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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카데미

더 나은 앎으로 푸른 미래를 가꾸는 사람들의 공부모임

새 자연철학 세미나

20210204 정합적 틀. 우주와 나의 정체성. 소위에 타서 소를.

작성자
오지영
작성일
2021-02-04 21:56
조회
2367

14 여기서 중점을 둔 것은 앎의 지평을 넓혀간 열 가지 주제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맞물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특히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 중시한 것은 역사적 연계성보다는 오히려 논리적 관련성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전체 내용을 합리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정합적 틀 안에서 이해해보도록 했다.

:왜 하나의 정합적 틀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는가? 틀이 있다는 전제를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틀이 뭔지는 모르지만 틀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떻게 그 틀을 갖게 됐는가?

만약에 틀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시 없다 해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해도, 아니 알 수 없는 것과 별개로 선생님은 틀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가?

 

23 그러다가 퇴계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사물의 근원에 마주친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떠한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근원적 물음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을 것이고, 여기에 대한 심오한 해답으로 (아마도 장재의 글에서 보았을) ‘태허(太虛)’ 라는 개념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간의 긴 방황을 뒤로 하고 이제 막 대지를 박차고 일어서는 한 고독한 탐구자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인간이 세상과 자기 존재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과 나는 관계가 있는가? 내 삶의 방식이 세상이 어떠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을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세상을 움직이는 정합적 원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선생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정합적 원리를 추구하는 그 삶 외에 일상의 변화가 있다면 알려 달라. 나의 경우엔 세상을 알고자 했으나 안 바가 없다. 그리고 알았다한들 알고자했던 그 시간들 말고 그 앎 자체가 내 삶에 어떤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인가? 모르겠다. 혹시 내가 왜 모르는지 아신다면 말씀 부탁한다.

 

31 무릇 제불(諸佛)의 참된 근원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으나, 미혹으로 인해 삼계(三界)에 빠져들기도 하고, 깨달음으로 인해 사생(四生)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부처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중생으로 머물기도 한다. 이를 옛 성현들이 가엽게 여겨 다양한 방편들을 널리 펼치셨다. 치우침과 원만함에서 이치를 알게 했고, 즉각적 깨우침과 점차적 깨우침을 함께 가르쳤다. 거친 것에서 섬세한 것에 이르게 했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에 다다르게 했다.

:앞서 말씀드린 제 상태를 가엽게 여겨 하나의 방편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33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 물속의 거품을 모두 태워버렸네. 우습다, 소를 탄 사람이여 소의 등에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

... 이것이 진정한 조롱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도록 끝없이 추구해보라는 강력한 경구일 수 있다.

:어쩌면 계속 소를 찾는(소를 탔으나 진정 타지 못하고 계속 소를 찾는) 삶을 조롱한 것은 아닐까요? 가슴아파하며 조롱한 것은 아닐까요? 소를 찾기 위한 과정만 있었을 뿐이지 소를 찾아서는 소를 보지 못하는 소를 타지 못하는 그렇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의 무한 반복에 대한 경종은 아닐까요?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알고자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경계는 아닐까요? 종교적 금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고자하는 그 발심이 왜 자신에게 시작 되었는가를 본인이 알고 있는가? 예를 들어 A가 문제였는데 A가 아닌 앎의 문제에 빠져든 것은 아닐까요? 외로워서 사랑에 빠지듯이 외로워서 앎의 문제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알기위해 알려고 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할지라도 그건 재미가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연으로 알고자 하는 건가요? 알고자 해서 알고자 하는 것 외에 무슨 까닭에 앎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외로워서 자전거를 타고, 테니스를 치고, 알고자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소의 등에 타도 계속 소를 찾을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외롭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앎에 이른다 해도 왜 외로운 걸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우주의 본질이 나의 실존적 정체성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은 나의 실존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소의 등에 탄 그 결과는 나를 멈추게 할 뿐입니다. 앎 자체는 없고 계속 알게 하려는 앎의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왜 알고자 하는가를 살피고 그런 나를 이해해줘야 합니다. 계속 알고자 한다 해도 그 길이 계속 된다 해도 중요한 것은 내 밖의 앎이 아닌 내 안의 앎도 아닌 나의 상황입니다. 나는 어쩌다 알고자 했는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선생님 글의 역사지평처럼 개인의 역사지평을 보아야 합니다. 저는 어려서도 생각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학문을 하고자 했습니다. 왜 이런 마음이 제게 들어왔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궁극의 것이란 것을 이것만큼 파워가 강한 것은 없다는 자각을 한 거 같습니다. 가장 수준이 높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리고 일상의 외로움이 뭔가에 몰입하게 했고 그것이 이것이 된 것이로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알고자 하는 그 순수한 상태는 없는 것인가? 만약 있다면 그 것은 놀이라고 생각됩니다. 무게를 낮추면 좋습니다. 수준 높은 놀이를 하는 겁니다. 순수하고 수준 높은 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럼 실체는 없는가? 있습니다. 그러나 술래잡기는 다시 시작됩니다. 궁극의 진리놀이는 그렇게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술래가 바뀝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 엄마가 들어오라고 합니다. 술래가 바뀝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 들어오라고 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앎 놀이를 합니다. 우리는 궁극의 순수 앎 놀이를. 다른 이들은 안 궁극의 안 순수의 앎 놀이를 합니다. 어느 날 그들과 우리가 만납니다. 집에서 만납니다. 밥을 먹습니다. 나는 궁극의 놀이 중이라 사유하는 기운이 풍깁니다. 너는 안 궁극 놀이 중이라 얕은 기운이 풍깁니다. 그러나 둘 다 밥을 먹습니다. 안 궁극과 궁극이 만나서 앎을 추구할 수도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주전(4주전) 수업에 등장했던 산에서 도를 닦다가 내려온 양자역학에 대해 한 소리 한 그 분이 바로 새로운 캐릭터였습니다.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도 개 걸 윷 모 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도 도(道)였지만. 암튼 궁극 놀이 팀은 새 캐릭터를 보내고 선을 그었습니다. 선이 진할수록 궁극팀은 외롭습니다. 그래서 더 알고자 합니다. 외로움은 그런 힘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웃으며 노는 방법을. 어지럽긴 합니다. 지저분하죠.

