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에 관한 소감 및 질문
1. 환원주의에 대하여
“왜냐하면 미시적 차원에서는 원자 구조 내지는 분자 구조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기하학적 특징을 띠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데, 이런 특징들은 명백히 어떤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화학 법칙들의 소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18쪽)
이런 저자의 생각은 생명체의 구조가 외적인 힘의 작용이 아닌, 내적인 ‘형태발생학적’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기준에 비추어 인공물들로부터만 아니라 자연적 물체들의 대부분으로부터 절대적으로 구별되지만, 결정들만은 예외적으로 이 기준으로도 생명체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점이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질문은 ‘생명체의 거시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내적인 힘들이란 결정의 형태를 발생시키는 미시적 상호작용들과 같은 본성의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명 현상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물질과 다른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닌, 동일한 물리화학적인 작용의 메커니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효소의 작용 메커니즘이라는 다소 전문적인 분야를 파고들면서까지 저자가 입증해 보이고 싶어하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저는 자크 모노의 이런 환원주의적 입장에 대해서 이를 명백히 반증할만한 증거나 논리가 아직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과학의 역사는 지금껏 환원주의가 승리를 거두어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싶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 같지 않던 하늘과 땅의 법칙이 실은 동일한 것이었다는 것을 비롯해서 신비적으로 설명되던 많은 부분들이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토대로 환원되어 설명력을 키워왔다고 생각됩니다. 환원주의가 틀렸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가 49쪽에서 주장하듯이, 명확한 지식이나 주의 깊은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현재 처한 무지로 인해 정당화되고 있을 뿐‘이라는 반대 진영에 대한 저자의 비판에 대해 아직은 뚜렷히 반증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울러 미시적 차원의 반복성이 거시적 차원에서 드러날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결국 스케일의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2. 외적인 힘과 질료의 특성 간의 상호작용이나 각각의 개별적 효과를 분리해 낼 수 있는가?
다만 환원주의가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창발(emergence) 현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인공물의 경우, 일단 완성된 거시적 구조는 그것의 질료를 구성하는 원자들이나 분자들 사이의 내적 응집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외적 힘을 나타낸다.”(24쪽)
이 대목에서 저는 질료만의 특성과 효과를 명확히 분리해 낼 수만 있다면 저자의 말대로 외적 힘만의 변수로 인공물을 해석할 수 있을거라는 데 동의합니다. 다만 외적인 힘과 질료라는 이 두 요소가 쉽게 분리할 수 있을 것인지, 이 두 요소 간에 생겨낼 수 있는 창발적 효과는 어떻게 계산해야하는 지는 여전히 환원주의가 넘어야할 큰 산이겠구나 싶습니다.
3. 생명체를 대상으로 합목적성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가? - 질문
“이 크기는 이론적으로는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종들을 ‘합목적성의 등급’을 나타내는 사다리 위에 대강이나마 수직적으로 위계 지우는 것은 가능하다.”(31쪽)
이 부분에 관해서 질문을 드립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아마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전까지만 해도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가장 복잡한 창조의 끝판왕일테니 유전자 코드 수가 다른 생명체에 비해 가장 많으리라 추측했다고 들었기에 저자도 이런 추측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유전자 코드 수가 다른 동물에 비해 더 많지 않다는 점이 밝혀진 이상, 과연 모노의 말대로 서로 다른 종들을 합목적성의 등급으로 위계 지울 수 있는 또다른 방안이 있는 지가 궁금합니다. 아마도 없을 것 같지만.
