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 1장 발제 (서울모임)
질문 및 토론
앎의 바탕 구도
작성자
최윤석
작성일
2019-12-07 00:55
조회
4300
2019.12.05 최윤석 발제
제 1장 소를 찾아 나서다 : 앎의 바탕 구도
Key word : #여헌_장현광, #우주요괄의첩, #우주설, #답동문, #근대학문, #대지는_왜_떨어지지_않는가, #공간개념, #앎의_바탕구도, #격물, #궁리, #변화의_원리, #예측적_앎, #자득적_개념, #상수학, #수학
그를 위해서 저자는 책의 구성을 ‘심학십도’라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성학십도’와 ‘심우십도’를 합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성리학의 핵심적 내용을 열 폭의 도식으로 요약해내어 본격적인 학습을 위한 도식이다. 그리고 심우십도는 한 사람이 ‘소’로 상징되는 진리를 찾아 헤매며 참된 깨달음을 찾아나간다는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저자는 성학십도라는 틀을 통해서는 자연철학의 핵심적 내용들을 간결한 열 장의 구성으로 담아내어 조망하고자 하는 의지를, 심우십도라는 틀을 통해서는 온전한 앎을 찾아 떠나는 학문의 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러한 ‘심학십도’의 구성을 우리(동아시아) 문화권으로 운을 떼어 바깥의 서구 학문의 성취들을 접한 뒤에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하는 오딧세우스적 구조로 펼쳐가고 있다. 즉 제 1장에 나타난 여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근대 서구 과학이 그 내용들을 어떻게 채웠는가를 알아본 후 마지막 주제에서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해 그것들을 우리의 지적 자산으로 삼아보려는 노력을 하려는 것이다. 저자가 이와 같이 구성을 한 이유는 동아시아, 특히 우리 문화권에서 과학을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헌 장현광(1554~1637)은 갈릴레이(1564~1642)가 탄생한 시기와 10여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서구에서도 아직 근대 과학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다. 또한 여헌이 <우주요괄첩>을 작성한 1571년까지만 해도 조선 땅에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저자가 책의 첫 장의 주인공을 여헌으로 내세운 이유일 것이다. 저자는 서구 문명이 조선에 유입되기 직전까지 우리가 가졌던 자생적인 지적 유산을 최대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일단 여헌의 학문 방식은 ‘성역 없는 학문 세계’를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글을 쓰는 방식만 보더라도 “내가 말하노니(여왈)의 형식을 취하며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대부분의 학자들, 심지어 퇴계마저도 기존 경전들을 충실하게 주석해나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일부 덧붙이는 방식 위주의 학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우리 학문 전통 안에서 <성학십도>가 간행된 1570년을 고전학문의 정점이라고, <우주요괄첩>이 작성된 1571년을 근대학문의 기점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한 여헌이 학문을 탐구하는 방식에도 근대학문의 정신이 드러나있다. 굳이 길게 부연할 필요도 없이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말할 수 있겠다. “우주 안의 일이라면 무엇이나 묻자, 그리고 모르면 찾자, 그리고 이것은 너와 내가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인류 사회에서 신이 직접 계시해준 지식, 성인만이 알아낼 수 있었던 지식, 신령한 능력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지식이 판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여헌은 시공을 뛰어넘거나 인간의 중추신경계 등을 포함한 물리적 정보채널을 넘어서는 이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설령 성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져 온 전통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떤 신의 계시라 할 지라도, 용한 점쟁이의 점술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떠한 신비한 지식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가히 앎의 방식을 신화에서 과학으로 옮겨놓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제목 ‘내 안에 있는 이치로 천지만물을 비추다’ 부분은 제 9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고자 문제 의식으로 가볍게 짚기만 해두었다. ‘이해’와 ‘앎’과 ‘정보’와 ‘지식’ 등에 대해서 다루는 듯하다.)
① 우리는 우주 내의 존재물들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理)를 찾아낼 수 있다.