 

나는 수역인 홍명복군에게, “자네, 도(道)를 아는가?” 라고 물으니 홍군은 두 손을 마주 잡고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기에 나는, “도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기 강 언덕에 있네.” 라고 했다. 홍군은, “이른바 『시경』에,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라는 말을 이르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닐세. 압록강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계가 되는 곳이야. 그 경계란 언덕이 아니면 강물이네. 무릇 천하 인민의 떳떳한 윤리와 사물의 법칙은 마치 강물이 언덕과 만나는 피차의 중간과 같은 걸세. 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강물과 언덕의 중간 경계에 있네.” 라고 일러주었다. 홍군은, “무슨 말씀이신지 감히 묻습니다.” 하기에 내가, “『서경』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게 되고 도심(道心)은 오직 희미해진다’고 했네. 서양사람들은 기하학에서 하나의 획을 분별하여 하나의 선으로 깨우치기는 했으나, 그 미약한 부분까지 논변하고 증명할 수는 없어서 ‘빛이 있고 없는 그 사이라고 말했고, 불교에서는 그 즈음(사이)에 임하는 것을,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네. 그러므로 그 경계에 잘 처신함은 오직 도를 아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으니, 정나라 자산이란 사람이⸳⸳⸳⸳⸳⸳.”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돌베게/46~47』

 

 

71쪽

처음 상태(나)

------------------->(변화의 원리)

나중 상태(나)

 

나는 왜 세상에 안 떨어지나? 나는 왜 순수한가?

 

210204

궁극은

우주는

백슬라이드의 원리를 모르고

네트를 넘기려는

라인을 넘기지 않으려는

욕망을 부르고

다가 온 볼을 맞이하지 않고

떠나가는 볼에 마법을 거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정체성은 우주를 아는 데 있지 않고

오늘 하루 내가 겪은 일을 펼쳐 놓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던가를 살피는데 있지는 않을까요? 소를 탄 것을 알려면.

 

525쪽

오직 한 가지 가능한 대안은 근원적 물음 즉 “나는 어떠한 세계에 사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진지하게 되묻고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온전한 앎’ 속에서 추구하는 데 있다.

 

526쪽

온생명이 곧 내 몸이며 우주가 곧 내 집임을 투철한 앎의 눈을 통해 파악한 인간이 이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점은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우주적 사건이 될 만하다.

: 이 앎의 눈은 차라리 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감당이 안 되니까. 감당이 된다면 어떻게 되나? 어떻게 저 앎이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는 것인가?

전체 1

  • j j
    2021-03-20 15:55

    제가 댓글을 다는 것이 별 도움은 안될듯하지만(다른 분들은 학문을 하시는 분들이라 할만하고 저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라) 저는 "왜 이 모임에서 알고자 할까? "를 생각해보면...

