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원리와 미적분
변화의 원리와 미적분
neomay33님이 "뉴턴이 미분법을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는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입니다. 제가 '아니오'라고 답하는 이유는 변화와 생성의 문제가 뉴턴 무렵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이후의 미분법과 적분법의 전개는 뉴턴의 방식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기호법과 방식을 따라 발전했기 때문에, 후대의 영향은 라이프니츠가 압도적으로 큽니다. (뉴턴이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논쟁에서 라이프니츠의 제자를 돈으로 매수하는 파렴치한 방법으로 런던 왕립협회 청문회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이지만, 후대의 영향 면에서도 뉴턴의 기여는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사의 이치를 변화에 대한 탐구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고는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 그리고 장현광보다 훨씬 먼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상세하게 이야기되었습니다. 변화와 생성을 부정한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그 제자들(특히 제논)의 주장에 반대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 만사의 본질은 바로 변화에 있음을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의 논쟁을 수용하여 변화의 기본 원리와 방식을 ‘자연론(타 퓌시카 τὰ φυσικὰ)‘과‘자연론 속편(타 메타 타 퓌시카 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ὰ)’에서 정교하게 다루었습니다. 여기에 그 유명한 형상원인, 질료원인, 운동원인, 최종원인(목적원인)에 대한 논의가 포함됩니다.
데카르트는 이 중 운동원인에 주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운동(運動 모투스 motus)’은 사실상의 모든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를 ‘위치의 변화(모투스 로칼리스 motus localis)’로 국한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온라인 세미나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데카르트는 널리 알려진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과 <철학의 원리>보다 앞서서 <방법에 대한 논의(방법서설)>을 먼저 썼습니다. 이 <방법서설>에 대해 철학사학자들은 그 서문에 해당하는 글만을 읽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 그 서문은 <방법서설>의 뒤에 있는 기하학, 굴절광학, 기상학을 위한 연구방법을 총론 격으로 다룬 것이었고, 기하학, 굴절광학, 기상학이 중요한 내용을 이룹니다. 또 데카르트는 1637년에 간행된 <방법서설>보다 앞서 1630년 무렵부터 <세계와 빛에 대한 논고 (Traité du monde et de la lumière)>를 집필했습니다. 대략 1633년쯤에는 탈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원고는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1664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지만, 이미 이 안에 운동에 관한 데카르트의 주장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방법서설>의 부록의 형태로 있던 "기하학(La Géométrie)"은 대수학의 방법으로 기하학의 문제를 풀 수 있음을 처음 제안하고 이를 상세하게 다룬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변화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미적분법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 변화 일반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수학적 도구를 만들어내게 된 동기 중에 데카르트의 이 저작이 있습니다. 물론 아이작 뉴턴도 이 책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위에서 간단하게 쓴 것처럼 변화와 생성의 문제는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과제였습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 정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였는데,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8세기 이후 이슬람 자연철학으로 옮겨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성과가 모두 아랍어로 번역되고 이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자연철학자들이 변화의 문제를 깊이 탐구합니다. 일상 언어로 된 서술뿐 아니라 다양한 기하학의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약간 과장이 될 수도 있지만, 변화의 문제를 곡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15세기에도 종종 이야기된 화제였습니다. 그런데 곡선이라는 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다루기가 어렵지만, 짧은 구간만 생각하면 짧은 직선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곡선을 짧은 직선들로 바꾸어 생각하자는 것이 소위 접선의 문제입니다. 이 대목에서 데카르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7-1665)가 등장합니다. (페르마의 출생년도는 오랫 동안 1601년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근에야 유아세례 기록과 여러 가지를 비교하여 1607년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실상 페르마는 데카르트의 <기하학>이 출간된 1637년보다 한 해 앞서 Methodus ad disquirendam maximam et minimam et de tangentibus linearum curvarum라는 제목의 원고를 완성하여 주위에 배포했기 때문에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공로는 페르마와 데카르트 두 사람 모두에게 돌립니다. 당대에는 누구에게 선취권을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페르마의 원고는 바로 곡선에서 최대가 되는 점과 최소가 되는 점, 그리고 어느 점에서 그 곡선에 가장 가까운 직선(즉 접선)을 구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실상 미분법의 효시라 할 만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페르마가 이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게 된 것이 그보다 앞선 시대의 프랑스의 수학자 프랑수와 비에트(François Viète 1540-1603) 덕분이라는 점입니다. 페르마는 전문적인 수학자가 아니라 고대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로망스어에 능통한 법률가이자 일종의 외교관으로서 수학 연구는 일종의 취미활동이었는데, 비에트가 남긴 저서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뉴턴의 지도교수격이었던 아이작 배로우는 유율법(method of fluxion)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변화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배로우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터 컬리지의 제1대 루카스 석좌교수였습니다. 제2대가 바로 뉴턴이었고, 배로우가 자신의 자리를 영특하고 오만한 젊은 학생에게 물려준 셈이었습니다. 배로우는 뉴턴이 학위논문을 쓰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게 도와 주었으며("이 대학에는 이 청년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교수가 없다."), 뉴턴이 교수로 취임할 때 신앙고백의 절차 때문에 겪을 수도 있었던 어려움을 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개발한 유율법의 아이디어를 고스란히 뉴턴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뉴턴은 배로우의 유율법을 발전시켜 미분법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뉴턴이 후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을 때, 그 거인은 가까이는 데카르트와 페르마와 배로우이지만, 멀리 보면 이슬람 자연철학자들과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뉴턴 자신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변화의 문제를 핵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는 사람은 누구나 느낄 것 같은데, 저는 그 책을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책 전체가 잘 짜여진 수학책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물론 공리, 정의, 정리, 명제, 증명 등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된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 책에서 '변화의 문제'를 추려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소위 '고전역학'에서 '변화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은 19세기 아일랜드의 수학자 윌리엄 로원 해밀턴이었습니다. 운동법칙 일반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에 주목했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고전역학을 뉴턴역학이라 부르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적분학의 역사를 다룬 고전으로
Carl B. Boyer (1955). The History of the Calculus and Its Conceptual Development.
