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모임을 위한 질문: 자연철학이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2021년 9월의 마지막 날에 예정되어 있는 두 번째 자연철학 세미나를 위한 질문을 올립니다.
제 질문은 간단합니다. 자연철학이 정확히 무엇일까요?
저는 물리학을 오랫동안 공부해왔지만 동시에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함께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표준적인 과학사에서는 19세기까지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 science'가 없었고 그 대신 '자연철학 natural philosophy'과 '자연사(박물학) natural history'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16세기-17세기에 유럽에서 전개된 소위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통해 근대과학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요즘에는 "과학혁명이란 것은 애초에 없었다."라는 식의 주장도 많이 들립니다. 무엇보다도 기술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회와 문화를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된 전문적인 과학은 19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1830년대에야 비로소 '과학자 scientist'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그 무렵에야 과학의 전문분야들이 여럿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생물학(biology)이란 용어도 1802년에 처음 등장했고, 18세기까지 광물 연구도 포함했던 물리학(physics)이 하나의 전문분야로 정립되어 '물리학자 physicist'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19세기의 일입니다. 과학자를 의미하는 scientist는 1833년에 처음 등장했고,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1834년이 최초이므로, 대략 1800년 무렵 전까지는 science를 전문으로 하는 집단이 따로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과학(科學)이란 용어를 처음 쓴 것은 1870년대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로 공인되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Nishi_Amane) 한국어 '과학'은 큰 고민 없이 일본어의 '가가쿠'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음차한 것입니다. 니시는 Philosophie를 希哲(키테츠) 또는 哲学(테츠가쿠)로 번역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科学(가가쿠)는 영어 science 또는 네덜란드어 Wetenschap의 번역어로 니시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200년 넘도록 활발하게 탐구되던 이슬람 자연철학은 12세기 기독교권 유럽에 홍수 같은 폭발적 번역으로 라틴어 번역본들이 되었습니다. 마침 그 무렵에 생겨난 대학(우니베르시타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속하는 라틴어 번역본들을 교과과정의 교과서로 삼으면서 중세 라틴어권 유럽에서 자연철학은 더 깊이 탐구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상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근본과 구성원리와 생명과 우주와 사람과 인식과 지식을 탐구하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2천여년 동안 줄기차게 계속된 가장 근원적인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철학의 개념을 최대로 넓혀 놓고 보면 모든 지적 탐구가 다 자연철학이라는 우산 아래 모이기 때문에 문득 '자연철학'이란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또 21세기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여러 종교들(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불교)이 뭔가 '종교(宗敎)' 즉 "최고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실상 자연철학에서 탐구되는 여러 의문과 질문들에 어떤 식으로든 답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탐구하는 철학에서 개별적/전문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다양한 과학이 분과학문으로 생겨나고 점점 더 세분화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거스리기 힘든 대세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제 철학자들은 세부적인 주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나 인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탐구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학을 잊은 철학"이나 "철학을 잊은 과학"을 넘어서는 통합된 자연철학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고 필요한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두서 없고 난삽한 질문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사나 과학철학과 같은 과학학 분야에서는 자연철학을 19세기 이전의 과학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고, 동아시아의 신유학 사유의 전통도 기실 자연철학이었으며, 테크노사이언스에 가까운 현대 자연과학은 처음부터 문화와 사상으로서의 과학과 구별되어 전개되었다고 보면, 기술과 경제에 붙박여 있는 현대 자연과학이 자연철학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은 아닐까요? 새 자연철학의 의미는 결국 19세기 이전의 정신과 자세로 돌아가자는 것일까요? 새 자연철학이 추구하는 '자연철학'은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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