거품상자(bubble chamber)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겹실틈 실험에서 사용하는 사진건판도 변별체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loud_chamber https://en.wikipedia.org/wiki/Bubble_chamber 하지만 변별체가 측정장치/검출장치와 동의어는 아닙니다. 변별체는 물리적 작용을 통해 뭔가 흔적을 남길 수 있어야 하지만, 또 동시에 그것을 읽어내서 인식주체의 경험표상영역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변별체는 대상과 인식주체 사이에 놓인 가교 내지 창문의 역할을 합니다. (제가 장회익 선생님의 제안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 사진은 거품상자에서 기본입자가 만들어내는 궤적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사진 출처: pinterest]
2025.06.03
2.의 질문이 흥미롭습니다. '이해'라는 문제를 직접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대상과 변별체의 만남(조우)은 원래 인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알아채거나 기록하거나 기억하거나 그로부터 지식을 얻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대상과 변별체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하기에 이 세계 속의 수많은 물질적 존재자들은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부딪치고 멀어져갈 것입니다. 아주 먼 우주에서 행성과 혜성이 충돌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하간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흔적이 남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적 존재자에 생긴 흔적을 인식 주체인 '나' 또는 서술세계가 받아들이면 이제 그 흔적이 경험표상영역에 새겨집니다. 인식주체가 없었더라면 그냥 물질적 충돌에 불과했을 것이 이제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미묘하지만, 변별체와 경험표상영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변별체에 남은 흔적과 경험표상영역에 새겨진 정보는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50쪽의 그림 1-1에서 물질세계와 서술세계를 구별하는 점선을 넘나듭니다. 두 개의 네모 사이의 위아래 양쪽방향 화살표의 양면성입니다. 물질적 측면에서 보면 대상과 변별체가 만나서 흔적을 만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건'과 '빈-사건'이 일어납니다. 특정 변별체에 흔적이 남지 않는 것도 흔적이 남는 것 못지 않은 정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해'라는 말이 직접 연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세미나에서 인용한 폰노이만의 온도 측정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비커에 담긴 물의 온도를 재려면 온도계를 넣어 수은/알콜의 높이를 보아야 합니다. 이 때 비커의 물이 대상이고 온도계는 변별체가 됩니다. (2) 온도계 높이를 알기 위해서는 전등의 빛이 수은/알콜의 경계면에 닿았다가 눈의 망막으로 와야 합니다. 이 때 온도계의 높이는 대상이 되고 빛(빛알)이 변별체가 됩니다. (3) 빛이 망막에 입사되면 망막에 있는 시신경에 나트륨 원소가 모이거나 흩어져서 전류가 만들어집니다. 이 때 빛이 대상이라면 시신경의 전위차는 변별체가 됩니다. (4) 시신경의 전위차는 뇌의 피질에서 뉴런을 발화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대목에서 비커에 담긴 물의 온도를 읽어냅니다. (5) 그 다음 단계가 어렵습니다. 온도계의 높이든, 망막에 생기는 흔적이든, 시신경의 전위차든, 뉴런의 발화든 여하간 어느 단계에서 흔적의 기록이 정보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32-33쪽에 서술된 것처럼 역학 모드와 서술 모드를 구별합니다. 하지만 서술 모드만으로는 '이해'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하간 세 번째 모드로서 '의식 모드'가 작동을 해야 비로소 '이해'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라는 문제는 매우 어렵고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인츠 폰푀르스터의 <이해를 이해하기> 같은 저작이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Heinz Foerster (2003) Understanding Understanding: Essays on Cybernetics and Cognition. Springer. https://doi.org/10.1007/b97451
2025.06.03
3. 3차원 vs. 2+1차원에 대해서는 아래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 고대그리스-이슬람-중세유럽으로 이어지는 자연철학의 전통에서 세상의 중심은 지구였습니다. 지구 주위에는 일곱 행성(七曜) 즉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있고, 그 바깥에는 항성 천구가 있습니다. 지구는 네 개의 권역(구 껍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달의 천구 바로 아래에는 불의 권역이 있고, 그 아래로 차례로 숨/바람의 권역, 물의 권역, 흙의 권역이 있습니다. 뒤의 세 권역은 현대의 기권(氣圈, Atmosphere), 수권(水圈 Hydrosphere), 지권(地圈,Geosphere)에 대략 연결됩니다. 불의 권역은 현대의 열권(熱圈, Thermosphere)이나 전리층과 비슷합니다. 여하간, 세상(우주)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이며, 이 중심을 향하는 방향이나 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이 곧 수직 방향입니다. 이와 달리 지표면의 동서남북은 어느 쪽으로도 대등합니다. 이것이 바로 (2+1)차원의 세계입니다. 세계(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생겨나면서 수직 방향도 동서남북과 대등하지 않을까 하는 관념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펼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공간의 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세 개의 숫자 $(x, y, z)$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눈 앞에 펼쳐지는 육면체 모양의 방 안에서의 위치만이 아니라 온 우주 전체에서의 위치에도 해당합니다. 그러면 수직 방향이나 동서 방향이나 남북 방향이 모두 대등합니다. 데카르트에게 우주는 (2+1)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었습니다. [그림출처: Peter Apian (1529) Cosmographiae introductio]
2025.06.03
중요한 지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또 몇 가지 글에 대한 링크도 있었구요. 따로 답글도 있었는데 사라졌더라구요. 저의 부족한 글도 여하간 토론과 대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주시면 어떨까요?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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