② 이렇게 얻어진 변화의 원리를 활용하면 그 존재물의 현재 상태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과거 상태와 미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다. (예측적 앎)
저자는 근대 과학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이 더 요구된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떠한 존재물을 지정했을 때 이를 특징짓는 존재물의 ‘특성’을 나타낼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특성을 지닌 존재물의 ‘상태’를 나타낼 개념이다. 예를 들어, “돌이 날아간다”고 할 때 돌의 특성을 지칭할 개념과 돌의 운동을 지칭할 개념이 구체화되어야 의미 있는 서술 및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헌도 이러한 개념이 필요하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기는 했을 것이라 저자는 추측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재구성해서 저자는 71p에 나온 바와 같이 ‘앎의 바탕 구도’를 정리하였다. 여헌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상태’ 개념을 통해서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전제하고,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할 수 있는 변화의 원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론을 찾는다. 안타깝게도 여헌은 구체적인 이론을 찾는 것까지는 이루지 못했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수학의 중요성을 예견하며 후대에 나머지 일을 맡기고자 했다.
이러한 질문을 조금 자세히 뜯어보자. 이는 우리가 공간을 몇 차원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만일 공간을 3차원으로 본다면 위와 같은 질문을 나올 수 없다. 3차원으로 본다는 것은 앞뒤, 좌우, 상하 세 가지 방향 축을 각각 대등한 것으로 보는 입장인데, 이를 받아들이면 앞뒤나 좌우 방향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데 유독 상하 방향으로만 낙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와 달리 여헌을 비롯한 그 이전 사람들은 서로 대등한 앞뒤 방향과 좌우 방향이 2차원을 이루며, 상하 방향은 이들과 대등하지 않으므로 별도의 1차원을 이룬다고 보는 입장에 해당한다. 여헌은 <답동문>에서 이러한 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사유를 전개했기 때문에 “대지는 왜 떨어지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만약 여헌이 이러한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면, 기존의 공간 개념을 버리고 3차원 혹은 여타의 공간 개념을 고안해냄으로써 우리만의 자생적인 과학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과학 체계가 우리에게 유입되어 답을 제시하기까지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이러한 고민을 품고, 즉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동아시아에서 과학 혹은 더 나아가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품고 제 10장까지 읽어나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제 1장 소를 찾아 나서다 : 앎의 바탕 구도
Key word : #여헌_장현광, #우주요괄의첩, #우주설, #답동문, #근대학문, #대지는_왜_떨어지지_않는가, #공간개념, #앎의_바탕구도, #격물, #궁리, #변화의_원리, #예측적_앎, #자득적_개념, #상수학, #수학
- 여는 글
그를 위해서 저자는 책의 구성을 ‘심학십도’라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성학십도’와 ‘심우십도’를 합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성리학의 핵심적 내용을 열 폭의 도식으로 요약해내어 본격적인 학습을 위한 도식이다. 그리고 심우십도는 한 사람이 ‘소’로 상징되는 진리를 찾아 헤매며 참된 깨달음을 찾아나간다는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저자는 성학십도라는 틀을 통해서는 자연철학의 핵심적 내용들을 간결한 열 장의 구성으로 담아내어 조망하고자 하는 의지를, 심우십도라는 틀을 통해서는 온전한 앎을 찾아 떠나는 학문의 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러한 ‘심학십도’의 구성을 우리(동아시아) 문화권으로 운을 떼어 바깥의 서구 학문의 성취들을 접한 뒤에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하는 오딧세우스적 구조로 펼쳐가고 있다. 즉 제 1장에 나타난 여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근대 서구 과학이 그 내용들을 어떻게 채웠는가를 알아본 후 마지막 주제에서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해 그것들을 우리의 지적 자산으로 삼아보려는 노력을 하려는 것이다. 저자가 이와 같이 구성을 한 이유는 동아시아, 특히 우리 문화권에서 과학을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 근대학문의 싹, 여헌 장현광
