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vs. 생명의 기원
Nicolaas Rupke (2010). "Darwin’s choice". In: Denis R. Alexander and Ronald L. Numbers, eds. (2010). Biology and Ideology from Descartes to Dawkins. Ch. 6.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찰스 다윈이 없었더라면 진화이론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었을까? 아니면 많은 동시발견의 예들처럼 진화이론도 다윈이 설령 없었다 해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발전했을까? 길리스피 같은 과학사학자는 뉴턴이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이 프린키피아를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물리학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렴되는 사회적 영향력이 동시발견의 설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인가 바깥 자연 속에 있는 것”으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경우는 어떨까?
뤼센코주의의 문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로버트 영 이래 많은 과학사학자들이, 생물학은 좋든 나쁘든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 안에 얽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따르면, 생물학은 어떤 수준에서는 이데올로기이다. 즉 생물학의 주요 개념들은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관념들의 체계에서 비롯되었으며 거기에 적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우베 호스펠트와 라이너 브뢰머가 편집한 논문집 Darwinismus und/als Ideologie (2001)를 비롯하여, 아드리언 데스먼드, 제임스 무어, 재넷 브라운, 데이빗 리빙스턴, 로널드 넘버스 등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주장한 에른스트 마이어 같은 학자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마이어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신의 손’은 자연과정의 작동으로 대치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다윈적 진화의 객체적이고 실재론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가령 1981년 미국 대법원의 결정과도 통한다. 다윈주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다른 표현인 소위 창조과학을 다윈주의와 함께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이클 류즈도 Mystery of Mysteries: Is Evolution a Social Construction? (1999)에서 진화이론이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측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점점 더 과학적으로 타당한 내용이 증가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니콜라스 루프케(Nicolaas A. Rupke)의 “다윈의 선택”은 생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를 19세기 전반에 독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소위 ‘자체발생설’(autogenesis, autogeny)을 통해 논의하고 있다. 니콜라스 루프케는 브뢰머, 호스펠트와 함께 Evolutionsbiologie von Darwin bis heute (1999)를 편집했고, “The origin of species from Linnaeus to Darwin”이나 “Biology without Darwin”과 같은 논문을 썼다.
루프케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다윈 이전에 종의 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이 존재했다. (2) 이 이론은 다윈주의에 대한 과학적 대안을 대표한다. (3) 다윈은 전략적인 이유로 이 이론에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4) 다윈의 이론은 기원에 대한 생물의 발전에서 일종의 분기점이 되었다. (5) 다윈의 선택은 생명과학에 유익뿐 아니라 해악도 가져왔다. 다윈의 견해는 불완전하며 치우쳐 있다는 점뿐 아니라 연구주제만큼이나 저자 자신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편파적이다.
종의 기원을 다루는 이론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a) 종은 영원하다. (Heinrich Czolbe, Rudolf Virchow)
(b) 종은 창조된 것이다. (William Buckland, Adam Sedgwick, Louis Agassiz, Carl Linnaeus, Georges Cuvier)
(c) 종은 자연발생한 것이다.
(d) 종은 진화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무렵에 (a)는 이미 상당히 배척되고 있었으며, 다윈은 (b)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지만, (c)의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자체발생설(autogenesis)은 널리 알려진 ‘자연발생설’(generatio spontanea, Urerzeugung)과 직접 연관되며 무생물발생론(abiogenesis) 중 하나이다. 어떤 형태의 생명이든 최초의 표본은 부모가 없는 생식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믿음이다.
[자연발생설 이외의 용어로 primigenia, cosmica, primitiva, originaria, automatica, aequivoca, heterogenea, Urzeugung, autogene Zeugung 등이 있으며, 이 용어들이 모두 동의어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대개 abiogenesis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18세기 중엽에 뷔퐁(Georges-Louis Leclerc, Compte de Buffon)이 창조론에 대항하는 이론으로 제기한 이래, 1790-1860년의 시기에 특히 독일어권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자연발생설이 생명과 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사유로서 전개되었다.
자체발생설은 종은 기적적인 특별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씨앗들(germs)의 자연발생적 결합을 통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자연발생설은 일반적으로 “생명의 원초적 형태가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p. 145)는 믿음이다. 파스퇴르의 고전적 실험을 통해 자연발생설은 옳지 않음이 밝혀졌다. 자연발생설과 달리 자체발생설은 “과거의 한 시점에서 무생물로부터 생명의 조상격인 것이 생겨나고 그 뒤에는 다른 과정을 통해 생명이 변했다”(ibid.)고 주장한다. 그 다른 과정은 가령 자연선택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발생설은 자체발생설을 포함하지만, 지금도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겨난다는 주장을 버리더라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자체발생설(autochthonous generation)은 논의되고 있었다. [Joseph Dalton Hooker, Thomas Henry Huxley] 그러나 자체발생설은 실질적으로 독일에서 크게 발전했다. John C. Greene에 따르면, 19세기 초에 자연선택설은 압도적으로 영국에서 논의되었으며, 이는 경쟁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영국 특유의 정치경제학적 토대와 연관되어 있다. 비슷하게 자체발생설이 독일에서 주로 논의된 까닭은 환경결정론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루프케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윈은 왜 그렇게 철저하게 자체발생설을 무시했을까? 루프케는 그것이 다윈의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본다. 신의 섭리에 따른 창조가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과학적 과정에 의해 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기원이라는 훨씬 더 복잡하고 논쟁적인 주제를 일부러 피할 필요가 있었고, 자체발생설을 무시함으로써 논제를 자연선택과 적응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의미는 자체발생설이 신의 창조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체발생설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헉슬리나 포크트가 그런 예이다. 종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창조 아니면 진화로 이분법적으로 다룸으로써 자체발생설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포섭한 것은 다윈의 영리한 선택이었다. 다윈이나 라이엘 같은 빅토리아 자연학자들에게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지구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절대적 진리의 수호자였다.
요컨대 다윈이 자체발생설을 전략적으로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진화이론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루프케의 주장이다.
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은 19세기 빅토리아 영국의 고유한 전개이고 가령 프랑스어권이나 독일어권에서의 논의는 그와 매우 달랐다는 것이다. 또 19세기의 학문적 지평에서만 보더라도 진화 아니면 창조라는 이분법은 적절한 개념적 틀이 아니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다윈이 1859년의 책 제목을 '생명의 기원'이라고 하지 않고 '종의 기원'이라고 한 것은 매우 명민하고 어떤 면에서는 교활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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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풍부한 인문역사적 지식과 정보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 자신에게 공부가 되라고 가능한 댓글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ㅎㅎ
자체발생설은 옛날에 자연발생설로 배운것 같기도 한데... 여튼, 생물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조금 이해되는 듯도 하네요. 뜻밖의 지식! 참 재밌습니다. ^^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할 당시에 영국은 경제우위의 자본주의 , 독일은 정치우위의 전체주의? 뭐 이런 시류였다는 거죠. 그래서 자연선택에 의해 종이 다양화되었다고 한<종의 기원>은 영국적 이었다는 것 같고... 그런데, "요컨대 다윈이....진화이론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루프케의 주장" 이 대목은 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전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아서 ... 생명에 기원에 대한 내용은 없나? 궁금해지네요. 김재영선생님 글로 봐서는 아마도 생명에 대한 기원은 빠져 있는 듯 하고 다만 생명들이 왜 어떻게 현재와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했는지에 대한 연구만 담겨있나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