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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앎으로 푸른 미래를 가꾸는 사람들의 공부모임

새 자연철학 세미나

[나의 질문] 최우석 - '선택의 여지' 그리고 '앎과 실재'

질문 및 토론
자연철학 일반
작성자
시인처럼
작성일
2025-04-14 19:05
조회
710

Q1. 자연 가운데 '선택의 여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Q1-1. 물질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은 ‘특성’, 특히 외력을 변화시키는 것인가?

“이는 말하자면 ‘특성’에 어떠한 변화가 가해지면 ‘상태’도 이에 따라 변해갈 것을 예측하는 것인데, 이것 또한 이러한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지식의 형태를 취한다. 이때 외부에서 가해지는 조처는 ‘특성’의 범주에 속하는 것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동일한 ‘상태’에 있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특성’에 차이가 가해짐으로써 ‘상태’의 변화 양상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고, 의사는 바로 이 점을 활용해 병을 치료한다.” (<자연철학 강의> p. 470) 


위의 인용문을 다시 눈여겨 보기 전에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자면 초기상태에 변화를 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대상의 특성을 변화시켜서 상태에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으로만 외부에서 어떤 변화를 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식은 특성에 변화를 가하는 것인가요?


Q1-2. 특성, 특히 외력의 변화는 어떻게 일으킬 수 있는가?

대상의 특성을 질량과 대상이 받고 있는 힘이라고 하면 외부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외력 뿐일 것 같습니다. 


장현광의 언명에서 찾아낼 수 있는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로 보자면 대상의 상태는 보편 변화의 원리를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를 알게 되면 미래의 상태도 알 수 있게 되고, 과거의 상태도 되짚어 알 수 있습니다. 라플라스의 말에서는 이 점이 "우주의 현재 상태는 이전의 상태로부터 도출된 결과이며 앞으로 닥쳐올 상태에 대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라고 표현됩니다. 


이러한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를 '결정론적 서술'이라고 한다면 이는 대상의 상태 변화에 국한된 것인가요? 아니면 대상의 특성, 특히 외력 또한 결정론적 서술로 서술되는 것인가요? 


Q1-3. 자연 가운데 '선택의 여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삶의 주체인 '나'를 전제한 대부분의 논의는 '선택'과 관계됩니다. 자연이 이러이러하고 나의 삶은 이러이러하니 이러한 선택이 마땅하다, 삶과 당위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이런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사람만이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자연 또한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자연 세계에는 신도 없고 어떤 목적도 없지만 기나긴 시간과 환경의 변화 가운데에서 어떤 형질은 선택되고 어떤 형질은 선택되지 않는 방식으로 생물종의 진화가 일어난다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인공선택이 되었건 자연선택이 되었건 어떤 '선택'이 가능하려면 자연 가운데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플라스의 말로 표현되는 '결정론적 서술'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대상의 상태는 결정론적으로 변화하지만 대상의 특성은 그러하지 않아 특성의 변화에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동역학적으로는 대상의 상태도 결정론적으로 변화하고, 대상의 특성 또한 다시 다른 대상의 상태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상의 특성과 상태 모두가 결정론적으로 변화한다고 이해해야 하지만 여러 대상들이 계를 이루는 통계역학적 서술에서 다소간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고전역학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선택의 여지'가 양자역학에서는 허용된다고 보아야 할까요?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는 기본적으로 결정론적 자연 이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일텐데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는 어디에 '선택의 여지'를 두고 있는 걸까요?


Q2. 우리의 '합의된 앎'이 곧 '실재'인가?

Q2-1. 실재에 대한 우리의 (현대과학적) 앎을 곧 '실재'라 여길 수 있을까?

<자연철학 강의> 9장을 읽으면서 '앎과 실재'에 관해 제가 제 나름으로 정리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 앎의 주체는 ‘대상 층’과 만날 길이 없다.
  • 앎의 주체는 ‘사건 층’에서 얻게 되는 단편적인 정보들로 대상 세계에 대한 추측, 가설을 시험하고 검증, 반증하는 방식으로만 대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 따라서 “무엇이 어떻게 실재하는가”에 대한 유일한 답은 “우리가 무엇이 어떻게 실재한다고 인식하는가”이다.

