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5회 차 세미나 소감 및 의문들"에 대한 의견
“5회 차 세미나 소감 및 의문들”에 대한 의견
먼저 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모임에 적극 참석해주심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특히 많은 분량의 소감과 의문을 제기해주신 점 그 성의가 놀랍습니다. 질문의 폭이 워낙 넓어서 내가 그 전체를 파악했는지도 잘 가늠하기 어려워 내 나름대로 10가지 부분을 추려서 조목별로 내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파란색 글은 "5회 차 세미나 소감 및 의문들"(겨울나무) 중에서 가져온 질문입니다.)
(1) '2021년을 사는 한국인은 15세기의 동양(성리학) 텍스트보다, 어떤 점에서 15세기 서구(유럽)의 텍스트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구화되어 있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옛 동양의 텍스트가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사유하고자 했다면, 우리가 독해하고자 하는 동양의 사유가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이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의문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우리 저작은 특히 자연과학 관련 저작은 성리학에서 출발하지 않지요. 그렇다고 우리의 잃어버린 뿌리를 연결해보는 시도는 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내 경우는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시도했지요. 책에 그 취지를 잘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전례가 없는 방식이겠으나, 열 가지 주제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출발하여 주로 서구에서 성취된 내용들을 섭렵한 후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해 본래 우리가 지녔던 학문적 염원이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형태를 취했다. 즉 제1장 우주설(답동문 포함)에 나타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근대 서구 과학이 그 내용을 어떻게 채워왔는가를 알아본 후 다시 제10장에서 이 모두를 태극도설의 구도와 비교하여 논의함으로써 ‘삶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학문 전통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를 살펴보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문화의 풍토에 바탕을 놓고 그간 서구 과학이 얻어낸 내용들을 우리의 관념 틀 속에서 파악하여 결국은 우리의 지적 자산으로 삼아보자는 자세이다. 달리 말해 우리 전통학문의 뿌리와 둥치를 찾아 그 위에 서구 학문을 접붙여 성장시킨 후 다시 우리의 풍토에서 결실을 맺게 하자는 취지라 할 수 있다.” (책 15쪽)
나는 이러한 시도가 가능함을 보였고, 또 할 수만 있으면 더 해보도록 장려할 일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무의미하다거나 유해하다면 당연히 피해야겠지만, 내가 보기에 매우 적절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책 자체가 말해주고 있으며, 여기에 대한 의문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2)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 대한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많은 맥락이 있긴 하지만, 오독의 여지를 막고 구체적이고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를 내적으로 충실히 읽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 ‘근대학문을 그렇게 정의하는 게 타당한가? 그 기준이 근대학문과 고전학문을 가르는 기준으로 충분한 건가? 설령 그게 타당하다고 해도, 장현광의 성리학적 맥락을 제외하고 특정한 구절을 뽑아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건 적절한가?
이 점은 내 자신의 학문관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이견의 여지가 있으리라 봅니다. 아마도 내 책 39쪽에 나오는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우리의 학문 전통 안에서 성학십도가 간행된 1570년을 고전학문의 정점이라 칭한다면, 우주요괄첩이 작성된 1571년을 근대학문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요괄첩 안에 근대학문의 맹아가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 때문에 하는 이야기겠는데, 여기서는 분명히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라는 단서가 붙었고,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우주설과 특히 답동문에서 근대과학의 단초로 보이는 싹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장현광의 학문은 당연히 성리학의 일부이지만, 그 안에 나타나는 근대과학적 면모를 굳이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한 명시적 과장이었고, 또 근대학문의 정의에 대한 나름의 문제제기로 여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이것은 결국 이 책의 곁가지에 불과하고 논의의 주된 흐름과는 대체로 무관한 부분입니다.
(4)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보다 더 와닿았던 의문은, 근대를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크게 없는 것 같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근대를 그렇게 이해해도 저 짤막한 한 구절에는 내포되어 있는 명제, 판단, 사실들이 꽤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 문장은 내재적인 것 뿐만 아니라 관계적인 맥락 안에서도 의미를 부여받으니까요) 굳이 거창한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근대라는 단어에는 대단한 성과를 내놓은 근대과학의 발판으로서의 ‘자주적 정신’이라는 아우라가 있으며 이미 그 순간 근대와 관련된 여러 담론과 무관하지 않아집니다.
그 잣대로 보는 순간 장현광의 사상은 서구적 근대(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절로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와 유사한 정도만큼 독창적이고 선구적이지만, 서구의 근대라는 정상성과 비교해 불완전하고 미흡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메인 텍스트에서 동양 사상의 그런 불완전함, 미흡함에 대해 지적을 많이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장현광의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게 불가능했는지(프랑수아 줄리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왕부지에게 창조사상이 불가능함을 이론적으로 가늠하여 그에 따른 근본적 차이를 헤아려 보기 위함이다.”(운행과 창조,22))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자리잡기 힘들다고 생각(고민을 한다고 해도 피상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현광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기 때문에.
