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가치의 얽힘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1-11-02 11:52
조회
4252
힐러리 퍼트남과 사실/가치 이분법(Fact/Value dichotomy)의 붕괴
과학철학, 수학철학, 언어철학에서 여러 연구를 남긴 분석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이 주장한 것처럼 사실-가치의 이분법적 구별은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가치와 독립된 사실이 따로 있다거나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은 가령 "과학의 가치중립성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잘못된 믿음입니다.
사실/가치의 구별보다 더 익숙한 개념은 사실/당위의 구별입니다. 흔히 영어 표현을 써서 Is-Ought 문제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당위'라고 표현한 Ought는 "이러저러하다"와 구별되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의미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결국 가치판단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후의 서술에서는 '가치'라는 말을 머리속에서 그냥 '당위'로 바꾸어 읽어도 됩니다.
퍼트남은 2000년 노스웨스턴 대학의 강연에서 사실/가치 이분법의 붕괴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Putnam, Hilary. The Collapse of th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https://bit.ly/3k6XiJ9
사실/가치의 이분법은 데이비드 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퍼트남은 사실/가치의 구별이 곧 이분법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퍼트남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미국의 분석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은 1951년 무렵 논리실증주의/논리경험주의에서 오랫동안 신봉되어 오던 분석적 지식과 종합적 지식의 이분법을 심각하게 공격했습니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다름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고 널리 퍼뜨린 것은 이마누엘 칸트입니다.
흥미롭게도 칸트의 이러한 구분도 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흄은 사실의 세계와 관념의 관계를 구별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흄의 독특하고 고유한 존재론과 의미론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실에 대한 명제들로부터 가치에 대한 명제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흄의 주장을 널리 받아들이면서 그 주장의 근거를 깊이 살피지 않았습니다. 1903년 <윤리학의 원리>를 발표한 조지 무어는 그냥 단순히 윤리적 가치와 미추의 판단을 수반하는 지식과 사실에 대한 지식을 혼동하는 것이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말했습니다. 벌써 100여년이 지난 낡은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나오며, 이 말에 대해 심각한 도전은 오히려 적은 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어의 책이 보편적으로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섞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 아닙니다. 무어의 주된 관심은 이른바 자연주의 윤리학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비자연주의 윤리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주의 윤리학이 지닐 수 있는 맹점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윤리학은 윤리의 근거를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도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므로, 윤리학 전체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자연주의 윤리학은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너무 좁게 해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사실/가치의 얽힘은 자연주의 윤리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퍼트남은 저명한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의 논의를 많이 가져오고 있습니다. 센은 빈곤에 대한 경제학적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센은 정책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 평생 깊이 고민했습니다. 경제학의 문제에서 사실과 가치를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실이라 부르는 것을 선택한 단계에서부터 이미 가치에 대한 판단이 개입합니다. 사회과학적 맥락에서는 사실과 가치의 분리라는 논제가 매우 의심스러운데, 이러한 사정은 자연과학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지난 70여년 동안 전개된 사상적 조류입니다.
사실과 가치판단을 나누고 구별의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이미 가치의 문제입니다. 인식론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를 구별해야 하지만, 과학은 처음부터 정합성, 일관성, 단순성 등과 같은 인식론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 또한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들의 구조>라는 유명한 책을 통해 표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들(소위 정상과학 또는 규범과학) 사이에 서로 공통된 잣대가 없는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경쟁하는 정상과학들 사이의 차이를 초역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 부릅니다. 쿤뿐 아니라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도 이 개념을 깊이 성찰하고 논의했습니다.
쿤과 파이어아벤트의 개념을 이어 과학과 기술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1970년대 이래 차근차근 정립되어 갔습니다. 그 한 조류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라 부르는 학문영역이 되었습니다. STS가 모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학문영역은 과학기술을 사회적 맥락과 배경과 이해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데 주된 목표를 둡니다. 그래서 과학기술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이 널리 확장되었습니다. 흔히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라는 말로 불리기도 합니다. 사회구성주의의 맥락에서는 가치와 사실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해 보입니다.
철학적 윤리학 분야에서 여전히 가치와 사실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윤리학 안에서도 가치와 사실이 결코 분리되지 않고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 1970년대에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의 행동에 대한 연구(사회생물학)를 인간으로 확장한 인간 사회생물학과 유전자 관점에서 동물행동을 탐구하는 여러 접근들을 통해 더 강화되었습니다.