여헌 장현광(1554~1637)은 갈릴레이(1564~1642)가 탄생한 시기와 10여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서구에서도 아직 근대 과학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다. 또한 여헌이 <우주요괄첩>을 작성한 1571년까지만 해도 조선 땅에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저자가 책의 첫 장의 주인공을 여헌으로 내세운 이유일 것이다. 저자는 서구 문명이 조선에 유입되기 직전까지 우리가 가졌던 자생적인 지적 유산을 최대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일단 여헌의 학문 방식은 ‘성역 없는 학문 세계’를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글을 쓰는 방식만 보더라도 “내가 말하노니(여왈)의 형식을 취하며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대부분의 학자들, 심지어 퇴계마저도 기존 경전들을 충실하게 주석해나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일부 덧붙이는 방식 위주의 학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우리 학문 전통 안에서 <성학십도>가 간행된 1570년을 고전학문의 정점이라고, <우주요괄첩>이 작성된 1571년을 근대학문의 기점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한 여헌이 학문을 탐구하는 방식에도 근대학문의 정신이 드러나있다. 굳이 길게 부연할 필요도 없이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말할 수 있겠다. “우주 안의 일이라면 무엇이나 묻자, 그리고 모르면 찾자, 그리고 이것은 너와 내가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인류 사회에서 신이 직접 계시해준 지식, 성인만이 알아낼 수 있었던 지식, 신령한 능력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지식이 판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여헌은 시공을 뛰어넘거나 인간의 중추신경계 등을 포함한 물리적 정보채널을 넘어서는 이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설령 성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져 온 전통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떤 신의 계시라 할 지라도, 용한 점쟁이의 점술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떠한 신비한 지식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가히 앎의 방식을 신화에서 과학으로 옮겨놓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제목 ‘내 안에 있는 이치로 천지만물을 비추다’ 부분은 제 9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고자 문제 의식으로 가볍게 짚기만 해두었다. ‘이해’와 ‘앎’과 ‘정보’와 ‘지식’ 등에 대해서 다루는 듯하다.)
- 앎의 바탕 구도
① 우리는 우주 내의 존재물들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理)를 찾아낼 수 있다.
② 이렇게 얻어진 변화의 원리를 활용하면 그 존재물의 현재 상태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과거 상태와 미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다. (예측적 앎)
저자는 근대 과학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이 더 요구된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떠한 존재물을 지정했을 때 이를 특징짓는 존재물의 ‘특성’을 나타낼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특성을 지닌 존재물의 ‘상태’를 나타낼 개념이다. 예를 들어, “돌이 날아간다”고 할 때 돌의 특성을 지칭할 개념과 돌의 운동을 지칭할 개념이 구체화되어야 의미 있는 서술 및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헌도 이러한 개념이 필요하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기는 했을 것이라 저자는 추측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재구성해서 저자는 71p에 나온 바와 같이 ‘앎의 바탕 구도’를 정리하였다. 여헌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상태’ 개념을 통해서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전제하고,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할 수 있는 변화의 원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론을 찾는다. 안타깝게도 여헌은 구체적인 이론을 찾는 것까지는 이루지 못했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수학의 중요성을 예견하며 후대에 나머지 일을 맡기고자 했다.
- 대지는 왜 떨어지지 않는가? : 자득적 개념
이러한 질문을 조금 자세히 뜯어보자. 이는 우리가 공간을 몇 차원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만일 공간을 3차원으로 본다면 위와 같은 질문을 나올 수 없다. 3차원으로 본다는 것은 앞뒤, 좌우, 상하 세 가지 방향 축을 각각 대등한 것으로 보는 입장인데, 이를 받아들이면 앞뒤나 좌우 방향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데 유독 상하 방향으로만 낙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와 달리 여헌을 비롯한 그 이전 사람들은 서로 대등한 앞뒤 방향과 좌우 방향이 2차원을 이루며, 상하 방향은 이들과 대등하지 않으므로 별도의 1차원을 이룬다고 보는 입장에 해당한다. 여헌은 <답동문>에서 이러한 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사유를 전개했기 때문에 “대지는 왜 떨어지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만약 여헌이 이러한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면, 기존의 공간 개념을 버리고 3차원 혹은 여타의 공간 개념을 고안해냄으로써 우리만의 자생적인 과학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과학 체계가 우리에게 유입되어 답을 제시하기까지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이러한 고민을 품고, 즉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동아시아에서 과학 혹은 더 나아가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품고 제 10장까지 읽어나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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