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량-무게, 중력질량-관성질량, 속도-속력
지난 번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몇 가지 물리학 고유의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몇 가지 용어쌍에 대해 저의 의견을 조금 더 적어보고자 합니다.
(1) 질량과 무게
중등과정의 과학교육에서는 질량과 무게가 다른 것임을 크게 강조합니다. '무게'는 어원을 따져보면 "무거움의 정도"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상 단어입니다. 한자어로 하면 '중량(重量)'이라 합니다. '질량(質量)'이란 단어에서 한자만을 따지면 그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가령 조선시대 문헌들이나 기타의 글에서 重量이나 이와 연결된 표현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質과 量의 두 글자를 조합한 표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두 글자를 붙여 놓은 것이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량(무게)과 질량을 구별해야 한다는 중등과학교육의 강조점은 가령 영어 표현 weight와 mass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이 구별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글 "질량개념의 의미와 간단한 역사"에서 적은 것처럼 1770년대에 처음으로 용수철을 이용한 저울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령 영어권에서 이 두 단어는 실질적으로 동의어였습니다. 지금도 일상어에서는 weight과 mass를 구별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영어 단어 mass는 '빵 반죽'을 의미하는 라틴어 massa에서 왔고, 이 말은 다시 그리스어 maza (μάζα)와 헤브루어 마세(מאַסע)에서 왔습니다. (가톨릭의 '미사 missa'가 영어로 Mass인데, 이것이 성체성사에서 빵을 먹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영어에서만 우연히 두 의미의 말이 한 단어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가령 독일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미사'가 Messe이고 '질량'은 Masse로 다른 단어를 씁니다.)
그러면 물리학, 더 넓게 말해 자연철학에서는 질량과 무게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그 구별에 대해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이전에 뉴턴의 자연철학을 공부할 때 현대 물리학과 너무나 확연하게 달라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뉴턴이 말하는 '물질의 양(Quantitas Materiae)'은 무게나 중량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의 물리학에서 본다면, 중량의 단위는 '힘'의 단위와 같고, 질량의 단위는 '힘'의 단위를 '가속도'의 단위로 나눈 것과 같으니까, 중량과 질량을 구별하는 것이 물리학 안에서는 의미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2) 관성질량과 중력질량
그런데 이러한 구별은 조금 더 어려운 문제로 연결됩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는 여덟 개의 정의로 시작하는데, 그 중 세 번째 정의가 "물질의 내재적 힘"입니다.
Definito III. Materiae vis insita est potentia resistendi, qua corpus unumquodque, quantum is se est, perseverat in statu suo vel quiescendi vel movendi unformiter in directum.
(Definition 3. Inherent force of matter is the power of resisting by which every body, so far as it is able, perseveres in its state either of resting or of moving uniformly straight forward.)
물질의 내재적 힘은 물체가 정지해 있거나 반듯하게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게 만드는 힘으로 정의합니다. 요즘의 용어로는 '관성(慣性)'입니다. 영어의 inertia와 같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원래 하던 식으로 그저 현상유지에 급급한 것을 '관성'이라고 흔히 부르는데, 내용상 같은 의미가 될 것입니다.
