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몸-마음 이론과 송과선
데카르트가 쓴 <영혼의 정념들 Les Passions de l’âme>(흔히 <정념론>으로 표기) 34절에는 그 유명한 '작은 샘(선) la petite glande'이 등장하는데, 몸과 영혼이 연결되는 것은 '동물의 정기 les esprits animaux'을 통해서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언급된 '동물의 정기'는 고대 로마의 의사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의 이론에 바탕을 둔 개념이다.
갈레노스는 정맥, 동맥, 신경에서 흐르는 세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각각 natural spirit (pneuma), vital spirit (pneuma zootikon), psychic spirit (pneuma psychikon)이다.
앞의 두 '정기'는 추상적인 개념일 테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은 피이다. 정맥의 피와 동맥의 피의 색이 달라서였을까, 여하간 정맥과 동맥에서 흐르는 정기를 다른 것으로 여겼다. 신경도 해부학적으로 볼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이 세 번째 정기(프네우마 프쉬키콘)가 라틴어로 스피리투스 아니말리스(spiritus animalis) 즉 동물의 정기이다.
자연스런 정기는 간에서 만들어지며, 생동하는 정기(프네우마 조티콘)는 심장에서 만들어지며, 동물의 정기는 뇌에서 만들어져서 온몸으로 흐른다. 뜨거운 것이 맨발에 닿았을 때 재빨리 움츠러드는 것은 바로 이 동물의 정기 덕분이다.
https://bit.ly/3m8I2Kb
데카르트가 언급한 '동물의 정기 spritus animalis'가 오고가는 통로(관)는 현대적 의미의 신경이 아니다.
이븐 시나(Ibn Sina) 또는 아비케나(Avicenna )가 저술했다는 <의학정전 القانون في الطب al-Qānūn fī al-Ṭibb>은 갈레노스의 이론에 기반을 둔 그리스-로마 의학뿐 아니라 페르시아 의학과 인도 의학과 동아시아 의학도 반영되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Canon_of_Medicine
갈레노스를 따라 정맥, 동맥, 신경을 따라 각각 자연의 정기, 생동하는 정기, 동물의 정기가 흐른다는 이븐시나의 이론에서 '신경'을 지금 현대의 해부학에서 밝힌 신경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영어로 nerve, 독일어로 Nerv, 에스파냐어로 nervios, 러시아어로 нерв, 프랑스어로 nerf는 모두 라틴어 nervus에서 왔고, 이 말은 그리스어 네우론(νεῦρον)에서 왔는데, 원래의 의미는 '힘줄'에 더 가깝다. 12세기 경의 유대인 자연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가 해부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곧잘 인대, 힘줄, 척수, 신경을 혼동한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이 네 가지는 해부학상으로는 비슷한 모양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모두 신경(神經)이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따지면 '神'이 오고가는 길(經)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신神'은 아마 동아시아 성리학적 자연철학에서 말하던 귀鬼, 신神, 혼魂, 백魄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385-322 BCE)는 감각이나 운동은 심장이 좌우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보다 조금 뒤에 헤로필로스(Ἡρόφιλος 335–280 BCE)가 인체를 해부하여 시신경과 대뇌와 소뇌의 존재를 처음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신경을 통해 '프네우마'가 지나다닌다는 신비주의적인 설명까지 덧붙여졌다. 여하간 헤로필로스의 해부는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인 것 같다.
페르가몬 출신의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가 주장한 세 가지 프네우마(스피리투스)의 이론에서 세 번째 정기, 즉 프네우마 프쉬ㅋ히콘(스피리투스 아니말리스)은 '신경'을 따라 흐른다. 여기에서 '신경'은 현대 인체생리학에서 말하듯 나트륨 펌프가 작동하여 전위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관으로 여겨진 개념이다.
네르부스는 마치 식물의 물관이나 체관과 비슷한 것으로 개념화되었다. 그 관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도 실상 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정맥을 따라 흐르는 검붉은 피는 프네우마 퓌시스(스피리투스 나투랄리스)를 나르는 것이라면, 동맥을 따라 흐르는 선홍빛의 피는 프네우마 조오티콘(스피리투스 비탈리스)를 나르는 것이다.
나는 자연의 정기 또는 생동하는 정기를 그냥 피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동맥에서 피가 나르는 산소 같은 것이 생동하는 정기(spritus vitalis)에 더 가까울 듯 싶다.
데카르트가 '동물의 정기 (spiritus animalis)'에 대해 말할 때 새로운 해부학적/생리학적 발견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낡고 틀린 의학정전의 이론을 주워섬긴 것에 불과하다.
