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뉴턴의 자연철학과 장현광의 자연철학
심학2도는 뉴턴의 역학을 통해 심학1도에서 제기된 예측적 앎의 빈 곳을 채워나가는 두 번째 디딤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 강의>는 역사적 접근이라는 씨줄과 개념적 접근이라는 날줄이 엮여 있는 입체적인 책입니다. 제가 심학2도에서 여쭤보고 싶은 질문은 역사적 접근에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뉴턴의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체계가 현대물리학에서 출발한 개념적 재구성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재구성의 과정에서 역사적 접근의 씨줄에 대한 단순화 또는 추상화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뉴턴의 자연철학은 현대물리학의 한 부분인 고전역학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더 설명하기 위해 2019년 12월에 이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에 썼던 글(https://bit.ly/3FAL57F)의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장현광이 "땅이 왜 떨어지지 않을까?"라고 물은 반면, 뉴턴이 "사과가 왜 떨어질까?"라고 물었다는 대조법은 디테일로 들어가면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하면, 동아시아의 어리석은 낡은 성리학적 사유와 유럽의 세련된 고급 자연과학이 대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과학혁명 이전에 유럽에서 500여년 동안 대학에서 활발하게 가르치고 토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은 동아시아 자연철학과 마찬가지로 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고 새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곤란해지긴 했죠. 뉴턴에 앞서 요하네스 케플러가 바로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듭니다. 뉴턴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그리고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수학적인 엄밀성을 더해 해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과와 달의 운동을 모두 동일한 법칙 내지 원리로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 뉴턴의 기여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달도 사과나 대포알처럼 사실은 떨어지는 것인데, 그 떨어지는 정도가 달라서 지구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발상이 놀라운 셈입니다.
(그림 출처: I. Newton. On the System of the World)
그러나 뉴턴이 "사과가 왜 떨어지나?" 하고 물었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뉴턴은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즉 중력의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기존의 논의들을 종합적으로 앞뒤가 맞도록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물체들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고 가정했을 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클리드 기하학과 유율법(초보적인 미분법)을 써서 케플러의 문제, 즉 행성이 타원궤적을 그리며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태양과 행성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항상 작용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턴 당시 사람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비롭게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뉴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특히 데카트르주의 물리학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접촉도 없이 서로
끌어당긴다는 주장은 신비주의였고 소위 '감추어진 속성 occult property'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뉴턴은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 hypotheses non fingo"
이 말은 보편중력(만유인력)은 가설이 아니라 행성의 운동과 사과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자연의 사실이며 법칙이라는 주장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엄청난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바로 200여년 뒤 아인슈타인을 통해서였습니다. 여전히 여러 과학 강연이나 수업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되고 가르쳐지지만, 일반상대성이론 이후의 이해에 따르면, 그런 보편중력은 힘이 아니며, 그런 신비주의적인 관념은 현대물리학의 국소 인과율과 상충합니다.
뉴턴을 맹종하던 사람들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보편중력(만유인력)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자연에 내재하는 기정사실인 것처럼 믿었지만, 가령 19세기 초에 활동하던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식을 동원하여 강요하는 뉴턴의 원격작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기와 자기의 작용을 힘의 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써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패러데이의 놀라운 아이디어를 세련된 수학언어로 번역한 것이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입니다.