가 유명합니다. 이 책의 2장은 "고대의 개념들"이고 3장은 "중세의 기여", 4장은 "세기의 기대"입니다. 5장에 가서야 비로소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등장합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미 고대 그리스와 중세 이슬람 및 중세 유럽 대학에서 미적분학과 관련된 여러 단초들이 있었고, 또 14세기부터 변화의 문제가 자연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이 되면서 미적분학으로 이어지게 되는 계기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뉴턴-라이프니츠 이후에도 다시 더 정교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미적분학이 발전했으니까, "뉴턴이 미분법을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와 아니다가 혼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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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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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가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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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물리법칙과 '나'라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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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이 답하고 있는 문제: 상태를 어떻게 서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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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너무 뻔한 질문을 한 것 같지만 뭐라도 질문을 올려야할 것 같아서 그냥 뒀는데, 결과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듣게 되었네요. 이렇게 상세하게 답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런데 어제 세미나 하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변화하지 않는 것은 나중 상태라는 것이 없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질량처럼 변화하지 않는 것은 늘 그대로니까 나중 상태라는 것도 없고 구할 필요도 없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빛이 좀 이상하더라구요. 빛은 질량도 없고 속도도 안 변하면서 움직이잖아요? 그럼 빛은 변하는 건가요 안 변하는 건가요? 빛은 나중 상태라는 게 없는 건가요? 어제 질문보다 더 이상한 질문인 것 같지만 좀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모든 변화는 불변을 전제합니다. 다른 무엇인가가 변하지 않아야만 무엇인가가 변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고유한 용어로서 '특성'과 '상태'가 있는데, '특성'은 대상에 대해 변화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질량이나 작용하는 힘(퍼텐셜) 같은 것이 특성입니다. 그리고 이는 동역학에서 '해밀턴 범함수'와 같은 수학적 장치로 표현됩니다.
동역학을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서술로 단순화할 때,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특성'이고 '어떠하다'에 해당하는 것이 '상태'입니다. 그런 점에서 '상태'라는 개념 자체가 항상 변화를 전제로 합니다.
빛이 변하는가 여부를 묻는 대신 '빛'이라는 '주어(무엇)'가 어떤 상태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술어(어떠하다)'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빛을 다루는 물리학 이론을 통틀어 광학이라고 부릅니다. 뉴턴도 여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빛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익숙한 다른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정을 하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대표적으로 "빛의 입자이론"과 "빛의 파동이론"이 있습니다.
