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의 속력, 공간 속의 속력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합해 놓은 개념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실상 매우 심오한 개념을 필요로 합니다. 시공간 철학(Philosophy of Space and Time)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이런 문제를 전문적으로 탐구합니다. 이 또한 자연철학의 일부입니다.
초끈 이론을 전공으로 하는 미국의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이 The Elegant Universe와 The Fabric of Universe에서 초끈이론과 연관하여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면서 매우 특이하고 이상한 개념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motion through spacetime”, “speed through time”, “speed through space”입니다. 이 용어들은 물리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브라이언 그린만이 쓰는 특이한 용어이자 개념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지금은 짧게 축약하여 쓰겠습니다. 저는 그린의 책을 영어로만 보았고 한국어판을 살펴보지 못했는데, 이 용어가 “시공간 속의 운동” 등으로 번역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otion in spacetime과 motion through spacetime이 크게 다를 뿐 아니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부적절한 번역어이기 때문입니다. though time이나 through space는 “시간 속의”나 “공간 속의”가 아니라 “시간 방향으로의” “공간 방향으로의”라고 옮겨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 번역어를 잘못 선택하여 오해하게 만든 게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개념이 모호하거나 부정확하답니다.
무엇보다도 운동은 일정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공간적 위치가 변화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이것은 상대성이론이든 아니든 그 어떤 경우에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운동이라는 것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규정하고 이에 바탕을 두어 시간의 변화와 공간의 변화를 말하고, 이를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린은 상대성이론에서 4차원 시공간 개념을 비전문가를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려다가 좀 이상한 서술을 하게 됩니다. 그린의 머릿속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책에 있는 서술을 기반으로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수식을 조금 써야 하겠습니다. 2장 각주 6에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가진 영문판은 p.392입니다.)
시공간 4-벡터 $x= (ct, \vec x)$로부터 속도 4-벡터 $u=dx /d\tau$를 얻습니다. 서술을 편하게 하기 위해 공간을 한 차원만 표기해도 되지만, $\vec x = (x, y, z)$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린에 따르면, 고유시간 $\tau$는 $d\tau^2 =dt^2 - \frac{1}{c^2} d{\vec x}^2$로 정의됩니다. 이 식을 약간 바꾸어 봅니다.
$$c^2 d\tau^2 =c^2 dt^2 - d{\vec x}^2 $$이므로 $$ c^2 d\tau^2 + d\vec x ^2 = c^2 dt^2$$이 되고$$ c^2 = c^2 \frac{d\tau^2}{dt^2} + \frac{d\vec x^2}{dt^2} = c^2 \left(\frac{d\tau}{dt}\right)^2 + \left(\frac{d\vec x}{dt}\right)^2$$를 얻습니다. 이 식의 오른쪽 변에서 첫째 항이 “시간 방향으로의 속력(speed through time)”이고 둘째 항이 “공간 방향으로의 속력(speed through space)”이라는 게 그린의 설명입니다.
이런 전개는 물리학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설픈 이야기입니다. 그린 같은 유명한 물리학자가 이렇게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자기 책에다 적어놓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특히 마지막 등호가 성립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상세하게 덧붙여야만 하고, 대개는 그렇게 단순하게 풀어가다 보면 틀리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frac{dx^2}{dt^2}$은 아주 작은 두 양의 제곱의 비이고, $\left(\frac{dx}{dt}\right)^2$은 도함수의 제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표현을 같다고 놓는 것은 발견법에서 대략 그러하다고 말할 때 쓰는 논법이고, 실제 증명과정에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물리학과 학부생들이 많이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그린이 미주에 이런 식의 설명을 달아놓은 것은 독자가 물리학이나 수학을 잘 모를 거라는 다소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물리학 교과서나 논문에서라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껏 고유시간을 잘 정의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하다가 “공간 방향으로의 속력”이라는 낯선 개념을 가져와서 위치를 좌표시간으로 미분한 값으로 정의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고전역학이 익숙한 독자를 위해 뭔가 익숙한 속도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겠지만, 상대성이론 특히 4차원 시공간 개념을 설명하려는 목적에 비추어 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셈이 됩니다. 게다가 “시간 방향으로의 속력”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가져와서 고유시간을 좌표시간으로 미분한 값에다 광속을 곱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속력’이 되는지 또는 4차원 시공간에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본문에서도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표준적인 상대성이론의 해설에서 이미 잘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시간 늦어짐이나 길이 줄어듬의 문제는 멈춰 있는 좌표계와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시간과 공간 좌표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운동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 좌표계 $ (ct, x, y, z)$와 움직이는 좌표계 $ (ct’, x’, y’, z’)$가 있을 뿐이고, 그 두 좌표계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오히려 출발점을 속도의 덧셈으로 삼았지만, 교과서적인 상대성이론에서는 좌표를 먼저 설정하고, 그 사이의 변환 관계 (즉 로렌츠 변환)를 정립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린의 접근, 즉 속력을 시간 방향과 공간 방향으로 나누어 개념화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큽니다. 왜냐하면 시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공간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4차원 불변 간격 개념을 이용한 표준적인 방식은 다음 글에서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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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려주시는대로 읽어야지, 미뤄놨다가는 책 되겠어요. ^^ 고맙습니다!!
글을 잡다하게 써서 죄송합니다. 바쁜 일들이 많다 보니 시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읽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글 써주시는 분도 계신데 읽는 사람이 불평하면 안 되겠다 뜻으로 에둘러 한 농담이었습니다. ^^;;;
평소에 제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같고 다름"에 주목하는 편임을 아시는 분은 제가 브라이언 그린의 나름 독창적일 수도 있는 글을 과감하게 "틀렸다"라고 말하는 게 불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물리학과 물리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저로서는 브라이언 그린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논문이나 저서에서는 결코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일반 비전문가 독자들에게 함부로 쓰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침소봉대해서 말하자면, 어차피 물리학을 모르는 독자들은 상세하게 설명해도 모를 테고 그런 것은 다 물리학 교과서에 있으니까 그냥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는 것을 받아들여라 하는 식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브라이언 그린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칠 때 이런 식으로 답안을 쓰면 점수도 안 주고 야단을 칠 텐데 교양과목을 가르칠 때에는 이런 식으로 쓰더라도 학점을 잘 줄 것 같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장회익 선생님이 <자연철학 강의>에서 택하는 접근법은 대충 얼버무리지 않고 최대한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기존 물리학 전공자를 위한 이야기를 그대로 읊는 대신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로 전체 스토리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이전 글에서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라고 쓴 것을 좀 과격하게 "틀렸다"라고 적었습니다. 혜량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