“우리가 우주의 운행원리를 알려면 이렇게 얻어진 우리 앎을 들여다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적어도 이 앎은 40억 년의 긴 시간 동안 우리 온생명 전체가 생존을 걸고 다듬어온 최종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연철학 강의, pp. 483-484)

그런데 현대 자연철학이 자연을 서술하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소박한 실재관'과는 거리가 먼 서술, 이해를 줄곧 만나게 됩니다. 가령 시간과 공간은 4차원 시공간, 4차원 운동량-에너지 공간으로 표현되는데 장회익 자연철학에서는 이를 이해를 돕기 위한 수학적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재'로 본다고 파악됩니다. 양자역학은 이 두 공간이 맞공간을 이루고 있다는 새로운 바탕관념 위에 서있다고 정리되는 데 이때 이 새로운 바탕관념은 새로운 도구의 도입이 아니라 그야말로 새로운 시공간 이해인 것이니까요. 또 대상이 '성향'으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새로운 존재론 역시 현대 양자역학이 보여주고 있는 자연 서술이 도구적인 것 이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재관'은 굉장히 낯설면서도 우리의 '소박한 실재관'과는 거리가 멀어서 소화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현대과학의 언어와 서술방식을 모르면 실재에 대한 상을 갖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큰 장벽을 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Q2-2. 장회익 자연철학의 '실재관'은 90년대에 비해 변경되었는가?

오늘 궁금한 참에 과거 장회익 자연철학의 실재관은 어떠했는지 이해하려고 <양자역학과 실재성의 문제 - 벨의 부등식 해석을 통한 고찰> (1994, 계간 과학사상, pp.93-112)을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번 보아야 이해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말미의 다음 문장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비라플라스적 서술의 경우 우리는 관측된 물리량들의 값을 대상에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다. 오직 이로부터 유추된 상태만을 대상에 부여하여 미래 상태 산출에 활용하게 되지만 이것 또한 새로운 예측을 위한 조작적 의미 이상을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즉, 대상에 부여되는 이러한 상태조차도 실재성을 지닌 그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다음 관측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유효한 일종의 '정보 집약물'로서 부여하는 것이다." (p. 109)

최근 읽기 모임에 끼어들어 겨우겨우 읽고 있는 포퍼의 ⟪추측과 논박⟫ 1권의 3장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견해"에서 포퍼는 과학적 이론이 실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본질주의'와 '도구주의', 그리고 포퍼 자신의 '진정한 추측들'이라는 세 가지로 나누고 있더군요. 당연히 포퍼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모두 배격하고, 세 번째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는데요, 저는 장회익 자연철학의 실재관도 포퍼의 이 세 번째 견해와 같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4년 위 논문의 인용문은 이 때만 해도 과학적 이론을 그 자체로 '실재'로 받아들일 필요 없이 '도구'로 이해하는 게 적당하다는 입장에 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제 오해인가요, 아니면 입장의 변화가 있던 걸까요?

Q2-3. 우리의 '앎'이 곧 '실재'라고 하면 '상대주의적 실재관'이 허용되지 않을까?

일상적으로 우리는 각자 자기가 이해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 이상으로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이 때에는 인류 전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리 개개인 각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각자가 이해하는 세계상이 다른 경우 각자의 실재가 각자의 세계상으로 수렴된다고 하면 앎의 상대주의를 넘어서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가 허용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지 우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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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지프스 시지프스
    2025-04-21 10:22

    "...각자의 실재가 각자의 세계상으로 수렴된다고 하면 ...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

    요즘 인류학을 귀동냥하고 있는데요, 거기에선 정말 그렇게도 봅니다 !
    하나의 자연에 여러 문화가 있다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었는데, 그걸 뒤집어서 문화는 하나인데 제각기 다른 자연이 여럿 있다고도 본다네요.
    심지어 사람의 집단끼리의 얘기가 아니라, 재규어에게도 이걸 적용한다고도 하구요. 그럼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가 되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 상대적 실재, 상대적 존재론이라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요근래 계속 문제가 되는, 가짜뉴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보통은 하나의 fact, 다양한 해석이라고 여기지요.
    우리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진실, fact 는 하나이고, 네 생각이 틀렸어. 네 인식과 생각이 잘못되었느니, 자 봐라 진짜 fact 는 이거야,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해봐. 편향된 네 생각을 고쳐야 해 !
    그래, 생각만 고쳐먹으면 우린 다시 잘 지낼 수 있어 !