뉴턴의 책을 읽을 때 처음 만나는 난관이 바로 이 "물질의 내재적 힘" 또는 '관성'입니다. 현대의 물리학에는 이 개념과 딱 들어맞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저항력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공기저항 같은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물체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 속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이 이런 이상한 용어와 개념을 1687년에 출간된 그 책에서 계속 사용한 것은 당시의 자연철학에서 '임페투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임페투스라는 용어 자체는 14세기에 장 뷔리당이 만든 것이지만, 그 뿌리를 찾아보면 6세기 고대 헬레니즘 시기 그리스의 필로포누스까지 거슬러 갈 수 있고, 이 그리스 자연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방대한 번역 사업을 펼치고 그 번역된 책을 가지고 더 깊이 탐구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 이슬람 자연철학이 있습니다. 11세기의 이븐시나(아비케나)는 필로포누스의 이론을 더 확장했고, 12세기의 이슬람 자연철학자 누르 앗딘 알 비트루지(알페트라기우스)의 손을 거쳐 장 뷔리당이 이를 정리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ory_of_impetus
활을 떠난 화살이 운동할 수 있는 것은 손에서 전달된 임페투스가 화살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인데, 공기저항 같은 게 없다면 그 임페투스 때문에 화살이 그대로 반듯하게 일정한 빠르기로 날아갈 수 있을 겁니다. 공기저항 같은 것 때문에 화살에 전달된 임페투스는 주변에 흩어져 버립니다. 임페투스가 다 떨어지면 화살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뉴턴이 새로 정의한 '물질의 내재적 힘 vis insita'는 14세기의 '임페투스'와 같은 건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그와 유사합니다. 또 이 물질의 내재적 힘은 물질의 양에 비례합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물질의 양' 즉 '질량'은 일종의 '관성'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은 별로 없지만 20세기 중엽까지도 '질량'과 '관성'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뉴턴은 행성의 운동이 타원 궤적을 그린다면 태양과 행성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아래그림에 있는 명제 11 (문제 6)이 바로 그 증명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출처: Phil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힘, 즉 태양이 행성에 미치는 가해진 힘(vis impressa)은 단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합니다. 그런데 뉴턴의 책에서는 이 힘이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는 이야기는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의 물리학 교과서에 흔하게 나오는 $$ F = \frac{GMm}{r^2}$$라는 수식은 만유인력 또는보편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에 각각 비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수식은 뉴턴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초기의 서술은 1798년 헨리 캐븐디시의 것입니다. 1785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샤를-오귀스탱 쿨롱이 정전기에서 보이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전기를 띠고 있는 두 물체의 전기의 양(전하량)이 각각 비례한다는 것을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으로 밝히고 발표했습니다. 이를 $$ F = \frac{kQq}{r^2}$$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영국의자연철학자 존 미첼(John Mitchell 1724-1793)[https://en.wikipedia.org/wiki/John_Michell]는 1783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정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정교한 실험을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을 실제로 하지 못한 채 1793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 실험을 자신의 오랜 벗 대신 해서 성공한 사람이 헨리 케븐디시입니다.
위의 수식은 정전기력의 원천이 전하인 것처럼 중력의 원천이 질량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중력 질량'이란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정말로 중력의 원천이 질량, 즉 물질의 양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현상적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또 이 힘은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상 그 '질량'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여전히 논쟁적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캐븐디시의 수식에는 새로운 종류의 상수, 즉 뉴턴 중력상수 $G$가 도입됩니다. 캐븐디시의 논문의 제목은 "지구의 밀도를 결정하기 위한 실험 (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https://doi.org/10.1098/rstl.1798.0022]입니다.
수식을 $$ (m_I) g = \frac{G M_E (m_G)}{{R_E}^2}$$와 같이 써 놓고 관성질량 $m_I$와 중력질량 $m_G$가 같기 때문에 지표면에서의 중력가속도 $g$는 $$ g = \frac{G M_E }{{R_E}^2}$$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 좀 공허할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애초에 중력이라는 힘을 만들어낸다는 관념과 상태 변화에 대해 버팅기는 내재적 힘(관성)은 서로 무관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단순화시키면, 애초에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닌데, 굳이 다르다고 한 뒤에, 알고 보니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식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물리학 교과서에 "질량 X 가속도 = 힘"이라는 공식이 고전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버클리는 뉴턴 자연철학에서 '힘'이라는 관념이 일상적 경험이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상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하면서, '힘'이라는 개념을 전혀 도입하지 않고 운동을 설명하려 애를 썼습니다. 이와 달리 18세기 크로아티아(달마시아) 지역 출신의 자연철학자 루제르 보스코비치(Roger Joseph Boscovich [Ruđer Josip Bošković] 1711-1787)는 1758년에 초판이 간행된 Philosophiæ naturalis theoria redacta ad unicam legem virium in natura existentium (자연에 존재하는 단일한 힘들의 법칙만으로 유도한 자연철학의 이론)>에서 힘들 사이의 관계만으로 운동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Roger_Joseph_Boscovich]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이를 계승하여 이와 관련된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3) 속도와 속력
데카르트는 1630년쯤에 탈고한 <세계와 빛에 대한 논고 (Traité du monde et de la lumière)>와 1644년에 발표한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에서 충돌의 일반 원리를 다루면서, 임페투스와 유사한 운동량(momentum)의 보존을 주장했습니다. 임페투스처럼 운동량은 물질의 양이 많을수록 그리고 물체가 빠를수록 더 크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물체의 운동방향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실험을 직접 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책에 등장하는 충돌의 이론은 모두 틀려 있습니다.
