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제2기, 제3기, 고진기, 신진기
<종의 기원> 9장은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책 전체가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 비슷한 것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고 종분화가 일어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보니 당시의 지질학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런데 <종의 기원> 1판 p. 287 (신현철 역 379쪽; 장대익 역 400쪽), p. 288 (신현철 역 381쪽; 장대익 역 402쪽), p. 300 (신현철 역 395쪽; 장대익 역 415쪽), p. 304 (신현철 역 399쪽; 장대익 역 419쪽) 등에는 제2기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현대 지질학에서 쓰지 않는 '제2기'라는 용어가 왜 등장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늘 제3기와 제4기라는 용어가 어떻게 나온 건지 궁금했습니다. 그럼 제1기와 제2기는 뭔가 싶기도 하구요. 찾아보니 1759년 이탈리아의 죠반니 아르두이노(Giovanni Arduino)가 이탈리아 북부의 지형을 연구하면서 연체동물 화석의 분포를 기준으로 시기(ordini)를 구별하고, 이를 제1기, 제2기, 제3기(Tertiary)로 불렀습니다.
1829년 프랑스의 지질학자 쥘 데노예가 센 분지의 퇴적층이 더 최근 것임을 밝히고, 이를 제4기(Quaternaire, Quaternary)라 부르자고 제안했습니다.
Desnoyers, J. (1829). "Observations sur un ensemble de dépôts marins plus récents que les terrains tertiaires du bassin de la Seine, et constituant une formation géologique distincte; précédées d'un aperçu de la nonsimultanéité des bassins tertiares" Annales des Sciences Naturelles. 16: 171–214, 402–491. (원문)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여전히 이 분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9장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성"에서 제3기뿐 아니라 제2기에 대한 언급이 계속 나옵니다. 하지만 '제1기'와 '제2기'는 이탈리아 북부가 아닌 지역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이 밝혀져서 지질학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개념/용어가 되었습니다.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의 원리> 제3권(1833)에서 제3기를 에오세(Eocene), 미오세(Miocene), 플리오세(Pliocene)로 더 세분했습니다. (한국어 표준용어는 '마이오세'와 '플라이오세'입니다.] 이 때만 해도 지금처럼 신생대(Cenozoic Era)라는 용어는 없었습니다. 1840년 영국의 지질학자 존 필립스(John Phillips 1800-1874)가 지질시대를 크게 Palæozoic, Mesozoic, Kainozoic으로 나누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것이 이후 고생대(Paleozoic), 중생대(Mesozoic), 신생대(Cenozoic)가 되었습니다.
Phillips, John (1840). "Palæozoic series". Penny Cyclopaedia of 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dge. Vol. 17. London, England: Charles Knight and Co. pp. 153–154.
[출처: https://stratigraphy.org/chart ]
위 표에 나와 있는 지금의 지질학적 시대 구분에서는 에오세보다 더 오래된(지층으로는 더 아래에 있는] 팔레오세(Paleocene)가 추가되었고, 마이오세/플라이오세와 에오세 사이에 올리고세(Oligocene)가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올리고세를 제안한 것은 독일의 고생물학자 하인리히 바이리히(Heinrich Ernst Beyrich 1815–1896)였습니다.
"Der neue Name Oligocän mag sich zwischenstellen zwischen das ältere Eocän und das jüngere Miocän." [Beyrich, H.E. (1854). "Über die Stellung der hessische Tertiärbildungen" Verhandlungen Köngliche Preussischen Akademie Wissenschaft Berlin. S. 640-666.]
(1854년). 바이리히는 이 시기에 멸종한 연체동물의 화석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 주목하여 '드물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ὀλίγος(올리고스)와 '새롭다'라는 의미의 καινός(카이노스)를 결합하여 이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팔레오세(Paléocène)를 제안한 것은 1874년 프랑스의 고생물학자 빌헬름 쉼퍼(Wilhelm Philippe Schimper 1808-1880)였습니다. 이름만 보면 독일사람인 듯 보이지만 쉼퍼는 알자스 지역 출신으로 논문을 주로 프랑스어로 발표했습니다.
하나 지적할 점은 한국어로 '팔레오세'라 쓰는 Paleocene은 Palaeocene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조어상 '오래된'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παλαιός(팔라이오스)와 '새로운'이란 뜻의 καινός(카이노스)를 결합한 말이라면 Palaeo+cene가 되었을 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라이엘이 제안한 에오세(Eocene)가 먼저 있었습니다. 에오세는 '여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ἠώς(에오스)와 카이노스를 붙여 만든 말입니다. 쉼퍼가 프랑스어로 Paléocène을 제안할 때 그 조어는 Pal+éo+cène 또는 παλαιός+ἠώς+καινός의 형태, 즉 "에오세보다 더 오래된 신생대의 시기"란 의미였습니다.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를 알파벳으로 쓰면 palae- 또는 palæ-로 써야 할텐데, 뒤에 모음이 eocene이 있으므로 ae 또는 æ가 모두 사라집니다. 따라서 Pal+Eocene 즉 에오세보다 더 이른 시대라는 의미로 말할 때에는 Palaeocene이라고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어로도 실상 '팔에오세'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용어가 될 텐데, 한국지질학회에서는 그냥 '팔레오세'로 정한 모양입니다.
위의 표에서 제3기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대신 구진기(Paleogene)와 신진기(Neogene)가 들어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진기(Neogene)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것은 1853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지질학자 모리츠 회르네스(Moriz Hoernes 1815-1868)는 빈 분지의 연체동물 화석을 연구하면서 에오세와 달리 미오세와 플리오세에서 특징적으로 연체동물 화석이 더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제3기가 너무 길고 단조롭게 제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를 두 시기로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독일어로 Neoge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Neogen(네오겐)은 그리스어 νεος(네오스, 새로운)와 γιγνομαι(기그노마이, 발생)를 연결하여 만든 신조어입니다. 이 말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gene을 음차하여 “-진(進)”으로 번역하기로 해서 ‘신진기’와 ‘고진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일본어로는 新第三紀와 古第三紀로 쓰는데, 이전에는 이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한국식 독음으로 읽어서 신제3기와 고제3기라고 했다가, 최근에 ‘신진기’와 ‘고진기’로 바꾼 모양입니다.
"Das häufige Vorkommen der Wiener Mollusken sowohl in den typisch-meiocänen als in den typisch-pleiocänen Ablagerunge verandlasste mich, um das ewige Einerlei bei Angabe des Vorkommens zu vermeiden, beide Ablagerungen vorläufig unter den Namen N e o g e n (νεος neu und γιγνομαι entstehen) im trennenden Gegensatze zu den eocänen zusammenzufassen." [Hörnes, M. (1853). "Mittheilungen an Professor Bronn gerichtet". Neues Jahrbuch für Mineralogie, Geognosie, Geologie und Petrefaktenkunde: 806–810.]
신생대 지질시대의 이름의 다소 복잡한 변천을 아래 표에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출처: Berggren, William A. (1998). "The Cenozoic Era: Lyellian (chrono)stratigraphy and nomenclatural reform at the millennium". Geological Society, London, Special Publications. 143 (1): 111–132. 10.1144/GSL.SP.1998.143.01.10]
우여곡절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하간 지금은 1989년에 제안된 Cowie-Bassett의 구별과 용어가 정착된 듯 합니다.
Cowie, J. W. & Bassett, M. G. (1989). International Union of Geological Sciences 1989 stratigraphic chart. Episodes,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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