    그런데, 여러 실재가 가능하다면, 각자 말 그대로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게 됩니다. 이렇다면, 특수상대론처럼 각자마다 관성계가 다를 수 있고, 뭐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면 ...
    현실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세계를 부셔야 합니다 ! 아니면 그쪽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격리 시키던지요.
    훨씬 과격한 방식 되겠네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예전에 그렇게들 했어요.
    만화가 학생에게 나쁘다. 만화를 모아서 불태우기도 했지요. 그러면 만화로 구축되는 세계는 파괴된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같은 만화를 봐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 뭐 이런 얘기는 아예 하질 않지요)
    범죄자는 사회와 아예 격리해야 되다며 삼청교육대에 집어 넣었구요.
    지역감정, 학벌 등등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그래서 서로 구별되고 그걸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예전엔 흔했지요.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라면 이런 대응을 해야 할텐데, 뭔가 잘못된 것 같지요? 그렇다면, 이런 과정 전체를 일종의 귀류법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처음 가정을 실재의 상대주의라고 한다면 저런 과격한 결과가 나오고 그걸 받아들이긴 어렵다. 그러므로 실재의 상대주의는 허용되서는 안된다 !
    (뭔가 구멍이 숭숭 뚫린 전개이긴 한데요, 차별, 혐오가 따라오는 결과는 피하고만 싶네요.)


  • 자연사랑 자연사랑
    2025-04-19 09:59

    이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고 심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그레테 헤르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Grete_Hermann

    그레테 헤르만이 1933년 "결정론과 양자역학"이란 논문을 썼고, 1935년에 "양자역학의 자연철학적 기초"라는 제목의 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헤르만의 접근이 위에 올리신 첫 번째 묶음의 질문과 직접 연결됩니다. 나중에 기회 되는 대로 그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양자역학 나아가 물리학 그리고 자연철학 전반에 대한 장회익 선생님의 입장이 도구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30년쯤 전에도 자주 나왔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에 그 때 장회익 선생님의 대답은 기존의 과학적 실재론 논쟁에서 말하는 실재론(본질주의)-반실재론(도구주의)의 틀은 부적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칼 포퍼도 1950년대와 달리 1970년대 이후에는 실재론-반실재론의 대립구도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 자연사랑 자연사랑
    2025-04-19 10:03

    합의된 앎이 곧 실재라고 말하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충 분류하는 철학적/예술적/문학적 사조와 통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령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아주 긴 주석이라고들 하는데, 들뢰즈는 플라톤의 사유에서 이데아를 빼 버립니다. 즉 원본 없는 모사들만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식/앎/진리 등에 대한 상대주의적 접근으로 연결되는 듯이 보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참인가 하는 문제를 합의로 정한다는 것은 가령 '본질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합리하고 부적절한 일이겠습니다. 최근의 정치적 상황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포스트진리(post-truth)'라는 개념일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 진리인가 하는 것은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방식으로 정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입니다. 지금도 다시 꼼꼼하게 살펴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 질문의 문구 중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가 허용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지 우려가 있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추측해 보면, 실재에 대한 상대주의는 피해야 할 무엇으로 여겨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것은 뭔가 상대주의적 접근이 아닌 진짜, 실재, 실체, 본질 같은 것이 있기는 있다는 믿음과 이어지기 쉽습니다. 들뢰즈가 “원본 없는 모사”를 말할 때에는 모사들이 모두 대등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함축합니다. 상대성이론에서 모든 관성계가 대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상대성원리입니다. 어느 한 관성계가 특별하다거나 특권을 갖고 있다거나 우월하다거나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념을 수용하지 않으면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식론의 측면에서도 상대성이론이 가져온 혁명적 접근/관점을 고려할 때, 수많은 모사들 중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적 존재론을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 시인처럼 시인처럼
      2025-04-21 11:23

      성실하게 홈페이지를 챙겨보지 못해서 이제야 답글을 달아봅니다.

