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모노와 알베르 카뮈, 그리고 레지스탕스
1970년에 출간된 자크 모노(Jacques Monod 1910-1976)의 <우연과 필연>는 제목을 무척 잘 지어서 더 유명한 책일 것입니다.
맨 앞에 있는 인용문(에피그래프) 중 하나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Tout ce qui existe dans l'univers est le fruit du hasard et de la nécessité.»)"라는 유명한 문장입니다. 아이러니는 이 문장이 데모크리토스에게서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참조) 데모크리토스의 저작 중 살아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데모크리스토스가 말했다고 인용된 '부분들' 중에도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앙트완 당샹은 그리스 자연철학 전반에 걸쳐 '우연'이란 개념은 거의 논의되지 않았으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과는 충돌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여하간 이 인용문에서 모노의 책 제목이 왔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https://fr.wikipedia.org/wiki/Le_Hasard_et_la_Nécessité
두 번째 에피그래프는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1944)의 끝부분에서 가져왔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시포스는 자신의 바위로 돌아오며, 언제나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이 덧없는 일을 조용히 생각해본다. ...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
얼핏 보면 "현대생물학의 자연철학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와 시시포스의 신화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생명과학을 말하고 자연철학을 말하는 이 책에서 왜 다소 뜬금없이 시시포스의 신화, 그것도 부조리에 대해 매우 심각한 이야기를 펼치는 알베르 카뮈의 텍스트를 에피그래프로 삼은 것일까요?
2013년에 출간된 션 비. 캐럴(Sean B. Carroll)의 책 <용감한 천재: 과학자와 철학자와 프랑스 레지스탕스로부터 노벨상까지 그들의 멋진 모험들 (Brave Genius: A Scientist, a Philosopher, and Their Daring Adventures from the French Resistance to the Nobel Prize)>(https://amzn.to/3VtaBnO)은 모노와 카뮈의 매우 흥미로운 우정을 보여줍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친나치 비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콩바(Combat)>라는 제목의 저항신문(소위 '불온유인물')에 '보샤르(Bauchard)'라는 가명으로 반나치 글을 계속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보샤르가 <이방인>과 <칼리굴라>와 <시시포스의 신화>를 쓴 작가 알베르 카뮈임을 몰랐습니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박테리아를 연구하던 모노는 반나치 게릴라전을 주도하는 무장투쟁 집단 Forces Français de l’Intérior에서 '말리베르(Malivert) 대장'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스럽게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치와 비시 정권의 전체주의 군사주의에 반대했으며, 소비에트연방(소련)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엄혹한 세계대전과 국가폭력과 비합리성과 부조리 속에서 깊이 번민하고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그 해답을 모색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친나치 비시 정권이 무너진 뒤, 카뮈는 Groupes de Liaison Internationale에서 여러 국적의 전쟁피해자를 돕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모노를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우정과 연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펼치는 자연철학의 사유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철학자의 사변적 논의가 아니라 엄혹한 현실 속에서 생명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깊이 고민한 생명과학자의 고뇌와 대답일 것입니다.
Oren Harman (2014) "Chance and Necessity" Revisited
모노가 <우연과 필연>의 에피그래프를 다른 아니라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가져온 것, 그것도 그 마지막 문장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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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자크모노와 까뮈의 인연이 각별했군요...
역시 만물박사 김재영선생님!! 덕분에 책을 꼭 읽어야겠단 다짐 또 합니다. 그리구,
세상에 이런 멋지고 흥미로운 이야기, 책 들이 널려있다는 데 흥분되네요.
자크 모노 선생님, 각별하게 느껴지네요. 레지스탕스셨다니요. 카뮈와 레지스탕스 자크 모노, 누가 영화로 만들어주면 좋겠네요. 『우연과 필연』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왠지 과학 이상의 얘기가 많이 들어있거나 내포돼 있을 것 같습니다.