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18-19세기의 중력 개념
네덜란드의 과학사학자 프란스 판륀테른은 "가설들의 틀을 세우기: 18세기와 19세기의 중력 개념들"이란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뉴턴과 뉴턴주의, 그리고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이와 관련된 자연철학이 어떻게 수용되고 전개되었는지 상세하게 밝혔습니다.
- van Lunteren, F. H. (1991). Framing Hypotheses: Conceptions of Gravity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Utrecht University (PhD thesis). (링크)
판륀테른의 서술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관련된 사료를 샅샅이 뒤지고 살피면서 정리해 놓은 것이라 매우 유익합니다.
판륀테른은 고등학교 시절 처음 뉴턴의 '만유인력' 개념을 배울 때를 상기합니다.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돌덩어리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생각, 지금 내가 손을 들면, 지구의 온갖 '만유(萬有)'가 다 그 손을 잡아당기느라 혼비백산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다가 망신을 당한 기억을 말합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면 이런 것이 이해가 될 줄 알았는데, 물리학과에 가서 수업을 들으니 방정식들과 더 많은 방정식들을 풀면서 온갖 $x$와 $y$의 의미를 갖다 붙이는 일이 일상이어서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 쪽으로 공부의 방향을 틀었고, 과학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학의 물리학과 정규 과정에서는 뉴턴이 말한, 다소 황당하고 신비주의적인 관념, 즉 "모든 것이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해 버립니다. 뉴턴의 말을 왜곡하여 "과학은 '왜why?'가 아니라 '어떻게how?'를 묻고 거기에만 답한다."라는 근거가 약한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과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점말로 과학이 '왜?'를 묻지 않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충 답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전개되어 왔을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과학은 (그리고 그 정당한 뿌리이자 미래인 자연철학은) 맨처음부터 '왜?'라는 질문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판륀테른의 학위논문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 18세기과 19세기의 중력 개념은 생각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정교하고 복잡합니다. '중력(重力)'이란 말로 번역했지만, 영어로 gravity라고 쓰는 것에 '힘'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냥 단순하게 '무거움'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조금 더 정확한 역사를 살피자면, 18세기 일본의 란가쿠샤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이 네덜란드어로 kwaliteit (영어로 quality)라 하는 것을 性(せい, 세이)로, hoeveelheid (영어 quantity)를 量(りょ, 료)로, substantie (영어 substance)를 質(しつ, 시츠)로 옮긴 것을 계승하여, 시즈키 타다오(志筑 忠雄, 1760–1806)가 gravity라는 개념을 重力(じゅうりょく, 주료쿠)로 옮기는 바람에 역사적으로 그냥 '힘(力)' 개념이 포함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힘은 네덜란드어로 zwaartekracht인데, 여기에서 kracht는 힘이라는 의미여서 네덜란드어로부터 번역할 때 별 생각 없이 '힘(力)'을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개념은 직접 만나지 않아도 힘과 영향과 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어서 맨 처음부터 논란이 되었습니다. 말년의 뉴턴은 이것을 신의 개입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는데, 영국에서 뉴턴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만유인력이 가장 명확한 신의 섭리이자 개입이자 참여라고 믿었습니다. 유럽대륙에서도 영국의 뉴턴주의자와 비슷한 뉴턴주의자가 여럿 생겨났고, 만유인력을 신의 개입으로 이해하는 접근이 꽤 지지를 받았습니다.