4. 저자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대한 소회
2장에서 저자는 political correctness를 염두에 두지 않고 솔직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는 부분이 매우 재밌었습니다. 대학시절 지나치게 교조적인 막시즘을 강요 받으면서 세미나 시간에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면 늘 네가 공부가 덜 되어서 그렇다고 선배들에게 타박 받던 기억이 나서 솔직히 통쾌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짜릿한 기분으로 그 부분을 읽었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
5. 우연과 필연
존재는 우연과 필연의 합작품이라는 저자의 결론과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고, 그 중 유용한 창조를 걸러내는 ‘필연’의 법칙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만물을 낳게 했다는 결론에 머리를 끄덕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크 모노는 극단론자는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연과 필연 모두의 위치를 존중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3~6장의 다소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효소의 촉매작용과 조절작용, 구조 형성 등에 관한 부분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생물학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다 보니 저로서는 새로운 내용들도 많아서 현대생물학의 성과들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게 하더군요. 그리고 효소가 ‘무근거성’의 원칙에 입각한, 순전히 ‘입체특이성’이란 방식으로 모양새를 통해 식별해내는, 즉 맥스웰의 도깨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고, 최근 카오스 재단 생물학 강연 등을 통해 이 사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환원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환원주의가 맞는 지 틀리는 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이 논쟁의 끝이 어떻게 될 지 지켜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앞으로 현대생물학에 대해 좀 더 공부해 본 후, 다시 이 책을 몇 차례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료] 자연철학이야기 대담 녹취록, 세미나 녹취록, 카툰 등 링크 모음입니다.
neomay33
|
2023.10.24
|
추천 0
|
조회 2941
|
neomay33 | 2023.10.24 | 0 | 2941 |
381 |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2)
박 용국
|
2025.02.01
|
추천 3
|
조회 205
|
박 용국 | 2025.02.01 | 3 | 205 |
380 |
[자료] 책새벽-목-문예사1 : 선사시대 관련 책
neomay33
|
2025.01.16
|
추천 0
|
조회 135
|
neomay33 | 2025.01.16 | 0 | 135 |
379 |
[자료] 『Cosmos』 읽으면서 초반에 알아두면 도움되는 내용
neomay33
|
2025.01.09
|
추천 0
|
조회 202
|
neomay33 | 2025.01.09 | 0 | 202 |
378 |
[자료] 「Cosmos」 다큐(2014, 1980) 영상보기 링크
neomay33
|
2024.12.31
|
추천 0
|
조회 877
|
neomay33 | 2024.12.31 | 0 | 877 |
377 |
제주항공 7C 2216편 여객기 사고 희생자분들을 추모합니다.
neomay33
|
2024.12.31
|
추천 0
|
조회 169
|
neomay33 | 2024.12.31 | 0 | 169 |
376 |
[질문] 보람의 가치론과 실재의 질서
자연사랑
|
2024.12.13
|
추천 2
|
조회 196
|
자연사랑 | 2024.12.13 | 2 | 196 |
375 |
[알림] 책새벽-목-시즌5 : 읽을 책 설문조사 결과
neomay33
|
2024.12.13
|
추천 0
|
조회 167
|
neomay33 | 2024.12.13 | 0 | 167 |
374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료 모음 - 캐릭터, 프랑스어 낭독 유튜브 등 (1)
neomay33
|
2024.12.11
|
추천 0
|
조회 194
|
neomay33 | 2024.12.11 | 0 | 194 |
373 |
[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6장. 기학의 표현주의
neomay33
|
2024.12.09
|
추천 0
|
조회 179
|
neomay33 | 2024.12.09 | 0 | 179 |
372 |
[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5장. 표현주의의 두 길.
neomay33
|
2024.11.28
|
추천 0
|
조회 187
|
neomay33 | 2024.11.28 | 0 | 187 |
저도「우연과 필연 」발췌글 본 후 책을 사서 읽고있니다. 책은 기대한대로 아주 흥미진진 한데도 머릿속에 정리 안 된 상태로 책장을 넘긴 부분들과 또 아직 끝까지 못 봐서 뒤죽박죽 상태랍니다. ^^
지연쌤 글이 있길래 다 제치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역시 가독성 탁월하신 글에 감동 받으며 읽는데 오늘 글은 다른 독후 감상문에 비해 너무 짧은 듯 아쉬운 기분도 드네요. 그래도 덕분에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정돈 되는 것 같으네요.
단백질의 입체특이적 구조, 합목적, 결정, 스케일 변화에 따른 창발현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