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문] 5회차 : 개인윤리와 자연과학의 통합
[용어 정리]
공백성 [공백 형태의 시공 개념] : 시공 개념이 시공 위에서 나타나는 여타의 현상들과 철저히 분리 가능한 개념을 이루는 정도. 즉, 시공 안의 사물과 시공을 대비하여 이해하는 정도.
사례 :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
적재성 [적재 형태의 시공 개념] : 시공 개념이 얼마나 많은 사물의 다양성을 함축하는 정도. 즉, 시공 개념이 현상의 많은 속성을 함축하는 정도. (사물의 속성이 사물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 속에 있다는 관점을 전제).
사례 :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공 개념 속에 중력의 효과를 본질적으로 삽입한다
화두나 문제의식을 계발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앞으로의 공부 의지를 다짐하는 것으로 소감문의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여헌의 말 중에서 다음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 자못 상수학에 뜻을 두어 헛되이 마음과 몸을 허비하였다. 근래에 생각해보니, 유익함이 없었고 미혹함만 거듭했다는 후회가 있다.(국역여헌집 229쪽)" / "산수 한 가지를 생각해보라. 지극히 적은 것으로 무궁하게 많은 것을 헤아리고 지극히 간략한 것으로 무한하게 넓은 것을 헤아리며 산천의 넓고 멂과 천지의 높고 큼, 사시의 일월의 운행을 추측함에 이르러도 모두 이것으로 헤아리고 미루어 다할 수 있으며, 그 쓰이는 바가 크고 신묘하다. 그대는 아직 젊고 힘이 있으니, 책 읽는 여가에 반드시 산수에 유념하여 힘써 그 방법을 다 알도록 하라.(국역여헌집 205쪽)"
상수학 공부가 우주를 (공백적 사유 없이) 적재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라면, 산수 공부는 우주를 공백적 및 적재적으로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수학은 시간 자체가 우주의 모든 사물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우리가 주변에서 관찰하는 사건과 상관없이) 다만 수로 파악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머리를 탁 친 구절이 있었습니다. 소응의 상수학과 관련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일상 생활 속에서 지지받는 측면이 있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불가피하게 생활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즉, 사물이 성취되는 것은 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철학적 지혜는 삶의 현장에서 좋은 방향으로 보상받았을 수가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실험적 지지는 아니지만) 일상경험적 지지를 받아온 일면이 있는 것이다."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산수 공부 없이 (마치 상수학 공부처럼) 사물의 현상을 설명하는 적재적 우주관을 공부하는 그 동기가 '일상 생활 속 지지' 풀어 말해서 일상 생활 속에서 심리적인 '불안'을 다스리고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미래와 관련해서 불안이 일어날 때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사상을 가지면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연과학이 빠진 인문학 공부를 왜 하는 것일까?'라고 물었을 때 '그 인문학이 세상에 관한 나름의 이론을 내놓으면 그 이론을 통해 '심리적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생각을하였습니다.
제가 과거에 했던 <사상>에 관한 공부가 상수학 공부와 대응한다면, <과학> 공부는 산수 공부와 대응할 것 같습니다.
사상 공부는 심리적인 보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대중 인문학 강좌'들이 대학 밖의 시장 안에서도 (산업 규모가 크진 않을 지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받는 보상이 있기 때문에 돈을 내고 (학위와 상관없이) 공부를 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상 공부로는 '정밀한 예측'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방역을 예측하는 백신을 만든다던가, 안보를 위해 성공적인 타격을 예측하는 무기를 만든다던가, (사회과학으로 보자면) 어떤 보건 정책이 다른 보건 정책과 비교하여 어떤 결과값에 대하여 더 효과적인이 정량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일상 생활 속 지지랄까요, 심리적 보상을 위해서 '사상 강좌'는 찾아서 듣지만 생리학이나 무기 기술학, 또 (사회과학으로서) 보건 정책학 같은 것을 찾아듣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전문가>들만이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측적 앎'을 선사해주는 과학은 마치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유의미하고 보상을 주는 것이지만, (전문가를 제외하고) 업무에 과학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못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 그 대신 대중 인문학 강좌를 찾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공부하는 지인과 작은 토론을 했습니다. 윤리학을 공부하는 데 과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쟁점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라는 윤리적인 교훈을 얻고 그것에 충분히 동의하면 과학 공부는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 지인의 주장이었는데요. 과학 공부를 해서 얻을 윤리적 결론과 똑같은 결론을 과학 공부 없이도 얻을 수 있으면, 그냥 그 결론만 배우는 것이 훨씬 편하고 덜 부담스럽지 않겠냐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좀 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결론만 요약하면 "자연을 지성으로 사랑하라. 그것이 너에게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한 일을 하는 것이 곧 덕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거든요. 저는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곧 자연을 지성으로 사랑하는 일이라서 행복한 일이고, 그래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 중에 핵심이 과학 공부가 아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인은 과학 공부가 뭐가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심리적 보상이 (다른 경로를 통한 보상과 비교해서) 특별히 더 나을 것이 있냐는 거지요.
물론 첫째로, '예측'만을 목표로 하면 과학 공부가 행복하냐 안 행복하냐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측에 성공하느냐,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의 설명력이 실험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느냐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아마추어의 과학 공부를 '인간의 윤리'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으로 일축한다면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독특한 한 개인이 호기심이 있어서 과학 공부가 재밌다는데 무엇을 문제 삼겠습니까.
셋째로, 과학 공부를 통해 결론내릴 수 있는 윤리적 결론이 (과학 공부 없이) '누군가'에게는 좀 더 쉬운 사상 공부를 통해서도 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윤리적 효과가 만약에 동일하다면, 과학 공부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과학 없이 사상 공부만 해도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연철학 공부를 하면서 위 세 질문에 모두 다른 대답을 저의 체험을 통해서 내놓고 싶습니다.
첫째로, '예측'적 앎이 예측이라는 보상만 주는 것이 아니라 대생 지식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일에도 모종의 보상을 줄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어떠한 보상을 주는지 체험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래서 실제로 정밀한 예측을 해야 하는 산업 현장의 전문가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과학 공부가 어떠한 의미와 보상을 주는지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이 경험은 제 개인의 경험일 것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일반화할 수는 없고 다만 어떤 실마리 정도를 잡는 것일 것입니다). 즉, 과학 공부가 호기심을 갖는 몇몇 개인들의 취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해볼만한 작업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실험은 아니고) 시험해보려는 것입니다.
셋째로, 과학이 빠진 채 사상 공부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결론을 과학 공부를 통해서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을 때, (애초에 경로가 다른 데 내용이 닮아있다고 해서 동일한 결론으로 볼 수 있을지도 문제이지만), 과학으로 윤리적 결론에 이르는 작업이 갖는 차별적 힘이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그 힘이 무엇인지 체험해볼 것입니다. 예컨대 '동학-천도교'이나 '천주교' 등의 생명 사상 내지는 생태 사상을 통해서도 나 자신을 낱생명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더 거대한 생명의 일부분으로 보면서 온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자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과 비교하여 자연철학을 통해 온생명론을 통찰했을 때의 차별화된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문제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이 정도의 넓은 관심 주제를 염두하면서 앞으로 자연 철학을 공부해나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제 안에서 윤리학 공부와 자연과학 공부가 어떻게 통합되는지 관찰하면서 그 통합의 원리를 이해하고 언어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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