      제가 비판적으로 보는 '상대주의'는 "너의 앎도 진리가 아니고 나의 앎도 진리가 아니라면 다 똑같은 거 아니냐"하는 입장인데요, 말하자면 "0이나 1이 아니면 다 똑같다"는 태도인거죠. 제가 세상에 제일 싫어하는 태도 중 하나가 "50보 100보"인데요, 가령 0.000001도 1이 아니고 0.99999999도 1이 아니니 1 아니면 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김건희가 찾아다니는 무당 것들이 현대과학도 절대진리가 아니니 다 마찬가지다 한다면 이것을 용인해야 할까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던'을 비판하면서 이런 여지를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우리의 앎은 어느 것도 '진리'로 확증될 수 없지만 '더 좋은 추측', '더욱 더 좋은 추측'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말도 안 되는 추측', '일고의 가치도 없는 추측'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주의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 자연사랑 자연사랑
        2025-04-21 17:37

        답글 고맙습니다. 실상 더 좋은 추측, 더욱 더 좋은 추측 등을 말하는 것이 상대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과 기준과 평가가 다를 수 있다는 메타이론적인 접근입니다. "오십보 백보"에 견주어 본다면, 탈영한 두 사람을 50보 도망갔는가 100보 도망갔는가로 볼 수도 있고, 두 사람의 성별과 피부색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람인지 동물인지 볼 수도 있고,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로 비교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과학철학의 맥락에서도 실재론과 반실재론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게 아니라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 구성적 경험주의(constructive empiricism), 도구주의(instrumentalism), 상대주의(사회적 무정부주의) 등으로 스펙트럼처럼 입장과 견해가 펼쳐집니다.

        realism.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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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족한 답변이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흔적'이란 표현을 확장하면 '변별체의 철학'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주되지 않은 음악이 존재하긴 할까, 하는 상상을 해 보는데, 어쩌면 연주되지 않았다고 해도 악보 속에, 작곡가의 머리 속에, 곡을 해석하는 지휘자의 마음 속에, 곡을 들으려는 청중의 열망 속에 이미 존재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2025.05.23
그 논문은 겹실틈 실험을 이용하여 확률분포의 시간의존성을 확인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겹실틈을 지난 뒤 다음 스크린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다른 해석에 대하여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의 표준 형식체계 외에 드브로이-봄의 길잡피 파동 이론, 넬슨의 확률통계적 접근 등을 도입하여 비교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실험 구상만은 아니고 컴퓨터를 이용하여 시뮬레이션 실험을 한 것입니다.
2025.05.23
유익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사진 덕분에 미소 짓고 갑니다! ^^ 책이 와서 책도 보고 올려주신 영상 자료도 보았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를 쏘았다' 라고 했을 때 쏜 그 행위 자체도 전자 입장에서는 관측되어 진 상황일텐데요. 전자 스스로가 날아간게 아니라 어떤 물리적 장치에 의해 날아갔으니까요.. 스크린에 남겨진 흔적은 전자의 어떤 흔적인가요? 전자가 만약 입자라면 부딛혀서 뭐가 남은건지(물리적 흔적이겠죠?), 흔적(표식)의 정체도 궁금하고요 슬릿이라는 조건이 전자 상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틀 이라면 전자를 슬릿 없이 보낼 경우.. 그 양상(?)은 다르게 나타났을까요? 전자 자체가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성 그 자체라고 상상해보니 지금까지 알고 있던 원자, 전자 이런 용어들이 더욱 낯설게 느껴집니다! (음악도 음악 자체가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음악이 되기도 하고 소리, 소음이 되기도 하고.. 또 연주되지 않은 음악은 음악이라고 할 수 없겠죠? 음악도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연주자가 연주함으로써 음악으로 드러나는 구조라고 생각되네요~ 즉 연주자가 관측자 역할을 할 때 의미 있게 되는 것 같다고 느껴졌어요) 제가 눈의 갯수를 언급했던 이유는요~ 사람의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인지할 수 있는 차원이나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에서 였어요. 언급하셨던 도마뱀과 같은 동물들은 인간과는 다른 시각체계를 갖고 있고 또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을 인지하니 말이에요. 새로운 존재구조나 개념을 상정해보려면 이미 알고 있는 개념 너머에 있는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어요
2025.05.22
맞습니다. 아주 적절하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파동이라는 개념을 쓰기는 것보다는 마당(field 場)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대개 "입자 vs 파동"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더 정확하고 의미 있는 대조는 "입자 vs 마당"입니다. 실상 '마당'이라는 것도 고전적 마당과 양자 마당이 구별됩니다. 파동이라 부르는 것은 위치와 시간의 함수로서 결국 일종의 마당입니다. 다만 마당이 언제나 파동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긴 해도 대부분의 마당은 어떤 식으로든 파동과 연결됩니다. 이와 달리 입자는 마당이 아닙니다.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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