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인' 개념의 부활?
1. 장회익 선생님께서는 <삶과 온생명> 1장에서 지식을 각각에 해당하는 경험에 따라 대인 지식, 대물 지식, 대생 지식으로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동양은 주로 대생 지식을 기반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시로 성리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얼핏 보기에는 의미 있는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물을 철저히 통찰하라는 태도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서구 과학적 방법론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하는 당위적인 논의로 매우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는 점에서 서구 근대 과학과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철학자 무어(G. E. Moore)가 오래 전에 지적했던 '자연주의적 오류'에 해당하는 논리적 전이가 동양적 사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무척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삶과 이러저러한 관련 아래 있다. 내 삶과 이렇게 관련된 것이 현재 이러저러한 상황에 있으니, 나는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 (<삶과 온생명>, p.29, 1998)
제가 생각하기에도 선생님께서 책에서 주장하신 것처럼 고대 동양 전통에서는 맹자, 노장, 불교 등 다양한 사상들이 '사실'과 '당위' 사이에 논리적 단절이 없는 대생 지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맹자와 고자의 버드나무 및 물의 비유를 통해 삶으로 직결되는 인간 본성의 논쟁이라거나,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의 구절을 통해 사람도 흐르는 물처럼 살기를 권한다거나, 대승불교에서 말하길 모든 것이 '공'(空)하므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리를 자연스럽게 실천하기를 권한다는 내용들이 그렇습니다. 그 사상들은 대체로 '자연이 이러하니까', '세상의 이치가 이러하니까' 하는 등의 소위 '사실 명제'를 통해서 아주 자연스레 삶의 태도와 '당위 명제'의 문제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Q1. 그런데 과연 이러한 대생 지식을 위시한 전통이 동양에서만존재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고대의 대표적인 사상들은 대부분 대생 지식을 기반으로 한 사고 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양 철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만 하더라도 (비록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이지만) 그 부제가 "올바름에 관하여(正義論)"입니다. 덕과 행복이 아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으리라고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 사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엔 이 책은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다룬 책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철학, 심리철학, 교육학, 미학 등 수없이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다룹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엔 '잘 산다는 것'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데아 같은 개념들도 결국에는 '선의 이데아'가 최고 지선의 존재자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이와 거의 비슷한 이유로 대생 지식에 대한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대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주제에 너무 함부로 이야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동서양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발생했다면 서구 근대 과학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또한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2. 여기서부터 제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거리입니다. 대생 지식을 기준으로 한 동서양의 구별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앎은 본래적으로 '사실'과 '당위' 사이에 논리적 단절이 없는 대생 지식이라는 선생님의 통찰이 중요하게 와닿았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과학과 메타과학> 10장 '인간의 우주적 존재 양상'에서도 낱생명이 가지는 '상합 모형'(congruous model)이 온생명에 대한 '이해 기준'과 '행동지침'을 앎의 두 측면으로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실 때 조금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바로 저는 이 지점에서 선생님께서 <양자, 정보, 생명>에서 언급하신 '서술모드'로써의 앎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역학 모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규범'(norm)이 정보를 다루는 서술모드에서는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정보를 인식한다는 것은 특정한 맥락 하에서 어떠한 주체가 해당 사건에 대해서 해석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생명에 적용한다면, 낱생명은 위에서 언급한 상합 모형을 통해서 온생명적 상황에 대한 사실적 정보와 적절한 행동지침을 얻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그 둘이 혼재된 상태로 얻게 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에 낱생명들은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보를 기반으로 생존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입니다.
Q2.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대목에서 '목적인'이 정당하게 부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목적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바를 있는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약화시킨 버전입니다. 기본적으로 낱생명들은 주어진 상황 하에서 생존을 위해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지향성을 가지도록 모형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 생명에 대해서 목적인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앎이라는 것이 인간의 수준에 와서 사실과 당위로 인위적으로 분리되기 이전에는 자연 상태에서 목적인이라는 특성을 자연스레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진화생물학자 메이너드 스미스가 제시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이하 ESS)’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그룹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그 전략을 채택할 때, 다른 대체 전략은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체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전략은 나머지 개체군 대부분이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생물들끼리 다양한 전략을 취하면서 일종의 '손익계산'이 돌아가다가 결국에는 그 계산의 비율이 ESS의 지점에서 멈추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생물 집단의 구성원들이 어떠한 최적의 방향으로 진화하기 쉬운 경향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목적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음양' 개념에 대한 해석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생명들 뿐만 아니라 물질에 대해서도 이러한 목적인과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2장에서 '안정자 생존(survival of the stable)'이라는 법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책에는 나오지 않은 예시지만 화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옥텟 규칙(octet rule)에 대해서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도킨스는 지구상에 생물이 출현하기 이전에 일반적인 물리화학적 과정을 통해서 분자들이 초보적인 수준의 진화를 거쳤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최초의 자연선택은 단순히 안정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정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ESS라거나 옥텟 규칙이라거나 낱생명들의 생존을 위한 상합 모형 등이 서로 비슷한 패턴의 목적인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것과는 달리, 제 생각에는 오히려 이러한 목적인 개념이 인간보다 자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정보' 개념에서 필수불가결하게 요청해야 할 것 같은 해석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가 난관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해석자를 인간보다 훨씬 더 아래 수준의 분자에게까지 적용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규범은 낱생명의 생존여부를 특정 물질이 얼마나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확장해나가면 해석자의 수준에 따라 맞추어질 것 같습니다.
덧: 시험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읽고 바로 약간의 감상과 질문을 급하고 빠르게 다니까 너무 두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게 많은데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위주로 말씀을 남깁니다. 일단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 같이 과감한 질문거리는 이 정도만 던져두고 다음에 더욱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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