맥스웰이 1873년에 발표한 <전기자기론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은 전기와 자기에 관련된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원격작용이라는 신비주의적이고 옳지 않은 관념을 동원할 필요가 없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름과 연결되곤 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은 다름 아니라 패러데이-맥스웰의 접근을 중력으로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심학1도와 심학2도를 비교할 때, 장현광은 예측적 앎의 중요성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지만 상태변화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들어설 자리를 비워 놓았던 반면, 뉴턴은 운동의 수학적 법칙을 찾아내고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보편중력(만유인력)으로 설명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적 접근에서는 부적절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 땅이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는 일은 장현광이 1631년 <우주설>과 그 부록에 해당하는 <답동문>에서 처음 한 일이 아닙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도 "이 문제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던 문제이며 여헌은 다시 이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며 그 함의에 대해 논의한다."(63쪽)라고 쓰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 널리 알려진 것은 주희(朱熹 1130-1200)의 여러 말들을 제자들과의 문답으로 엮은 <주자어류>(朱子語類 1270)입니다. 이와 관련된 논의로 김영식 선생님의 <주희의 자연철학>(예문서원)의 해당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하늘(天)은 땅(地)을 둘러싸고 있고, 땅은 그 중앙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하늘은 따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땅 아래에 있기도 하다. 하늘의 기(氣)는 끊임없이 땅 주위를 돈다. 사실 하늘의 기의 빠른 회전이야말로 땅의 무게를 떠받치는 것이다. 만약 회전이 잠시라도 멈춘다면 땅은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236쪽)
17세기 조선의 성리학자(즉 주자학자)인 장현광이 새삼스럽게 이미 주희가 잘 정리해 놓은 문제, 즉 마치 달걀의 노른자 주위에 있는 흰자가 끊임없이 돌고 있어서 노른자를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준다는 관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 같습니다. <우주설 답동문>을 차례로 읽어보면 장현광의 문제의식은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소옹의 말을 인용하면서 땅이 하늘 한 가운데 더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옛 선비가 말하기를 '하늘(天)은 형(形)에 의지하고, 땅(地)은 기(氣)에 기댄다' 했고, 또 말하기를 "하늘(天)은 땅(地)의 바깥을 포괄하고, 땅(地)은 하늘(天)의 가운데 있다' 했고, 또 말하기를 '기(氣) 바깥에 모름지기 껍질[軀殼]이 있어서 그 기(氣)를 고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하늘(天)은 기(氣)이고 땅(地)은 물질(質 - 바탕)입니다. 땅이 비록 가운데에서 물질(바탕)을 만들지만 이를 에워싸는 것은 하늘의 기(氣)이고, 이 기(氣)로써 지탱하므로 물질은 추락하지 않습니다. 기(氣)인 것은 혼륜(渾淪)의 원기(元氣)에서 오고, 굳세고 날래고 단단하고 튼튼해 본연 굉장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두껍고 무거운 대지를 전부 능히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복 옮김 <우주설> 143-144쪽;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63-64쪽)
어린아이의 질문에 답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것은 마치 뉴턴의 <광학 Opticks>의 부록 부분에 있는 "질문들 Queries"이 다른 사람의 질문이 아니라 뉴턴이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문제를 나열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장현광 자신이 제대로 답을 얻지 못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장현광이 제기하는 문제는 하늘을 구성하는 기(氣)의 본성이 가벼움과 비움이기 때문에 그 하늘을 떠받치는 껍질이 하늘 바깥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걀의 비유를 들자면, 노른자가 땅이고 흰자가 하늘이라면 그 바깥에 껍질이 있어야 흰자가 쉬지 않고 돌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 껍질이 지녀야 하는 속성을 상세하게 말합니다.
장현광 자신은 그런 껍질이 있다고 말한 소옹의 말이 실상 그리 큰 의미가 없음을 상세하게 논증합니다.
"무릇 천지간에서 생긴 것은, 모두 덮고 있는 하늘과 싣고 있는 땅 사이에 국한된다. 따라서 귀와 눈이 미치는 대상은 다만 천지의 안에 그칠 따름이다. 우리 사람 가운데 그 어느 누가 정신과 혼백이 없는 상황에서 능히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역시 귀와 눈을 써서 그 듣고 본 것에 의지하고, 소리와 색이 드러내는 것과 기(氣)의 조짐이 변화하는 것을 참고해 검토한 연후에야, 가히 그 사정을 탐구할 수 있고, 그 실상을 미루어 얻을 수 있다. 천지 밖의 경우,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가히 미칠 수 있는 곳인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소리와 빛깔을 느낄 것이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기(氣)의 조짐을 살필 것이며, 또 무엇으로 말미암아 준칙을 세우겠는가? 더욱이 유자의 학술은 반드시 앎(知)와 함(行)을 겸비해 앎으로써 함을 밝히고 함으로써 앎을 실천해야 한다. [중략] 그렇다면 천지 밖은 우리가 함으로써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어찌 앎으로써 미칠 수 있겠는가? 비록 앎으로써 미칠 수 있다 해도 거기엔 앎을 쓸 데가 없을 텐데, 하물며 앎을 증험할 길이 없음에랴?" (이기복 옮김 <우주론> 150-152쪽)
이렇게 보면, 장현광의 관심은 "땅이 왜 떨어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하늘 밖에 또 다른 무슨 껍질 같은 것이 있다는 논의가 무의미함을 논증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과도 상통하는 접근일 것입니다.