뉴턴은 '입자(粒子)' 즉 알갱이 다시 말해 깨알이나 씨앗 같은 것의 운동과 변화를 서술하는 데 성공한 탓에 빛도 입자라고 보고 모든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같은 시대의 네덜란드 자연철학자 (요즘으로 말하면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이 입장에 반대합니다. 두 줄기의 빛이 만나도 서로 튕겨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파동(波動)' 즉 물결 같은 것과 같은 부류라고 본 거죠. 이 두 접근은 오랫 동안 서로 논쟁하면 싸웠습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소리의 파동이론 (음파)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소리의 입자 이론이라고 하면 낯선 느낌이 들지만, 소리를 '도레미파솔라시'라는 일곱 개의 기본원소들의 조합으로 보는 이론도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뭔가 입자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리를 파동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음향학)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19세기 초까지 뉴턴의 엄청난 권위에 짓눌려 빛도 일종의 입자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반박한 것이 1810년대 프랑스의 오귀스탱 프레넬과 영국의 토머스 영이었습니다. 빛을 일종의 입자로 보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에돌이(회절)나 간섭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1860년대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빛의 파동이론을 확립하여 일종의 파동(광파)으로 빛을 설명하는 것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빛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됩니다. 알갱이(입자)라면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이 되지만, 파동이라면 상태가 그렇게 단순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파동광학에 따르면 빛은 근본적으로 특정 위치에 '국소화'하지 않습니다. 즉 빛이 여기에 있다거나 저기에 있다거나 하는 말은 무의미하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빛에도 명확하게 운동량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기장의 세기/방향과 자기장의 세기/방향을 곱한 양에 비례합니다. 전자기학에서는 이것을 '포인팅 벡터'라 부릅니다. 어떤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은 아니고 이 개념을 처음 제안하고 밝힌 사람의 이름이 포인팅(John Henry Poynting)이라서 붙은 이름입니다. 1884년에 그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oynting_vector)
그런데 빛의 파동이론으로는 예를 들어 뜨거운 물체에서 나오는 복사(빛)의 분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양자이론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15살에 상상했다고 회고했듯이, 빛을 일종의 입자처럼 보면 달리는 자전거에서 거울을 보는 사고실험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전거의 속력이 광속과 같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것이죠.
하지만 돌이켜 보면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주장은 빛의 특성(주어적 속성;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라 더 익숙한 다른 것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서술모형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빛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네요.
입자냐 파동이냐도 서술모형이군요. 왠지 그동안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
이 '서술모형'이라는 개념과 용어는 장회익 선생님의 것입니다. 의미기반으로 제시된 것이 '서술공간', 서술모형', '서술양식'입니다. 다른 논문에서는 '서술형식'이라는 네 번째 의미기반도 논의하셨죠.
<과학과 메타과학>(신판) 6장 "이론과학의 성격과 유형" 중 164-165쪽, 174-176쪽에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도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입자-파동 이중성"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널리 퍼뜨리고 있고 교과서나 논문들에서조차 그 오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연철학적 성찰을 거치지 않은 물리학자의 논의에서는 1930년대에 뭐가 뭔지 모를 때 만들어져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덧칠된 "입자 파동 이중성"이란 사이비 개념이 이미 충분히 극복/해결되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리철학이나 물리학의 기초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합의된 사항이라서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도, 특히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위 대중과학의 저술들에는 그 관념이 수없이 반복/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스스로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 온 것에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상 실체에 대한 모형 선택의 문제는 대상 실체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이른바 '빛의 이중성' 문제가 제기되었고, ... 나아가 물질 입자들의 '파동성'을 말해주는 현상들이 나타나 '물질 입자 이중성'이라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 일반적으로 어떠한 서술모형을 택하느냐는 대상 실체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오직 어떠한 서술모형을 택할 때 대상 실체가 동역학적으로 더 간편하고 일관성 있게 서술되느냐에만 의존한다." [<과학과 메타과학>(2012) 176-177쪽.]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도 이 문제는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201-204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결국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논쟁은 이 알 수 없는 존재자에 대해 '입자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적합한지 아니면 '파동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적합한지에 대한 논쟁이었지만, 물리학자들은 대체로 물리학 이론이 말해 주는 것을 실체 자체라고 믿는 경향이 있어서, '서술 모형'의 문제를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도 사실상 일종의 실체로서의 '파동'은 없습니다. 양자역학의 서술모형은 '입자'입니다. 하지만 비슷해 보이는 양자전기역학에서는 서술모형이 '파동(마당)'입니다. 양자전기역학은 양자마당이론(양자장이론)의 일종인데,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서술모형으로 '파동(마당)'을 선택하고 이를 양자이론으로 서술합니다. '빛알'이라 부르는 빛의 한 서술은 양자역학이 아니라 양자전기역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자마당이론(양자장이론)에서는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서술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특성이 '파동'이고, '어떠하다'에 해당하는 상태가 바로 '입자'가 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반대로 '무엇'에 해당하는 특성이 '입자'이고, '어떠하다'에 해당하는 상태가 '파동함수'로 서술됩니다.] 현대입자물리학에서 흔히 '기본입자(소립자)'라 부르는 것은 양자마당이론에서 말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에너지-운동량 고유상태"를 '입자'라 부릅니다.)
빛 입자의 위치도 변하고, 운동량(방향)도 변하지 않을까요?
정말 재영피디아라고 해도 될 듯. 100원 어치 질문 넣으면 3000원 어치 대답 나오는 자판기 같기도 하고요~.
제가 쓰는 글이 어렵다고 하시고 자판기 같다고 하시니 좀 서운하네요. ^^ 자연철학 세미나에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싶어서 여기에 올라오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여러 자료들을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정리해서 제 나름의 대답을 올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어도 많이 참조합니다. 저도 자판기처럼 그렇게 자동으로 대답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