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3차원 vs. 2+1차원; 낙하운동의 서술
공간을 3차원으로 인지한다는 것과 2+1차원으로 인지한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급하게 답글을 달았었는데, 말이 길어져서 여기에 독립된 글로 다시 올립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 고대그리스-이슬람-중세유럽으로 이어지는 자연철학의 전통에서 세상의 중심은 지구였습니다. 지구 주위에는 일곱 '행성'(七曜) 즉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있고, 그 바깥에는 항성 천구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붙박이별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떠돌이별 일곱 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너무나 분명해서 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도 이에 대한 기록이 확연하고, 동아시아에서도 태음(달), 태양(해), 다섯 행성 이렇게 일곱 개의 떠돌이별을 따로 특화시켰습니다. 현재의 '요일(曜日)'이란 말에 남아 있는 '요(曜)'가 다름 아니라 그 일곱 개의 떠돌이별에 대응합니다.
지구는 네 개의 권역(구 껍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달의 천구 바로 아래에는 불의 권역이 있고, 그 아래로 차례로 숨/바람의 권역, 물의 권역, 흙의 권역이 있습니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란 매우 축소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달의 천구 아래가 흙(테라 terra), 물(아쿠아 aqua), 숨(아에르 aer), 불(이그니스 ignis)의 네 가지 뿌리(리조마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네 뿌리가 권역(구 껍질)을 이룹니다. 뒤의 세 권역은 현대의 기권(氣圈 Atmosphere), 수권(水圈 Hydrosphere), 지권(地圈 Geosphere)에 대략 연결됩니다. 불의 권역은 현대의 열권(熱圈 Thermosphere)이나 전리층과 비슷합니다.
현대의 지구시스템은 기권(氣圈 Atmosphere), 수권(水圈 Hydrosphere), 지권(地圈 Geosphere)에 생물권(生物圈, Biosphere)을 합하여 네 개의 권역으로 구별된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림 출처: https://slidetodoc.com/ ]
현대의 지구과학 교과서에는 위와 같은 그림이 있지만, 단어를 보면 -sphere 즉 구(球)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세상을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은 Coelifer Atlas (1559)입니다. 제우스가 내린 형벌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천구의 한 가운데에 지구가 있습니다.

[그림출처: William Randolph Cunningham, The Cosmographical Glasse, London, John Day, 1559.]

위의 그림은 하르트만 셰델(Hartmann Schedel)이 1493년에 낸 책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나오는 삽화입니다. 왼쪽의 그림을 확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라틴어로 된 동심구의 이름을 더 살펴볼만합니다. 한 가운데 땅(흙, 테라 terra)이 있습니다. 그 바로 바깥에는 '물의 구(스페라 아쿠에 spera aque)'가 있고, 차례로 '숨의 구(스페라 아에리스 spera aeris)', '불의 구(스페라 이그니스 spera ignis)', '달의 구(스페라 루네 spera lune)', '수성의 구(스페라 메르쿠리 spera mercurii)', '금성의 구(스페라 베네리스 spera veneris)', '태양의 구(스페라 솔리스 spera solis)', '화성의 구(스페라 마르티스 spera martis)', '목성의 구(스페라 요비스 spera iovis)', '토성의 구(스페라 사투르니 spera saturni)'가 있습니다. 항성 천구 바깥으로 맨 밖에는 프리뭄 모빌레(primum mobile) 즉 '최초의 천구'가 있습니다.
아래 그림도 비슷합니다.

[그림출처: Peter Apian (1529) Cosmographiae introductio]
여하간, 세상(우주)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이며, 이 중심을 향하는 방향이나 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이 곧 수직 방향입니다. 이와 달리 지표면의 동서남북은 어느 쪽으로도 대등합니다. 이것이 바로 (2+1)차원의 세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 즉 고대그리스로부터 이슬람을 거쳐 12세기 번역의 홍수를 통해 중세 유럽 대학에서 널리 퍼진 자연철학에서 달의 천구 아래의 세계는 자연스러운 운동이 직선운동이라고 믿었습니다. 네 가지 뿌리(리조마타, 원소) 중 흙(테라)와 물(아쿠아)는 우주의 중심 곧 지구의 중심을 향해 내려가는 '무거움(그라비타스 gravitas)'을 지니는 반면, 숨(아에르)과 불(이그니스)는 우주의 중심 곧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올라가는 '가벼움(레비타스 levitas)'를 지닙니다.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그 네 뿌리의 비율에 따라 무거움과 가벼움을 나누어 갖기 때문입니다. 연기나 수증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가벼움이 다 많기 때문이고 쇳덩어리는 나무토막보다 더 많은 무거움을 지니고 있어서 더 빨리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는 달 아래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운동은 세상의 중심 곧 지구의 중심에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방향이나 들어가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직선운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무거운 것이 왜 떨어지는가 하는 것은 애초에 질문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렇게 그 물체가 놓여 있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위치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외부에서 뭔가 힘을 가하면 물체는 억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제 운동에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세계(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생겨나면서 수직 방향도 동서남북과 대등하지 않을까 하는 관념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펼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공간의 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세 개의 숫자 $(x, y, z)$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직각좌표계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Cartesian coordinate system 즉 데카르트 좌표계입니다. 이는 비단 눈 앞에 펼쳐지는 육면체 모양의 방 안에서의 위치만이 아니라 온 우주 전체에서의 위치에도 해당합니다.

[그림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artesian_coordinate_system ]
그러면 수직 방향이나 동서 방향이나 남북 방향이 모두 대등합니다. 데카르트에게 우주는 (2+1)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었습니다.
17세기 이후의 관념에서는 공간의 세 방향이 모두 대등하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식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수직 방향 또는 상하 방향은 수평 방향과 결코 대등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사방상하(四方上下)라고 불러서,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위아래를 구별했습니다.
수평방향과 상하 방향을 구별하지 않고 세 방향이 모두 대등하다고 하면, 이제 새로운 근본 문제가 생겨납니다. 도대체 왜 물체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거움(그라비타스)은 물체가 원래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질이 아니라 외부에서 가해진 힘 때문에 생기는 운동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골몰한 것이 요하네스 케플러였고, 이를 실질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이작 뉴턴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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