이븐 시나의 이론에서는 감각이나 운동과 연결된 생각이나 의지를 '신경'을 통해 흐르는 스피리투스 아니말리스와 구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와 연장적 실체(res extensa)를 존재론적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무리하게 주장한 데카르트로서는 이 둘이 만나는 신체기관이 뇌 어딘가에 있다고 주장해야 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 판 팔란트와의 편지에서, 그리고 엘리자베트 공주에게 헌정한 저서 <영혼의 정념들 Les Passions de l’âme>에서 굳이 '작은 샘(선) la petite glande'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루었어야 했다.
아래 그림은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에 나오는 신경계 그림이다.
송과선(솔방울샘; Pineal Gland; kônarion; glandula pinealis)은 데카르트의 이론에서 몸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다.
뇌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솔방울 모양의 이 샘이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와 연장된 실체(res extensa)를 매개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는 셈이다. 실상 아무 것도 분비되지 않으므로 샘(腺)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폐가 있지만.
당연한 일이겠지만 송과선을 처음 이야기한 것은 데카르트가 아니다. 이미 2세기 무렵에 로마의 의사이자 자연철학자인 갈레노스가 뇌 속에서 이 특이한 부분을 알아내고 그 기능에 대해서도 상세한 주장을 펼쳐 놓았다.
갈레노스는 송과선 안에 영혼의 기본 재료인 '프네우마 프슄혼 pneuma psychon'이 가득 차 있고, 몸의 다른 부분과 연결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프네우마는 엠페도클레스-아리스토텔레스의 네 원소, 즉 흙, 물, 숨, 불 중에서 숨(aer, ἀήρ, "air")과 거의 동의어이다.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의 의학 전통에서는 종종 숨과 불이 합해진 것이 프네우마인 것으로 서술되기도 했다. 여하간 갈레노스의 관점에서는 프네우마가 당연히 질료이고 물질적인 것이므로, 실체상으로는 일원론이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프네우마 프슄혼'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스피리투스 아니말리스 spiritus animalis' 즉 '동물의 정기'이다.
Julius Rocca (2003) Galen on the Brain: Anatomical Knowledge and Physiological Speculation in the Second Century AD (Studies in Ancient Medicine, Volume: 26) Brill.
https://brill.com/view/title/7636
데카르트가 <인간론>과 <정념론>에서 펼친 송과선 이야기는 세련되게 다듬은 갈레노스의 이론일 수도 있다. 갈레노스의 관점은 일원론적이라 할 수 있고 더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상호작용주의로 평가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이야기되듯이 데카르트를 과연 이원론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지 문득 의문이 든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pineal-gland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에서 "데카르트와 송과선" 항목을 집필한 헤르트-얀 록코르스트(Gert-Jan Lokhorst)는 데카르트의 심신이론을 적어도 12가지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간론>의 서술들은 이원론보다는 일원이측면론에 더 잘 부합한다는 논문도 있다.
Smith, C.U.M., 1998, Descartes’ pineal neuropsychology, Brain and Cognition, 36: 57–72. https://doi.org/10.1006/brcg.1997.0954
몸-마음 관계는 참 어렵다.
Art. 34. Comment l’âme et le corps agissent l’un contre l’autre.
"Concevons donc ici que l’âme a son siége principal dans la petite glande qui est au milieu du cerveau, d’oô elle rayonne en tout le reste du corps par l’entremise des esprits, des nerfs et même du sang, qui, participant aux impressions des esprits, les peut porter par les artéres en tous les membres ; et nous souvenant de ce qui a été dit ci-dessus de la machine de notre corps, à savoir, que les petits filets de nos nerfs sont tellement distribués en toutes ses parties qu’à l’occasion des divers mouvements qui y sont excités par les objets sensibles, ils ouvrent diversement les pores du cerveau, ce qui fait que les esprits animaux contenus en ces cavités entrent diversement dans les muscles, au moyen de quoi ils peuvent mouvoir les membres en toutes les diverses façons qu’ils sont capables d’être mus, et aussi que toutes les autres causes qui peuvent diversement mouvoir les esprits suffisent pour les conduire en divers muscles ; ajoutons ici que la petite glande qui est le principal siége de l’âme est tellement suspendue entre les cavités qui contiennent ces esprits, qu’elle peut être mue par eux en autant de diverses façons qu’il y a de diversités sensibles dans