    디자이너나 예술쪽에서 읽어야한다는 추천자료들을 읽다가 의문이 든 것 같아요. 그 중 풀리지 않았던 것 하나가 양자역학의 해석문제였구요. 양자역학의 대학교양강의를 집필한 책을 추천받아 읽었는데도 딱히 답도 나오지도 않고 궁금해서 언젠가 녹아 모임에서 "물리학적인 이해를 인문학으로 바꾸었을 때 오해의 소지가 많아진다는 것은 알지만 일반인들이 인문학적으로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나올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장회익 교수님의 답변은 내가 오래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게 이번에 철학강의 책인 것 같아요.
    저에게 이 책의 의의는 수 많은 양자역학의 미신적 해석의 여지, 관측의 여부 문제를 기존의 해석과 다르게 설명하시는 것이 (이 책을 읽고 수학을 모른 채로는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또 따른 합리적인 이해로서 다가오는 것 아닐까해요. 양자역학의 미신적 해석이라 표기해놓으니 무슨 동양종교 도 닦는 것 같지만, 양자역학의 1920년쯤의 코펜하겐 해석 이후로 관측의 여부가 확대해석되어 여러 단체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들이 있습니다. 쉽게 상위에 검색되는 것들이 있고, 또 제 친구 중에는 이것이다! 라고 해서 그런 정신적 연결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구요. 소설 뿐만이 아니라 많은 웹툰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도 있구요.
    100년쯤 흘러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해석이 궁금했고,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이라는 내용을 공부하는 세미나 동안은 이 책의 수학 기호에 압도되어 소화불량에 걸린듯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따라가려고 했던 것은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참석하지 않았던 회차인듯하여 잘 알 수는 없지만, 이 모임이 도 닦은 사람에게 배타적이라 느껴지며 불편하셨던 건 아닐까...라고 짐작하고 짧은 저의 생각을 적어보자면, 이 책은 양자역학 관측의 문제에서 기존과 다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책에는 안나와있고 세미나 때 이중 슬릿 다음으로 삼중슬릿에 대한 논문을 보여주셨는데요. 이것은 대부분의 양자역학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관점- 관측을 하기 전까지 상태가 정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정신적인 연결-으로 이해하는 입장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대하고 수학적으로,물리학적으로 증명되었길 기대했던 분들께는 실망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중슬릿의 실험에 대해 제가 더 쓸만큼 이해가 깊지 않네요^^;;;
    각자의 삶은 달라서 지금 오지영님의 사유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삶에 녹아들 것이라 생각이 들어요. 어떤 다른 길을 갈지, 어떤 선택을 하며 무엇이 쌓여갈지는 지영님만이 하실 수 있고 기대를 가져봅니다. 아, 저번에 녹아 모임 일찍 나가실 때 화성이주를 보는 관점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그 주제들도 제 질문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다음 세미나 때 함께 이야기 나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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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댓글 내가 쓴 댓글
우와! 자세한 자료, 설명들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2025.06.09
1. 변별체의 존재 양상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공부할 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바로 위의 답글에 쓴 물의 온도를 재는 상황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장회익 선생님의 '변별체' 개념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측정장치 개념에서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하여 추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관적으로는 모종의 측정장치를 염두에 두면 이해가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입자물리학에서는 매우 다양한 측정장치 또는 검출장치를 사용합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세미나에서 인용하신 안개상자(cloud chamber)나 거품상자(bubble chamber)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겹실틈 실험에서 사용하는 사진건판도 변별체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loud_chamber https://en.wikipedia.org/wiki/Bubble_chamber 하지만 변별체가 측정장치/검출장치와 동의어는 아닙니다. 변별체는 물리적 작용을 통해 뭔가 흔적을 남길 수 있어야 하지만, 또 동시에 그것을 읽어내서 인식주체의 경험표상영역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변별체는 대상과 인식주체 사이에 놓인 가교 내지 창문의 역할을 합니다. (제가 장회익 선생님의 제안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 사진은 거품상자에서 기본입자가 만들어내는 궤적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사진 출처: pinterest]
2025.06.03
