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후에 질문드립니다
질문 및 토론
양자역학
작성자
안소라
작성일
2025-05-21 01:33
조회
197
양자역학을 이야기 할 때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는데요, 왜 이 두 가지 상태로만 파악하는건지 궁금합니다. 입자, 파동 말고 다른 상태로 있는 무언가는 없는거에요?
변화화(-ization)가 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시도같아서 흥미로웠어요.
슬릿 실험을 하는데 왜 구멍은 두 개만 뚫었는지도 궁금하고요
관측이라는게 뭐길래 전자가 상태를 바꾸는걸까요? 물리학에서는 관측이라는게 일반사람들이 '본다'라는 개념하고 다른건가요?
파동으로도 보여졌다는것도 결국 관측된 결과일텐데 어떻게 본 건가요? (전자가 모르게 관측한거에요?)
사람의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관측에 주는 영향도 있을까요? 만약, 하나의 눈으로 보는 생명체가 있다면 다르게 포착됐을까요?
질문의 수준이 너무 부끄럽지만 깊이 공부하는 방법도 모르겠어요. GPT 사용하면서 물어보고는 있는데 아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업을 통해 차근차근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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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동으로도 보여졌다는것도 결국 관측된 결과일텐데 어떻게 본 건가요?" 이 질문도 무척 중요합니다. 물리학/자연철학에서는 '본다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과학철학의 개념이 "관찰의 이론적재성(theory-laden observation)"입니다. 이 말은 모든 관찰은 그 관찰에 앞서 모종의 이론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노우드 러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 1924-1967)은 Patterns of Discovery: An Inquiry into the Conceptual Foundations of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8) [과학적 발견의 패턴 (사이언스북스, 2007)]에서 모든 관찰은 근본적으로 이론을 등에 업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온도를 재려면 온도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온도계를 만들려면 또 다른 이론이 있어야 합니다. 온도를 그냥 곧이곧대로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빛이든 소리든 그것이 파동인지 아닌지 '볼' 수 있으려면, 다시 무엇을 확인해야 본 것이라 할 수 있는지 배경이론을 가져와야 합니다. 파동의 경우에는 그런 것으로 흔히 '간섭'이라는 현상을 가져옵니다. 위키피디어 해설에 있는 그림들이 간섭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Wave_interference
위키피디어에서 가져온 아래 사진이 전형적인 간섭 무늬입니다.
무척 좋은 질문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질문의 수준이 부끄럽다"라고 쓰셨지만, 여기 적으신 질문들은 모두 물리학, 자연과학, 자연철학, 철학 일반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들입니다. 또 그런 만큼 대답도 그리 쉽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저의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1. 입자 vs. 파동
입자인가, 파동인가의 논쟁은 실상 국소적(local, 局所的)인가, 광역적(global, 廣域的)인가의 논쟁입니다. 입자나 강체는 여하간 어느 곳이든 어느 순간이든 딱 거기에 있는 대상입니다. 이와 달리 파동은 온통 어디에나 언제나 퍼져 있습니다. 파동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비국소화(delocalization)'라는 어정쩡한 개념을 쓰기도 합니다.
어느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입자라면, 공간과 시간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 파동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 강체, 탄성체, 유체 등의 개념이 있습니다. 입자나 강체는 공간 속으로 이동할 뿐 공간을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달리 탄성체에는 탄성파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표면의 지각과 맨틀이 딱딱한 강체가 아니라 탄성체이기 때문에 지진파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액체나 기체에서는 아예 무엇인가가 공간 속으로 시간에 따라 퍼져나갑니다. 이것이 유체의 파동입니다.
(답글을 쓰다 보니 길어져서 새로 독립된 글로 다시 올렸습니다]
[그림 출처: https://gcsephysicsninja.com ]
2. 관측(observation 觀測)은 말 그대로 보면 "눈으로 재는 것"입니다. obs-라는 접두어에 '본다' 또는 '눈'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용어는 측정(measurement 測定)입니다. 여기에는 굳이 눈으로 보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귀로 듣거나 자로 재거나 저울로 무게를 다는 것을 모두 포괄합니다. 흔히 일상어에서 말하는 '보는 것'과 '관측'의 차이는 "그냥 볼 뿐 아니라 보는 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재는 것"이라는 의미에 있습니다.
원칙으로 보자면, 무엇인가를 측정하거나 관측한다고 해서 대상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측정하거나 관측하면 원래 그 대상이 지니고 있던 속성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이렇게 측정이나 관측이 대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아마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학문분야에서 점점 더 측정, 관측자, 관찰자, 관객, 청중 등의 역할이 커져나간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은 그 중에서도 관측이 대상을 급작스럽게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는 난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생각을 퍼뜨렸습니다. 상대성이론에서도 관찰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관찰/관측/측정이 대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 이론에서 측정/관측이 대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진 것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19세기까지 청중/관객이 연주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독일 바이로이트에는 페스트슈필하우스라는 공연장이 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직접 설계했다고 하는데, 이 공연장에서 청중/관객은 정말 쥐죽은 듯 음악연주를 들어야 합니다. 몇 시간씩 이어져나가는 연주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연주자의 모습은 관객에게 보이지 않고, 관객은 중간에 이동조차 제한됩니다. 과장하면, 관객/청중이 있든 없든 연주는 진행됩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의 음악에서는 관객/청중의 역할이 점점 더 커져갑니다. 특히 대중음악에서는 관객/청중의 환호와 박수와 시끌벅적한 반응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것도 아주 넓게 보면 "관측/측정이 대상을 바꾼다"라는 관념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양자역학에서 관측/측정이 대상을 바꾼다는 관념은 부적절하고 옳지 않습니다.)