les objets ; mais qu’elle peut aussi être diversement mue par l’âme, laquelle est de telle nature qu’elle reçoit autant de diverses impressions en elle, c’est-à-dire qu’elle a autant de diverses perceptions qu’il arrive de divers mouvements en cette glande. Comme aussi réciproquement la machine du corps est tellement composée que, de cela seul que cette glande est diversement mue par l’âme ou par telle autre cause que ce puisse être, elle pousse les esprits qui l’environnent vers les pores du cerveau, qui les conduisent par les nerfs dans les muscles, au moyen de quoi elle leur fait mouvoir les membres."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연철학 강의 공부모임>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40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40 |
공지사항 |
3기 새 자연철학 세미나 상세 계획
시인처럼
|
2024.09.12
|
추천 0
|
조회 3592
|
시인처럼 | 2024.09.12 | 0 | 3592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5)
neomay33
|
2023.04.20
|
추천 3
|
조회 13064
|
neomay33 | 2023.04.20 | 3 | 13064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5848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5848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12702
|
시인처럼 | 2022.03.07 | 0 | 12702 |
682 |
[질문]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가요? (1)
자연사랑
|
2025.03.13
|
추천 0
|
조회 62
|
자연사랑 | 2025.03.13 | 0 | 62 |
681 |
[자료] 물리법칙과 '나'라는 문제
자연사랑
|
2025.03.12
|
추천 1
|
조회 80
|
자연사랑 | 2025.03.12 | 1 | 80 |
680 |
[자료] 자유에너지 경관과 준안정상태의 변화
자연사랑
|
2025.02.22
|
추천 1
|
조회 105
|
자연사랑 | 2025.02.22 | 1 | 105 |
679 |
[자료] 우주의 역사와 운명 (1)
자연사랑
|
2025.01.28
|
추천 1
|
조회 228
|
자연사랑 | 2025.01.28 | 1 | 228 |
678 |
[자료] 우주와 물질 - 개요 (4)
자연사랑
|
2025.01.27
|
추천 1
|
조회 239
|
자연사랑 | 2025.01.27 | 1 | 239 |
677 |
[자료] 고립계, 닫힌 계, 열린 계
자연사랑
|
2025.01.20
|
추천 1
|
조회 245
|
자연사랑 | 2025.01.20 | 1 | 245 |
676 |
[자료] 열역학 영째 법칙과 온도의 정의 (2)
자연사랑
|
2025.01.19
|
추천 0
|
조회 241
|
자연사랑 | 2025.01.19 | 0 | 241 |
675 |
상호작용 없는 측정(엘리추르-바이드만)과 겹실틈 실험
자연사랑
|
2024.12.25
|
추천 0
|
조회 220
|
자연사랑 | 2024.12.25 | 0 | 220 |
674 |
[자료] 푸리에 변환과 힐버트 공간
자연사랑
|
2024.12.10
|
추천 0
|
조회 301
|
자연사랑 | 2024.12.10 | 0 | 301 |
673 |
양자역학이 답하고 있는 문제: 상태를 어떻게 서술할까?
자연사랑
|
2024.12.09
|
추천 0
|
조회 257
|
자연사랑 | 2024.12.09 | 0 | 257 |
이 글의 내용은 2020년 10월에 진행된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데카르트의 몸-마음 이론과 송과선 이야기에 대한 보충으로 제가 다른 곳에 써 놓았던 메모를 급하게 옮겨온 것입니다. 그래서 글이 난삽합니다.
그나마 조금 더 정리한 것이 "[질문] 데카르트의 <인간론>(<정념론>)과 일원이측면론"입니다.
이 글보다는 "[질문] 데카르트의 <인간론>(<정념론>)과 일원이측면론"을 읽어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되어 댓글을 달아놓습니다.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는 https 주소를 적어도 자동으로 링크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위의 "[질문] 데카르트의..."의 링크를 https://shor.kr를 이용하여 축약했더니 링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링크를 수정해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난 10월 22일 세미나에서 데카르트의 몸-마음 이론과 송과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몇 가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관련된 내용을 제 소셜 미디어에 급하게 서둘러 메모해 두었는데, neomay3님의 권유로 여기에 일부를 옮겨옵니다.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 편집이 너무 어렵고 (제가 안 익숙하기도 하구요) 안 예뻐서 보기에는 안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질문하면 너무 답을 잘 달아주셔서 항상 질문이나 요청드리기가 주저돼요. ^^;
꼼꼼히 잘 읽어보겠습니다.
저도 워드프레스가 쉽지가 않네요. 아직 모르는 기능도 너무 많고. 아주 기본적인 것만 쓰고 있어요. ^^;
앞의 글 '데카르트와 송과선'은 안뜨네요? 에러가 나서 여기에 새로 쓰신 건가요? 제가 관리모드로 들어가서 지울까요?
저도 가끔 이런 일이 있어서 새로 쓴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래서 다른 문서에서 먼저 쓴 다음에 이곳에 카피해요. 날릴까봐요.. ^^;;;
맞습니다. 꽤 시간을 들여서 작성했는데, 어느 순간 날아가 버려서 좀 허탈했습니다. 원래는 소셜미디어의 글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조금 편집을 하고 덧붙이기도 했는데, 새로 올릴 때에는 그냥 그대로 그 글들 몇 개를 가져와 버려서 읽기가 더 안 좋아졌을 것 같습니다.
ㅠㅠ 안타깝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