1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물리학적 설명에서 신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커져갔고, 자연스럽게 만유인력이라고도 부르는 보편중력의 근원과 메커니즘을 밝혀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강해졌습니다. 에른하르트 오일러는 이와 관련하여 '에테르'라는 해묵은 관념을 끄집어 냈습니다. 행성들이 움직이는 우주 공간 속에 있어야 하므로 밀도가 매우 낮아 아주 성기게 분포해 있지만, 이 세상 어디든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는 물체에 직접 영향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탄성이 매우 높은 그런 존재자였습니다. 18세기에 점점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자석(자성)과 전기도 이런 에테르 비슷한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를 '에플루비움(effluvium)'이라 부르고, 에테르(ehter)와 더불어 '미묘한 유체(subtle fluid)' 또는 '무게 없는 유체(imponderible fluid)'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세상에는 보통의 물질과 미묘한 유체라는 두 종류의 존재자가 있다는 것이 18세기 자연철학자들이 꽤 공유했던 믿음이었습니다. 빛이 전기와 자기의 파동이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임을 처음 주장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에테르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맥스웰의 주장을 당시 상황에 따라 다시 서술하면 "전기 에플루비움과 자기 에플루비움은 실상 전자기 에테르이며, 전자기 에테르는 실상 빛 에테르이다."라는 문장이 됩니다.
판륀테른의 상세한 논의를 요약한 것이 아래 논문에 있습니다.
- van Lunteren, F. (1993). Eighteenth-Century Conceptions of Gravitation. In: Petry, M.J. (eds) Hegel and Newtonianism. Archives Internationales D’Histoire Des Idées / International Archives of the History of Ideas, vol 136. Springer, Dordrecht.
https://doi.org/10.1007/978-94-011-1662-6_24
이 논문이 포함된 논문집은 헤겔과 뉴턴주의의 관계를 상세하게 해명하고 있어서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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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주의자라고 통칭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다양합니다. 아무래도 뉴턴주의자들이 유럽대륙쪽보다는 영국에 많긴 했지만, 대륙쪽에서도 지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영국의 뉴턴주의자로는 대략 에드먼드 핼리를 비롯하여 수학자(David Gregory, John Keill, William Whiston, Roger Cotes), 성직자(Richard Bentley, William Derham, Samuel Clarke), 의학 및 생리학에 관련된 사람(John Friend, George Cheyne, George Hepburn, William Cockburn, Richard Mead, Stephen Hales) 등이 거론되는데, 조제프 프리스틀리도 뉴턴주의자로 간주됩니다.
유럽대륙에서는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뉴턴주의자는 소수파였습니다. 네덜란드에 뉴턴주의자가 꽤 있었습니다. Burchardus de Volder, Jacob Makreel, Adriaan Verwer, Bernard Nieuwentijt, Willem Jacob ’s Gravesande, Petrus van Musschenbroek 등이 네덜란드의 뉴턴주의자로 분류됩니다. 또 Giovanni Domenico Cassini, Vincenzo Viviani, Guido Grandi, Étienne François Geoffroy, 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 Maria Gaetana Agnesi 등이 유럽대륙에 있던 뉴턴주의자로 거론됩니다.
[초기 근대 철학 및 과학 백과사전]의 아래 두 항목에 상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Henry, J. (2022). Newtonianism in Britain. In: Jalobeanu, D., Wolfe, C.T. (eds) Encyclopedia of Early Modern Philosophy and the Sciences. Springer, Cham. https://doi.org/10.1007/978-3-319-31069-5_116
Mandelbrote, S. (2020). Newtonianism on the Continent. In: Jalobeanu, D., Wolfe, C.T. (eds) Encyclopedia of Early Modern Philosophy and the Sciences. Springer, Cham. https://doi.org/10.1007/978-3-319-20791-9_120-1
첨부파일 : Encyclopedia-of-Early-Modern-Philosophy-and-the-Sciences-Dana-Jalobeanu-Charles-T.-Wolfe-eds.pdf
학위논문이 350쪽. ㅠㅠ 과학사 과학철학 쪽은 다 이런가요? ^^; 이렇게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위에 노란 책은 제목(헤겔과 뉴턴주의)이 너무 멋져서 읽어보고 싶네요.
특히 과학사 분야의 학위논문은 350쪽 정도의 분량이 비교적 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 륀테른의 학위논문은 위의 링크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습니다. [헤겔과 뉴턴주의]에 대해 따로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링크)
감사합니다! 그런데 『헤겔과 뉴턴주의』는 파...팔백 쪽이 넘네요.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