3. 실틈을 왜 두 개만 열어서 겹실틈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여하간 실틈이 두 개만 있더라도 기대하는 '간섭'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보다 실틈을 많이 할 경우 기존에 확인된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 됩니다.
세 개 이상으로 실틈을 열어놓는 실험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가장 간단한 실험으로 실틈을 두 개 열어 놓는 실험을 해 봅니다. 이게 잘 되니까 세겹실틈도 합니다. "세겹실틈(삼중슬릿) 실험"(https://bit.ly/3Znh6fB)이 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틈이 아무 많은 여러겹실틈 실험(다중 슬릿)도 합니다. 이런 것을 격자회절 실험이라 부르면서 또 다른 종류의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 링크의 대담이 매우 유익합니다.
"[대담녹취 5-2]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4장.양자역학 (2)"
https://greenacademy.re.kr/archives/6340
5. "사람의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관측에 주는 영향도 있을까요? 만약, 하나의 눈으로 보는 생명체가 있다면 다르게 포착됐을까요?"라는 질문은 저 같은 경우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물음입니다. 아시다시피 눈이 두 개라서 3차원적으로 거리를 확인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수정체가 하나라면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의 거리를 구별하기 어렵겠지만, 수정체가 두 개이면 시차(parallax 視差)를 이용하여 거리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저는 그리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두 눈 사이의 거리가 너무 작아서 시차가 그리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arallax
여하간 지구에서 발견되는 동물들에게서는 눈이 두 개인 것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구아나, 코모도 도마뱀 같은 것은 눈이 세 개이고, 어류 중에 눈이 네 개인 것도 있고, 거미 중에 눈이 여덟 개인 것도 있습니다. 전갈은 눈이 12개라고 하고, 투구게 중에는 눈이 10개인 것도 있습니다. 제가 견문이 짧아서 눈이 하나인 동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바닥에 붙어 다니는 도마뱀의 두 눈은 같은 방향을 보지 못하지만, 머리 위쪽에 있는 세 번째 눈으로 공간적 위치를 파악한다고 합니다. 종종 눈이 뒤통수에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수정체의 갯수가 다르면 관측에서도 뭔가 다를까 하는 것은 차분하게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엉뚱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캐릭터 중 눈이 손바닥에 있는 캐릭터가 기억났습니다.
https://animalvivid.com/animals-with-more-than-2-eyes/
유익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사진 덕분에 미소 짓고 갑니다! ^^
책이 와서 책도 보고 올려주신 영상 자료도 보았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를 쏘았다' 라고 했을 때 쏜 그 행위 자체도 전자 입장에서는 관측되어 진 상황일텐데요. 전자 스스로가 날아간게 아니라 어떤 물리적 장치에 의해 날아갔으니까요..
스크린에 남겨진 흔적은 전자의 어떤 흔적인가요? 전자가 만약 입자라면 부딛혀서 뭐가 남은건지(물리적 흔적이겠죠?), 흔적(표식)의 정체도 궁금하고요
슬릿이라는 조건이 전자 상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틀 이라면 전자를 슬릿 없이 보낼 경우.. 그 양상(?)은 다르게 나타났을까요?
전자 자체가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성 그 자체라고 상상해보니 지금까지 알고 있던 원자, 전자 이런 용어들이 더욱 낯설게 느껴집니다!
(음악도 음악 자체가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음악이 되기도 하고 소리, 소음이 되기도 하고..
또 연주되지 않은 음악은 음악이라고 할 수 없겠죠? 음악도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연주자가 연주함으로써 음악으로 드러나는 구조라고 생각되네요~ 즉 연주자가 관측자 역할을 할 때 의미 있게 되는 것 같다고 느껴졌어요)
제가 눈의 갯수를 언급했던 이유는요~ 사람의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인지할 수 있는 차원이나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에서 였어요. 언급하셨던 도마뱀과 같은 동물들은 인간과는 다른 시각체계를 갖고 있고 또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을 인지하니 말이에요. 새로운 존재구조나 개념을 상정해보려면 이미 알고 있는 개념 너머에 있는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어요
제 부족한 답변이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흔적'이란 표현을 확장하면 '변별체의 철학'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주되지 않은 음악이 존재하긴 할까, 하는 상상을 해 보는데, 어쩌면 연주되지 않았다고 해도 악보 속에, 작곡가의 머리 속에, 곡을 해석하는 지휘자의 마음 속에, 곡을 들으려는 청중의 열망 속에 이미 존재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전에 눈사람님이 이 글에 대해 답글을 달아주셨던 것 같은데, 그 글에 저의 의견을 달려다 보니까 그 글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아, 네. 별내용 아니었어요. 자연사랑님 답 기다리는 동안 임시로 올려놓은 겁니다. 🙂
중요한 지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또 몇 가지 글에 대한 링크도 있었구요. 따로 답글도 있었는데 사라졌더라구요. 저의 부족한 글도 여하간 토론과 대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주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