이와 대비하여 뉴턴은 실상 결과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가설에 불과한 역제곱힘, 즉 만유인력 또는 보편중력을 도입한 것이라서, 장현광보다 조심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는 세상의 중심이 지구이고 달의 천구 위와 달의 천구 아래에서 작동하는 원리가 다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땅이 왜 떨어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이후 세상의 중심이 태양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퍼진 뒤에 뉴턴 같은 사람이 더 정직하게 사유를 했다면, 왜 태양이 세상의 중심인지 의심하고 태양을 붙잡고 있는 일종의 '껍질(구각)' 같은 것이 있는지 스스로 물었어야 합니다. 장현광은 주희와 소옹의 성리학적 자연철학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를 가져오면서 실상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그런 '껍질(구각)'의 존재를 의심한 반면, 뉴턴은 기하학 계산에 심취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데 실패했고, 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진 원격작용을 가정해 버렸습니다.
뉴턴의 책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간된 후 유럽 대륙의 데카르트주의 자연철학자들은 그 책을 "훌륭한 수학책이지만 물리학은 없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이는 뉴턴의 과격하고 사변적인 존재론적 주장이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질문은, 심학2도는 현대물리학의 일부로서 고전역학의 개념틀이기 때문에, 뉴턴의 자연철학과는 명확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장현광의 자연철학이 오히려 뉴턴의 사변적인 자연철학보다 우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학2도의 제목이 "고전역학"인 것은 그 역사적 지평과 달리 실상 뉴턴의 자연철학이 아니라 현대물리학에서도 상세하게 연구되고 있는 고전역학의 기본 개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더 들어가 보면, 고전역학이라 부르는 물리학 이론의 접근은 뉴턴의 자연철학과 공유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부분, 실험이나 이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과감하게 존재론적 가정을 하고 그 가정 또는 가설에 입각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하늘과 땅의 바깥에 껍질(구각)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장현광과 달리 과감한 존재론적 가설을 도입해 버리는 뉴턴 자연철학의 부주의함을 고전역학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컨대 저의 질문은 심학2도의 '고전역학'은 2장의 역사지평에서 상세하게 소개된 뉴턴이나 데카르트와는 별개로 현대물리학에 정착된 고전역학으로 이해해야 옳은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엄격하게 따지면 뉴턴의 자연철학을 장현광의 자연철학과 비교하여 살펴볼 때 뉴턴보다 장현광이 더 우월한 점이 많이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학십도의 구성이 심우십도의 맥락과 연결된다고 할 때, 자연스럽게 뒷쪽으로 갈수록 더 발전되고 심화된 것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성학십도는 열 개의 그림에서 순서나 심화의 정도가 순차적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게 볼 때 마치 장현광의 사유를 기반으로 한 심학1도는 아직 "이론이 들어설 자리"가 비어 있는, 어딘가 부족하고 열등한 사유인 반면, 뉴턴과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이 들어간 심학2도는 더 우월하고 빈 곳이 차 있는 사유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판단으로는 두 심학도에서 비교되는 것은 17세기 성리학적 자연철학에 기반을 둔 장현광의 사유와 19세기까지 정교하게 발전해 온 물리학의 이론 중 하나인 고전역학의 관점입니다. 데카르트와 뉴턴이 첫 걸음을 뗀 뒤 오일러, 라그랑주, 해밀턴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더 발전시키고 심화시켜 만들어낸 대단히 정교한 고전역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과 복잡계이론의 다양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21세기까지 살아남은 강력한 이론체계라는 점에서 17세기 장현광의 소박한 자연철학적 사유와 단순 비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이와 연결되는 또 다른 질문은 심학1도에서 장현광의 사유가 도입된 직후에 심학2도에서 바로 고전역학의 정교한 체계가 등장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전역학의 틀을 심학1도로 놓고 이와 다른 대안적 접근으로 장현광의 자연철학을 소개하는 방식은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심학1도가 동떨어진 느낌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함께 이야기나눌 것이 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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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김재영선생님의 글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니 김재영선생님의 박식과 날카로운 관점이 왜캐 더 놀라운지요? 그리고 저 자신이 조금 이해가 깊어졌다고 느껴지는게 대견스럽네요ㅎㅎ 전에는 이렇듯 풍부한 역사적 연원들이 안그래도 어려운 내용인데 더 복잡하고 어렵다고 느끼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이해를 풍부하게 도와줌을 느끼게 됐네요. 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