내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근대과학을 근대학문의 표본으로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선상에 장현광의 학문 정신을 놓아도 큰 손상이 없기에 그렇게 놓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책에 분명히 밝힌 바와 같이 이것이 살아있는 근대학문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의 언급은 바로 장현광 학문의 그러한 한 측면을 밝힌 것일 뿐 장현광 학문론을 말한 것은 아니기에 장현광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는다든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는 말은 그리 적합한 표현이 아닙니다.
(5) ‘책 초반에 <<성학십도>>와 <<심우십도>>가 “형식적 보조적 기능 이상의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 아니지만”이라고 나와 있으나 사실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닌가?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렇게 실질적 의미를 담는 게 타당한 건가? 설령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만 했다고 하더라도 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은 적절했는가?’ 저는 저 두 텍스트가 선생님이 초반에 말씀하신 대로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으로 사용되었다고 했을 때도 의문점이 있었고,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책에서 그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을 때도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전자는,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만 했다고 하더라도 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했냐는 질문입니다. <<성학십도>>와 <<심우십도>>가, 메인 텍스트(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안에서 인용되고 사용되는 방식이 텍스트의 본 뜻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게 이렇게 사용되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본래 심우도에서 牛를 통해 표상하고자 했던 앎의 대상은 我, 子我, 心 등과 같은 대상이고, 이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空을 깨달아 금강경 식으로 말하자면 중생을 제도 하는 과정을 담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 인용하는 방식은, ‘앎’이라는 추상적인 키워드만 유사하다는 점에서, <<심우십도>> 본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이 모두 무너진 채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 책 서문에 있는 다음 문장들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들에 내가 이들을 활용한 취지가 잘 들어나 있으며 이로 인해 <<심우십도>> 본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이 모두 무너진 채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적절한 지적이 아닙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곽암의 심우십도는 한 개인이 자신 속에 내재된 참 자아 곧 불성(佛性)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곽암의 심우십도는 적어도 그 형식에 있어서 단순한 하나의 우화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한 목우자(牧牛子)가 거친 산천을 헤매면서 소 한 마리를 찾아 포획한 다음 이를 어렵사리 길들여 타고 돌아오는 과정들을 목가적(牧歌的)으로 그리고 있는 열편의 그림이며, 여기에 다시 아름다운 열편의 연작시(連作詩)를 첨부해 놓은 것이다. 모든 우화가 그러하듯 명시적으로는 이 소가 무엇을 상징하며 또 목우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단지 불가(佛家)의 한 큰 스승이 이것을 만들었고 또 말하지 않아도 그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기에 이후 이 작품에 대한 많은 종교적 해설이 덧붙여져 전수되어 왔을 뿐이다.
그런데 매우 우연하게도 나는 이 열 편의 그림과 연작시가 인류 지성사의 주요 과정 특히 자연의 기본 원리를 찾아 온 역사적 계기들을 담아낼 아주 적절한 상징체계임을 발견했다. 이는 본 창작자인 곽암 선사로서는 전혀 기대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사실일 테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를 표현할 무척 폭넓은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틀’을 제공한 셈이다. 사실 나 자신은 심우십도보다도 성학십도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이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새로운 열 개의 도식으로 성학십도 이후의 학문 전개 과정을 표현해 보려 시도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에 심우십도에 생각이 미쳤고, 이를 음미해본 결과 심우십도의 그림과 거기에 부수된 연작시를 바탕에 까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책 6~7쪽)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최대한 수용하여 새로운 대중적 소통방식을 찾는 동시에 일견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두 형태의 ‘그림’을 함께 사용하여 이들이 지닌 장점을 모두 활용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우침도 아니고 성리학이 담고 있는 학문적 가르침도 아니다. 오히려 성리학 이후 새롭게 전개된 앎의 지평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넓혀져 왔는가 하는 것을 되도록 탐구자의 입장에 서서 되짚어 나가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인류의 집합적 지성이 수 백 년에 걸쳐 이루어낸 성취이지만 이 시대에 사는 각 개인이 이를 자신의 지적 영역 안에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직접 구도자의 입장에 서서 이 과정을 실감 있게 되밟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과정은 심우십도가 보여주고 있는 구도자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며, 동시에 하나하나의 지적 성취가 진행됨에 따라 그 주된 요지를 간결한 도식 안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성학십도의 형식을 본받을 수 있다." (책 13~14쪽)
(6) 후자의 질문은, 메인 텍스트에서 <<성학십도>>나 <<심우십도>>가 - 특히 <<성학십도>>가 - 보조적, 형식적 기능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는 것 아닌지, 그런 위치에 놓는 것은 타당한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제가 특히 <<성학십도>>가 단순한 보조적, 형식적 기능 이상의 위치에 놓여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이게 통합적 앎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체계이자 일관된 스토리 또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7)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성학십도>>나 <<심우십도>>는 대상으로 삼았던 나름의 맥락을 지닌 앎이 있었고, 그 앎을 각자 성리학적, 불교적 세계관 안에서 해설한 텍스트입니다. 각각의 그림은 각 장마다 내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그림과 관계적으로도, 그리고 ‘십도’라고 하는 전체적으로도 담긴 의미가 있을 만큼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단순히, 통합적 앎을 추구했던 전형으로서 껍데기만을 이용하는 순간, ‘본 텍스트가 지닌 내적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학십도>>가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고 해서, 그게 <<성학십도>>의 틀을 차용한 <<심학십도>>가 통합적인 세계관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는 아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껍데기 보다 더 중요한 건 통합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구체적인 서사, 그리고 각 앎의 바탕 구도 사이의 관계, 앎의 바탕 구도와 서사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성학십도>와 <심학십도>의 구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단지 10개의 도식으로 나타낸다는 그 요약 방식만 채용했을 뿐이지요.