2.의 질문이 흥미롭습니다. '이해'라는 문제를 직접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대상과 변별체의 만남(조우)은 원래 인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알아채거나 기록하거나 기억하거나 그로부터 지식을 얻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대상과 변별체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하기에 이 세계 속의 수많은 물질적 존재자들은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부딪치고 멀어져갈 것입니다. 아주 먼 우주에서 행성과 혜성이 충돌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하간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흔적이 남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적 존재자에 생긴 흔적을 인식 주체인 '나' 또는 서술세계가 받아들이면 이제 그 흔적이 경험표상영역에 새겨집니다. 인식주체가 없었더라면 그냥 물질적 충돌에 불과했을 것이 이제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미묘하지만, 변별체와 경험표상영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변별체에 남은 흔적과 경험표상영역에 새겨진 정보는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50쪽의 그림 1-1에서 물질세계와 서술세계를 구별하는 점선을 넘나듭니다. 두 개의 네모 사이의 위아래 양쪽방향 화살표의 양면성입니다. 물질적 측면에서 보면 대상과 변별체가 만나서 흔적을 만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건'과 '빈-사건'이 일어납니다. 특정 변별체에 흔적이 남지 않는 것도 흔적이 남는 것 못지 않은 정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해'라는 말이 직접 연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세미나에서 인용한 폰노이만의 온도 측정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비커에 담긴 물의 온도를 재려면 온도계를 넣어 수은/알콜의 높이를 보아야 합니다. 이 때 비커의 물이 대상이고 온도계는 변별체가 됩니다. (2) 온도계 높이를 알기 위해서는 전등의 빛이 수은/알콜의 경계면에 닿았다가 눈의 망막으로 와야 합니다. 이 때 온도계의 높이는 대상이 되고 빛(빛알)이 변별체가 됩니다. (3) 빛이 망막에 입사되면 망막에 있는 시신경에 나트륨 원소가 모이거나 흩어져서 전류가 만들어집니다. 이 때 빛이 대상이라면 시신경의 전위차는 변별체가 됩니다. (4) 시신경의 전위차는 뇌의 피질에서 뉴런을 발화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대목에서 비커에 담긴 물의 온도를 읽어냅니다. (5) 그 다음 단계가 어렵습니다. 온도계의 높이든, 망막에 생기는 흔적이든, 시신경의 전위차든, 뉴런의 발화든 여하간 어느 단계에서 흔적의 기록이 정보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32-33쪽에 서술된 것처럼 역학 모드와 서술 모드를 구별합니다. 하지만 서술 모드만으로는 '이해'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하간 세 번째 모드로서 '의식 모드'가 작동을 해야 비로소 '이해'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라는 문제는 매우 어렵고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인츠 폰푀르스터의 <이해를 이해하기> 같은 저작이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Heinz Foerster (2003) Understanding Understanding: Essays on Cybernetics and Cognition. Springer. https://doi.org/10.1007/b97451
2025.06.03
3. 3차원 vs. 2+1차원에 대해서는 아래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 고대그리스-이슬람-중세유럽으로 이어지는 자연철학의 전통에서 세상의 중심은 지구였습니다. 지구 주위에는 일곱 행성(七曜) 즉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있고, 그 바깥에는 항성 천구가 있습니다. 지구는 네 개의 권역(구 껍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달의 천구 바로 아래에는 불의 권역이 있고, 그 아래로 차례로 숨/바람의 권역, 물의 권역, 흙의 권역이 있습니다. 뒤의 세 권역은 현대의 기권(氣圈, Atmosphere), 수권(水圈 Hydrosphere), 지권(地圈,Geosphere)에 대략 연결됩니다. 불의 권역은 현대의 열권(熱圈, Thermosphere)이나 전리층과 비슷합니다. 여하간, 세상(우주)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이며, 이 중심을 향하는 방향이나 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이 곧 수직 방향입니다. 이와 달리 지표면의 동서남북은 어느 쪽으로도 대등합니다. 이것이 바로 (2+1)차원의 세계입니다. 세계(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생겨나면서 수직 방향도 동서남북과 대등하지 않을까 하는 관념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펼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공간의 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세 개의 숫자 $(x, y, z)$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눈 앞에 펼쳐지는 육면체 모양의 방 안에서의 위치만이 아니라 온 우주 전체에서의 위치에도 해당합니다. 그러면 수직 방향이나 동서 방향이나 남북 방향이 모두 대등합니다. 데카르트에게 우주는 (2+1)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었습니다. [그림출처: Peter Apian (1529) Cosmographiae introductio]
2025.06.03
중요한 지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또 몇 가지 글에 대한 링크도 있었구요. 따로 답글도 있었는데 사라졌더라구요. 저의 부족한 글도 여하간 토론과 대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주시면 어떨까요?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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