1668년 영국 런던 왕립협회는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문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해 11월에 존 월리스(John Wallis)의 논문이 투고되었고, 12월에는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의 논문이 투고되었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의 논문도 투고되었습니다. 지금의 관점과 가장 가까운 것은 하위헌스의 논문이었습니다. 하위헌스는 운동량을 질량과 빠르기의 곱으로 볼 때 운동의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168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갈릴레오의 낙하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질량과 빠르기의 곱($m v$)이 아니라 질량에 빠르기 제곱을 곱한 양($m v^2$)을 고려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이 새로운 양을 '비스 비바(vis viva)' 즉 '살아 있는 힘 living force)'라 이름붙이고, 평형 상태에 있을 때의 힘 '비스 모르투아(vis mortua)' 즉 '죽어 있는 힘 dead force)'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질량에 빠르기 제곱을 곱한 양($m v^2$)의 중요성을 처음 지적한 것은 하위헌스였습니다. 지금 알려져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충돌과 흔들이(진자) 시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을 다루었습니다. 비스 비바 논쟁은 여러 면에서 곱씹어 볼만한 흥미로운 논쟁이지만 여기에서는 더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더 상세한 것은 아래 논문이 유용합니다.
Carolyn Iltis (1971). "Leibniz and the Vis Viva Controversy". Isis, Vol. 62, pp. 21-35.
George E. Smith (2006). "The vis viva dispute: A controversy at the dawn of dynamics". Physics Today 59, 10, 31-36; doi: http://dx.doi.org/10.1063/1.2387086
지금은 용어에 대한 글이라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거론되는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고자 합니다. 표준적인 물리학 용어로 빠르기의 크기만을 생각하는 양, 영어로 speed를 '속력(速力)'이라 하고, 빠르기의 크기와 방향까지 고려하는 양, 영어로 velocity를 '속도(速度)'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매우 혼동스럽고 부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크기만을 생각하는 양(흔히 맥스웰의 제안을 따라 '스칼라 양'이라 부릅니다)은 온도, 밀도, 경도, 강도 등과 같이 '~도(度)'를 접미어로 나타냅니다. 이와 달리 크기와 방향을 함께 생각하는 양(흔히 '벡터 양'이라 부릅니다)의 대표적인 예가 힘(force)입니다. 그래서 '속력(速力)'이라고 '~력'으로 된 용어는 벡터 양을 나타내고, '속도(速度)'와 같이 '~도'로 된 용어는 스칼라 양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일관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용어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 배울 때에는 무척 혼동스럽고 왜 그런 식으로 이름이 붙었는지 납득이 안 가는데, 그냥 그렇게 오랫 동안 써 오다 보니 익숙해져 버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관되지 못하고 무원칙스러운 용어법은 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장애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는 현재로서는 해결방법이 전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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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ocity vs Speed에 대응하는 번역에 있어서 속도와 속력간에 그런 혼동의 여지가 있었군요. 아마도 일본인들이 번역을 했을 것 같은데…벡터량와 스칼라량이라는 개념이 동양에서 체화해 받아들이기엔 조금 낯선 개념인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