요약하면 내가 이 두 십도를 채용한 것은 위에 소개한 내 책의 설명 속에 들어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용이 결코 그 두 십도를 훼손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8) 2회 차 세미나 질문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의 자연철학을 좇는다고 했을 때, 선생님의 자연철학은 그것과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 단순히 복고주의인가? 아니면 진보가 있었나?” 이 질문은 앞서 ‘장현광과 근대’와 관련된 질문과 유사한 맥락에서 던진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애초에 현재와 같이 분화되고, 복잡해진, 기능화된 사회에서 ‘통합적인 사고’를 하려고 하는 행위가 과거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고(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복고주의로 회귀할 경우에는 과거에는 이랬으니 이걸 따라서 현재에도 해보자, 그걸 본받자 등과 같은 피상적인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서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내재적인 독해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결과가 그 피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9) 과거에 성리학적 세계나 스토아학파적 세계에서 제시한 통합적 세계관, 통합적 사고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에는 왜 그런 통합적 사고가 점차 없어진 걸까? 이 두 질문을 깊이 파고들어봐야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그럼으로써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통합적 사고의 틀을 직조하는 게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고전학문의 통합지향 정신을 본받자는 것이지, 단순한 복고주의나 그 형식에 매몰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향하는 통합은 이들에 무관하게 내 책 전체를 통해 녹아 있습니다. 당연히 고전적 통합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내 책에 대한 완전한 오독입니다. 더구나 “내재적인 독해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결과가 그 피상성이라는” 이상한 주장은 이 상황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10) ‘십도十圖를 “말로 전하기 어려운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랬나? <<성학십도>>의 독자는 선조가 아니었던가? 이건 士들이 해석하고 소비하는 텍스트였는데, 그렇다면 이건 대중에게 전체 그림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특정 과목의 중간고사 범위의 내용을 교육받은 학생들에게 선생이 제공하는 요약본에 가까운 건 아닐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전의 지식 없이 10개의 그림만으로 그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어느 정도 교육이 있다면 이를 잘 요약 정리한 도식들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나도 새로 <심학십도>를 제정해본 것인데, 전체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줄거리가 무엇인지를 회상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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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직접 답변을 달아주셔서 너무 당황했습니다... ㅎㅎ 사이트는 안 보시는 줄 알았거든요. 책을 같이 읽는 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해보면 좋겠다 싶어 남긴 글이었는데... 이런 긴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글도 있었군요... 알고보니 이 곳 게시판은 보물창고~!!! 심우도라는 깨달음으로 이르는 데 유용한? 종교적 틀을 갖다가 지적 추구의 끝판왕? 온전한 앎의 틀로 쓰신 데 대해 장회익교수님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고 느꼈습니다. 본문을 죽 읽다보니 지적 역사를 고찰할 때, 은근히 학문과 학문 사이의 벽이랄까, 다름을 보느냐, 차이를 보느냐 같은 관점간의 껄끄러운 마찰, 균열이 느껴집니다. 저처럼 학자계통이 아닌 사람이 볼 때 그저 혜안이요, 통찰에 놀라게 되는 것을~~!! 그래선가 창창~ 맞대음을 내며 논의를 풀어가는 글 읽는 재미는 최고입니다. ㅎㅎ
장회익선생님 글을 찾아내셨네요! 이 글도 이번 모임 읽을거리에 넣을까말까 고민하다가 참았더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