Kevin N. Laland, Gillian R. Brown. (2011). Sense & Nonsense: Evolutionary Perspectives on Human Behaviour. Oxford University Press; 양병찬 옮김 (2014).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위의 책은 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유전자-문화 공진화론 이렇게 다섯 가지의 학분분야를 상세하게 소개합니다. 서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문화, 종교, 심리, 경제 등을 진화이론과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려 합니다. 경중은 있어도 사회문화적 가치를 자연선택과 진화라는 생물학적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어서, 여기에서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전체 697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연철학 강의 공부모임>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40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40 |
공지사항 |
3기 새 자연철학 세미나 상세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92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92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5)
neomay33
|
2023.04.20
|
추천 3
|
조회 13064
|
neomay33 | 2023.04.20 | 3 | 13064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5848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5848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12701
|
시인처럼 | 2022.03.07 | 0 | 12701 |
682 |
[질문]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가요? (1)
자연사랑
|
2025.03.13
|
추천 0
|
조회 62
|
자연사랑 | 2025.03.13 | 0 | 62 |
681 |
[자료] 물리법칙과 '나'라는 문제
자연사랑
|
2025.03.12
|
추천 1
|
조회 80
|
자연사랑 | 2025.03.12 | 1 | 80 |
680 |
[자료] 자유에너지 경관과 준안정상태의 변화
자연사랑
|
2025.02.22
|
추천 1
|
조회 105
|
자연사랑 | 2025.02.22 | 1 | 105 |
679 |
[자료] 우주의 역사와 운명 (1)
자연사랑
|
2025.01.28
|
추천 1
|
조회 228
|
자연사랑 | 2025.01.28 | 1 | 228 |
678 |
[자료] 우주와 물질 - 개요 (4)
자연사랑
|
2025.01.27
|
추천 1
|
조회 239
|
자연사랑 | 2025.01.27 | 1 | 239 |
677 |
[자료] 고립계, 닫힌 계, 열린 계
자연사랑
|
2025.01.20
|
추천 1
|
조회 245
|
자연사랑 | 2025.01.20 | 1 | 245 |
676 |
[자료] 열역학 영째 법칙과 온도의 정의 (2)
자연사랑
|
2025.01.19
|
추천 0
|
조회 241
|
자연사랑 | 2025.01.19 | 0 | 241 |
675 |
상호작용 없는 측정(엘리추르-바이드만)과 겹실틈 실험
자연사랑
|
2024.12.25
|
추천 0
|
조회 220
|
자연사랑 | 2024.12.25 | 0 | 220 |
674 |
[자료] 푸리에 변환과 힐버트 공간
자연사랑
|
2024.12.10
|
추천 0
|
조회 301
|
자연사랑 | 2024.12.10 | 0 | 301 |
673 |
양자역학이 답하고 있는 문제: 상태를 어떻게 서술할까?
자연사랑
|
2024.12.09
|
추천 0
|
조회 257
|
자연사랑 | 2024.12.09 | 0 | 257 |
사실-가치, 사실-당위에 대해서 바로 쏵 정리를 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세미나 때 서*석님도 말씀하셨지만 환경문제, 기후위기 같은 구체적인 사례에서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기후위기가 있냐 없냐, 얼마나 심각하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냐, 이런 게 과학적인 탐구과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이 아니면 생명과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게 뭔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정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급하게 쓴 글이라 쑥스럽습니다. 일단 오랫동안 숙제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지난 번 글에 이어서 서둘러 써 보았습니다. 조지 무어가 말한 비자연주의 윤리학의 가능성도 실상 무척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라서 아직은 스케치 수준입니다. 또 퍼트남의 책도 오래 전에 읽고 버려 두었다가 이번에 빠르게 살펴본 것이라서 시간이 나는 대로 더 꼼꼼하게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특히 현대의 여러 문제들, 비건주의, 공장식 축산, 기후재난과 탄소중립문제, GMO와 유전자 편집 문제 등 매우 많은 문제들을 사실과 가치 또는 사실과 당위를 구별하면서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말하며 회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래도 어쩐지 '사실'이라 부르는 무엇인가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도 버리기 어렵습니다.
자연사랑님과 제가 논쟁을 할만한 실력이 되지 않지만 이 문제는 주제가 주제인지라 시간을 두고 공부를 해가면서 논쟁을 좀 해봐야겠네요. 먼저 간단히 문제의식만 정리해보겠습니다.
사실-가치 문제와 사실-당위 문제를 같은 문제라고 보면 곤란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퍼트넘의 책을 사두고 안 읽은지 20년 가까이 됩니다만 만약 그의 논지가 위에 설명된대로라면 공감하기 어렵네요. 저는 가치란 무수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또는 지적 존재가 영위할 수 있는 세계의 갯수만큼 가치도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 선, 미일텐데 이 때 이 가치들은 전혀 다른 맥락에 있는 것들이라 원칙적으로 비교가 불가능하고 환원도 불가능합니다. 이 차원에서 본다면 과학, 또는 학문 활동 역시 진리라는 가치추구활동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과학활동에서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가려내어 배격하고 사실을 밝혀 이에 기반한 세계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진리 추구의 가치에 부합하는 과학활동입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가치와 선이라는 가치는 완전히 서로 다르고 비교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진리라는 가치 추구 활동에서 직접적으로 선의 가치는 추구될 수도 없고 도출되지도 않으며 판단도 될 수 없습니다. 사실-당위 문제는 위에서 언급하는 사실-가치 문제라기보다는 진리 가치 대 선악 가치가 섞일 수 없다는 문제라고 보는 게 더 맥락에 맞습니다. 만약 퍼트넘이 여러 가지 가치를 모두 묶어서 사실 대 가치로 대비할 수 있다고 보았다면 그는 맥락을 혼동하고 문제를 오도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급한대로 생각을 쏟아내어 보았고, 차차 공부를 좀 더 해서 더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해보겠습니다.
두 분의 토론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시인처럼'님 글을 읽으면서 '사실', '진실', '진리'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언론에서 '팩트 체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비교적 객관적이어야 할 '사실'마저도 밝혀내지 못하거나 심지어 왜곡되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거든요.
‘진리라는 가치와 선이라는 가치는 완전히 서로 다르고 비교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진리라는 가치 추구 활동에서 직접적으로 선의 가치는 추구될 수도 없고 도출되지도 않으며 판단도 될 수 없습니다.’
라는 부분을 읽고 든 저의 생각은:
예를 들어 과학자가 ‘이타적인 구성원이 많은 집단이 이기적인 구성원이 많은 집단보다 생존과 진화에 유리하다’라는 진리에 도달했다면, ‘타인을 돕는 것이 결과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돕는 선행을 해야 한다’ 라는 당위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영국 시인 키이츠는 왜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라고 했을까 역시 궁금해지네요. 수학자들이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던데 그것과 관계가 있는지…찾아보러 이만 총총.
작년 말에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9장(심학9도)을 다룰 무렵에 나온 이야기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답글을 달아주신 덕분에 그 때 썼던 글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니 글의 전개가 매끄럽지 않고 채워야 할 부분이 많아서 부끄럽습니다. 퍼트남의 강연을 다시 살펴봐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그 뒤로 짬을 내지 못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사실과 가치, 사실과 당위 문제를 기회가 되는 대로 더 공부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해 봅니다.
진화이론은 윤리의 문제와 매우 가까이에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해 볼 거리가 무척 많은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도 기억납니다.
아주 좋은 지적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윤리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인처럼님보다 실력이 부족합니다. 그저 여기저기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있어서 퍼트남의 책을 소개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위의 글에 있는 (그리고 퍼트넘이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아마티아 센을 만나서 악수도 하고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제가 그 분이 누군지 전혀 몰랐었다는 점입니다. 케임브리지를 방문했다가 니덤 연구소 도서관에 있을 때였는데, 나중에 주변 사람에게 말하니까 다들 부러워하더군요. 유명한 학자라서가 아니라 존경받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이 문제를 가지고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 믿습니다.
퍼트넘이 사실과 가치에 대해 말할 때 '가치(value)'는 선악(virtues and vices)의 개념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진(Truth 眞), 선(Goodness 善), 미(Beauty 美)라는 세 가지 개념이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긴 하지만, 이를 가장 널리 퍼뜨린 것은 중세유럽의 기독교였습니다. 처음 덕과 윤리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펼친 소크라테스는 '로고스'와 구별되는 '에토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에 '파토스'를 덧붙여 상세한 존재론적 이론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이 세상의 원질(아르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사람이 살아갈 도리에 무관심한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는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실상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 신전에 있는 격언이었다고 하지만 말이죠.) '로고스'와는 구별되는 사람의 살아갈 도리와 가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에토스'라는 별개의 관념을 강조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적 판단은 로고스나 에토스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세 번째 관념을 도입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포괄적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철학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중세 유럽의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 중세유럽의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틀이 되면서 기독교 신학에 자연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가 스며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시인처럼님의 말씀처럼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서로 연관되지 않는 세 가지의 초월적 관념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옳음(로고스)와 좋음(에토스)과 아름다움(파토스) 사이의 상호관계와 연결을 상세하게 이야기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 가지 초월성이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으로 주장했는데, 어쩌면 삼위일체 개념이라든가 숫자 3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비주의와 연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제가 쓴 글에서는 사실-당위의 문제와 사실-가치의 문제가 비슷한 것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는데, 이와 관련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해 올려보겠습니다.
사실에서 가치가 우러나온다고 보는 믿음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에서 가치가 우러나온다고 보는 관점하에 주장을 하면 그것은 반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다른 주장은 탄압되게 됩니다
이것은 리오타르 등의 철학자가 지적한 문제이죠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완전히 구분되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의 글에서 "가치와 독립된 사실이 따로 있다거나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옳지 않다는 주장을 적어보았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사실판단에는 이미 가치가 개입해 있으며 가치에 대한 평가와 판단에 이미 사실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에서 가치가 우러나온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오히려 기존의 오래된 상식은 사실과 가치가 별개라고 보는 것이고, 가치에 대한 기준과 근거를 종교나 전통이나 관습에 두려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리오타르가 어떤 주장을 펼쳤으며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리오타르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포스트모던의 조건 같은 초기저작을 수박겉핥기로 구경해 본 정도에 그치고 있어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매우 '모던적'이거나 이분법적인 주장을 했다면 아무래도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Kevin C. Elliott (2017) A Tapestry of Values:An Introduction to Values in Science. Oxford University Press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2022년 12월에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